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55
제55화
뜨겁다.
숲을 막 빠져나오는 마난 일행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마치 화상이라는 고통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허억… 헉….”
“고통이… 점점 심해집니다, 마난 님.”
“…견뎌라. 오직 정신의 나약함이 불러온 환영이니라.”
“하지만….”
“견디라고 하였다!”
“으윽….”
– 키히히히히히!
공간 전체를 악몽령이 장악한 것 같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까부터 환각이 더 진해지는군….’
마난은 이제 더는 견디기가 어려울 때쯤에 들려온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마난 님! 지형이….”
“…그래, 맞게 찾아온 것 같구나.”
용암을 머금은 동굴이 유황 냄새를 온 사방에 흩뿌리고 있었다.
숲에서 곧장 이러한 지형이 나타나다니. 던전 코어라는 기이한 장치가 아니었다면 어디서도 볼 수 없었을 풍경이다.
“어서 악몽령을 찾아라!”
시간은 아직 산토가 내건 제한 시간의 절반 정도를 지나고 있었지만, 마난 일행은 한계였다. 사색이 되어 유랑극단의 위치를 찾아다니는 백과 경.
그리고 거의 지쳐 쓰러져 갈 때쯤, 경이 소리쳤다.
“마난 님! 찾았습니다.”
정말이었다.
유랑극단의 입구로 보이는 곳에 악몽령이 서 있었다.
– 키히히히히!
“죽, 죽일까요?”
“그만! 손대지 마라! 어떤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면 어떻게….”
그때 모두에게 떠오른 것이, 그들에게 주어졌던 초대장이었다.
“초대장. 초대장이 새겨진 손을 내밀어라.”
그 말에 백과 경이 손목을 내밀자, 악몽령이 그들의 손목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치이이이…
[유랑극단의 초대에 응했습니다.] [공연을 관람할 권한을 획득했습니다.] [공연은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이루어집니다.]치이이이…
마난 역시도 손을 내밀어 초대장을 거두어 가도록 했다.
“후우… 드디어 정신이 말끔해지는군요.”
“위험한 녀석이었습니다. 공연은….”
“녀석과 잠시도 어울리고 싶지 않구나. 기이하고 사특한 존재다.”
“마난 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규칙을 지켜서 별 탈은 없었군요.”
“지금에야 별 게 아니라고 느껴지겠지만… 모르겠구나.”
마난은 앞서 만났던 고블린을 떠올렸다.
“만약 이 앞에 우리를 막아섰던 자가 훨씬 강한 자였다면….”
이곳까지 오는 데에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차적인 문제들은 덤이고.
아마도 시간 내에 악몽령의 초대에 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상황이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시련을 극복해 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심력을 투자하는 건 지금 상황에선 사치다.
한껏 홀가분해진 정신으로 이동을 시작하는 마난의 무리.
숲과는 달리 그리 광활하다 느껴질 정도의 크기는 아닌 듯한 동굴.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기척이 느껴졌다.
“항상 방심하지 말거라, 예상치 못한 사태를 맞닥뜨릴 수 있으니. 그래….”
마난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여인과 같이 말이다.”
검은 뿔과 붉은 머리칼.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저 여인은, 전설로만 전해오는… 악마다.
“안녕?”
“…오늘의 불운이 이곳에서 종지부를 찍는군.”
마난이 페넥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물러서라, 혈영강시에게 상대하도록 할 터이니.”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적의 강함을 예측할 수 없다. 지금은 너희의 의견을 구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의 눈이 매서워졌다.
“명령이다.”
“…예!”
파팟-!
혈영강시인 일행의 칭과 현이 전면을 틀어막았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편안함을 느낄 정도로 혈영강시의 대단함은 마난과 백 그리고 경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스으으으…
[페넥스의 기본 능력: 타오르는 불꽃이 발동합니다.] [페넥스는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지속해서 상당량의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화르륵…
붉은 불꽃을 피워내는 페넥스.
망자에게 상극으로 꼽히는 힘이라 하면 서방에선 빛을 꼽지만, 동방에선 불을 꼽는다.
정화의 불꽃이 가진 부패를 물리치는 힘 때문.
그러나 그걸 떠나서… 뭔가… 뭔가가 있다.
편안하면서도, 동시에 답답한 듯한 이 기분.
전투의 결과가 전혀 예측되지 않았다.
상황이 여기에 다다르자, 마난은 한 가지 수를 안배했다.
휘오오오오…
마난의 손에서 일어난 피 안개가 슬쩍 경의 손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는 오직 마난의 눈에만 보였다.
“그대가 이곳의 주인인가?”
“…….”
마난의 질문에 페넥스가 그저 빙긋 웃었다. 그리곤 곧,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파앗…
“온다!”
오직 본능과 생전에 몸에 새겨진 전투의 기억들로만 싸우는 혈영강시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카아아아앙-!
페넥스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걸 겨우 저지하는 혈영강시.
놀랍게도 검날에 실린 날카로움과 힘을 손목만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혈영강시의 힘이 대단하다고는 알고 있었으나, 전설 속의 존재인 악마에게까지 통할 줄이야.
백과 경이 서로 마주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세를 이어가 합공을 펼친다면 페넥스가 비록 악마라 할지라도 맞상대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파밧-!
그렇기에 마난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마난도 그것이 옳은 판단이라 생각했는지 제지하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혈교 무리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쩌어엉-!
페넥스의 측면으로 백과 경의 발이 올라와 물러서는 그녀.
후웅-!
쩌어어엉!
물러나는 틈을 노려 칭의 강시가 전면에 정권을 뿌렸다.
불쾌한 3인조 특유의 끈적한 연계가 시작됐다. 페넥스의 사방을 점하는 그들.
카아앙-!
캉-
카앙- 캉!
사방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연이어 방어에 성공.
전적으로 혈교 측이 우세한 상황이었지만, 모두의 심장에서 불안감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까아앙-!
깡!
페넥스의 입가에 계속해서 미소가 떠올라 있었기 때문.
화르륵…
그녀의 검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무언가의 전조다.
“피해라!”
마난의 고함과 함께 일사불란하게 좌우로 갈라지는 혈교 무리.
[페넥스가 고통 분담을 사용합니다.] [페넥스가 부채꼴 형태의 화염파를 발사합니다.] [화염파는 전투력의 200%를 범위 내의 적에게 나누어 입힙니다.]콰아아아아앙-!
용암 동굴의 땅을 내려찍으며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불꽃. 내려찍은 공간에 마치 지옥과도 같은 고열이 스쳐 지나갔다.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혈영강시가 페넥스의 공격을 견뎠던 건 어쩌면 우연, 혹은 악마의 농간일 거라는 생각.
…악마의 공격에 직격당하면 죽는다.
그 누구라 할지라도, 뼛조각 하나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보좌해라! 경, 백!”
“마난 님… 예!”
[마난이 불길한 그림을 사용합니다.] [기의 발출 시 혈무로 이뤄진 기의 잔영이 나타나 추가 타격을 가합니다.] [추가 타격이 5번 적중할 때마다 대상에게 출혈을 일으킵니다.]파바바박-!
무수한 정권의 홍수가 페넥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페넥스가 씨익 웃으며 검을 횡으로 한 차례 휘둘렀다.
쒜에에엑-!
한 차례의 검격만으로 붉은 잔영 절반이 사라졌다. 마난이 페넥스의 공격에 위축됐기 때문.
물러났던 4인의 혈교도가 다시금 페넥스의 모든 방위를 차단했다.
파바밧-!
카아아앙-!
마난까지 전열에 합류한 지금, 그들의 연계는 적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카가가각…
쩌엉!
그것을 전부 막아내는 페넥스도 괴물이지만, 괴물도 결국 숨을 쉬어야만 한다. 빈틈은 주어지기 마련.
카아아앙-!
카각…
언제일까…
이 괴물이 비틀거리는 순간은.
그 순간, 백과 경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난의 오른손이었다.
휘오오오오…
심상치 않은 기운이 그의 손에 모여들고 있었으니, 저것은 혈교의 육대 사자만이 전수받은 절기가 분명했다. 다만 동작이 크고 기의 발산 후에 찾아오는 잠시의 치명적인 무력의 공백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필사의 각오로 사용하는 힘.
경과 백은 그것을 보고 마난의 의도를 이해했다.
파밧-!
악마에게 숨을 강요해야 한다.
악마가 숨을 들이마시게 되는 그 순간이, 곧 그녀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파아앙-!
칭.
쩌어어어엉-!
현.
강시들은 충분히 제 몫을 해냈다.
이제 백과 경의 차례.
“흐으읍!”
몸을 기울여 어깨로 상대를 들이받는 백.
[백이 산 무너트리기를 사용합니다.] [대상에게 어깨로 공격을 가해 물리 피해를 주며 공격이 성공할 시 대상의 방어력을 소폭 하락시킵니다.]쩌어엉-!
공격이 성공하든, 성공하든 중요치 않은 일격.
이것은 약속된 움직임이다.
불쾌한 3인조로 활동했던 백과 경, 그리고 칭의 연계의 핵심은 그 움직임 자체에 있었다.
하나를 피할 수는 있으나 둘을 피하기엔 어렵고 셋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이 움직임으로 만들어 내는 연쇄적인 붕괴.
능력의 높고 낮음은 중요하지 않다.
동방인들이 추구하는 움직임의 묘다.
백의 어깨를 검면으로 받아낸 페넥스에게 곧바로 경의 추격타가 뒤를 이었다.
[경이 꿩 떨어트리기를 사용합니다.] [공중에서 발차기하여 대상을 타격합니다. 머리에 명중 시 뇌진탕을 유발합니다.]후웅…
파아아아앙-!
백의 공격을 받아냈으니 경의 공격은 피해야 했다. 높은 곳을 노리는 공격이니, 페넥스가 움츠리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 그것은 의도된 것이다.
원래였다면 이어지는 칭의 내려차기로 페넥스의 머리가 부서지며 마무리됐을 연계.
그러나 지금 칭은 이 연계를 이행할 수 없다.
죽었으니까.
그 대신 그 자리를 비집고 오는 건, 흉악한 기운을 흩뿌리는 마난이었다.
“악마여어어어!”
[마난이 역천혈마권을 사용합니다.] [대상을 붕괴하는 정권을 내지릅니다. 정권에 적중한 대상은 매우 치명적인 피해를 받으며 2초 동안 의식 불명에 빠집니다.]콰아아아아-!
마난의 주먹이 움츠린 페넥스에게 쇄도해 왔다.
이 순간, 혈교 무리에게 안 좋은 사실이 2가지 있었다. 한 가지는,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칭이 아닌 마난이 연계의 마무리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후우웁….”
칭이었다면 결코 내어 주지 않았을 편안한 호흡이 페넥스에게 주어졌다.
다른 한 가지는, 파우스트가 그 누구보다 페넥스의 육성을 신경 써왔다는 것이다.
치이이이이…
“여기까지.”
폭발하듯, 페넥스의 검이 뽑혀 나왔다.
[페넥스가 초열륜을 사용합니다.] [전방위에 폭발적인 베기 피해를 줍니다.]후아아아아아앙-!
기괴한 소리가 나며 허공에 주홍빛 원이 페넥스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으….”
“안….”
운 좋게도 백과 경은 공격을 마친 시점이었기에 이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지만 혈영강시들은 그렇지 못했다.
스거엉-!
치이이이이이…
두 동강이 난 두 구의 혈영강시를 뚫고 페넥스가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갔다.
“이러….”
삽시간에 무방비가 된 마난은 공격을 그대로 적중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사정권보다 가까운 곳까지 도달한 페넥스에게 그 공격이 맞을 리 없었다.
이 순간은, 결단코 페넥스에게 의도된 것이다. 아마도 전투를 시작한 그 무렵에.
푸우우우욱…
“꺼어어….”
묵직한 감각.
생명을 끊어냈다는 게 느껴지는 손맛이었다.
이로써…
[페넥스가 파티에 충분한 피해를 주었기에 강제로 패배합니다.] [페넥스가 불길로 되돌아갑니다. 잠시 후에 부활합니다.] [관문의 마력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페넥스가 부활하지 않습니다.] [우두머리 전투가 종료됩니다.]화르르륵…
페넥스가 적들을 반파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형체가 불길처럼 사그라들며 사라진다.
그런데,
“이렇게… 죽을 줄… 알고!”
페넥스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마난이 강제 수혈을 발동합니다.] [미리 계약한 아군에게 피해를 전가합니다.]주륵…
“마난… 님?”
“경, 네 역할에 임하라.”
“그… 런….”
상처 입은 적 없던 경의 가슴에 구멍이 뚫리며 피가 쏟아졌다.
쿠우우웅…
페넥스는 사라지고, 그 자리엔 마난과 백만이 남았다.
“마난 님! 어째서….”
“본 사자가 죽었어야 한다는 말이냐? 이런 곳에서?”
“하지만….”
“네 하찮은 뜻은 거두어라. 모두가 되돌아가는 방법은 이것뿐이니.”
휘오오오오오…
마난의 허리춤에 매달린 3개의 혈청.
그것이 담긴 호리병 3개가 동시에 부서졌다.
콰지이이익…
스스스스…
칭과 현은 물론이고 방금 마난을 대신하여 죽은 경까지 혈영강시로 부활했다.
던전에 진입할 당시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전력. 혈교 무리는 페넥스를 넘어섰음에도 강대한 전력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백, 잘 들어라.”
“…….”
“이곳은 마경이다. 우리는 지옥에 걸어 들어온 것이야.”
“…실로 그러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죽고 싶지 않다면.”
백이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혈청은 모두 소모했지만 비교적 핵심인 전력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던전을 답파하는 혈교 무리. 필사적으로 응전한 혈교의 작은 승리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은 한 사내가 그렸던 미래와 똑같았다.
파우스트가 심처의 턱밑까지 다가온 혈교 무리를 환영으로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생각대로 됐군.”
현재는 과거의 파우스트가 의도한 미래일 뿐.
단지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