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58
제58화
롬웰에게 저간의 일을 담은 서찰을 보낸 지 얼마 후, 롬웰 측으로부터 약속 날짜를 확정받았다.
접선 장소는 리우디라. 롬웰의 은신처는 리우디라에서 거리가 좀 있는 모양이지만, 이번 사건의 주역인 날 위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와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약속된 날짜다.
“미리 와 있는 건가?”
“그렇게 전달받았습니다.”
내 옆에 따라붙은 수하들은 첩보 활동을 맡기고 있는 루비, 빌, 모리다.
어째서 셋이나 되는 악마를 대동하지 않았느냐 하면, 제각기 이유가 있다.
우선 루시퍼는 아직도 힘을 회복하려면 한참이나 남았기 때문에 동행할 이유가 없었고 페넥스는 낯선 환경에 사고를 칠까 우려해서이다.
아몬은 그냥 나오기 싫어했다.
아직 전투 국수 취식기가 완성되지 않았다며 가열차게 연구에 매진하고 계신 터라….
‘던전과 코앞인 리우디라에서 롬웰이 허튼수작을 벌일 가능성도 극히 적고 말이야.’
조촐하다면 조촐한 인원 구성이지만,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다.
끼이이이익…
“여어, 내가 좀 일찍 왔지?”
“알고 있다면 다행이군.”
“…뭐?”
롬웰이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고 벌컥 들이켰다.
“크으으으… 크하하하하!”
스윽…
순식간에 험상궂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롬웰이 이번에 대동한 수하들은 그 머릿수가 열이 넘었고 하나같이 약한 자가 없었다. 그들이 내 말투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긴장들은 내려놓는 게 어떤가 그래? 간만에 쓸모 있는 손님이니 말이야.”
“롬웰 님. 저자….”
“쉬… 쉬… 괜히 입을 열어서 분란만 가중하지 말라고.”
그의 표정이 한순간 사나워졌다.
“허락 없이 말이지.”
“…죄송합니다.”
기세를 잡으려는 속셈인 것 같다만, 뭐든 상관없었다. 난 단지 거래를 하러 온 것뿐이니까.
“못 본 사이에 거물이라도 된 느낌이야.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는걸?”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군.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 말이지.”
“아아, 서찰에 쓴 그거 말이지?”
치이이…
거대한 시가에 불을 붙이는 롬웰.
다소 독한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서찰은 확인했다. 상당히 인상적이더군.”
“어떤 부분이?”
“뭐겠어. 녀석들의 뒷배지. 재밌군. 3인조 뒤에 동방 떨거지들이 있었단 말이지? 큭큭….”
“내가 언급한 것에 대한 건 알아봤나?”
“혈교와 자리엘 말이지? 물론이지.”
혈교와 자리엘 남작과의 유착 관계는 칭의 서찰을 통해 드러났기에, 사실 거의 확신 단계였다.
“역시 간이 콩알만 한 녀석이라 그런지, 빠져나갈 구석은 많이 만들어뒀더군. 그래도 걸리는 게 많은지 아니면 동방 놈들한테 학을 뗐는지 그림할 영지에서는 손을 떼는 모양이야.”
“…잘 된 건가?”
“세력이 없는 네게는 재미없는 소식일 뿐이고, 나한텐 재미 좀 본 소식이지. 덕분에 영업장이 더 넓어졌어.”
“그래?”
“당분간은 그곳들을 관리하는 것만 해도 몇 년은 꼼짝 못 할 정도니까. 인정하지, 네 덕분이다.”
녀석이 시가를 잠시 재떨이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일처리를 이렇게 깔끔하게 했으니 당연히 원하는 게 있을 테지.”
“약속을 지켜라.”
“조사단? 아, 물론이야. 그건 당연한 거고. 안 그래도 일이 거지같이 풀려서 그쪽에도 힘을 더 주고 있는 와중이야.”
“거지같이 풀리다니?”
“최근 이곳뿐만 아니라 제국 전역의 모험가 생환률이 꽤 유의미하게 떨어진 모양이야. 협회는 부인하긴 하는데… 뭐 제국 차원이든 협회 차원이든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고 있거든.”
리우디라에서 실종된 모험가 파티가 최근에 몇 개였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차원문 중계기를 수복한 이후엔, 리우디라에서 오는 대수림 탐사자들은 제거했을 때 오히려 필연적으로 흔적이 남는 골치 아픈 놈들이었으니… 나로서도 학살을 벌이거나 하는 건 무리였다.
‘애초에 지금은 리우디라에 오는 파티가 극히 드물다고.’
마을 자체가 쇠락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절절하게 다가왔다.
‘결국 이 사태가 나 때문은 아니라는 거지. 차원문 중계기에 휘말린 모험가들이라고 하더라도 제국 전체로 보면 그 수가 발톱의 때만큼도 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롬웰과 했던 거래 조건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시류가 바뀐 건 롬웰의 사정일 뿐이니까.
“아무튼 그렇다 하더라도 거래는 지킬 생각이다. 달리 원하는 걸 묻긴 했다만… 최상급 마석이라고 했던가?”
“그래.”
“흐음… 고위 귀족들이나 제국 정도나 취급하는 물건을 뭐에 쓸려고 그러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과해.”
“…과하다고?”
“내 손이 닿지 않는 범위다. 궤짝 하나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지만 그 이상 가면 너무 설치는 꼴이 된다.”
이렇게 될 걸 예상하긴 했다.
베스 교의 경우엔 고위 귀족들이 신도로 포진해 있어 대량의 기부가 이뤄졌기에 가능했던 거지 롬웰이 다루기엔 무리가 따를 테니까.
그래도 나름 건실한 거래를 하기 위해서 애쓰는 이 녀석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에피소드 3막 최종장의 보스가 이 녀석이라는 걸 떠올렸다.
‘난 앞으로 이 녀석과 싸우게 되는 건가?’
아니, 아닐 거라 생각된다.
이 녀석이 갑자기 미쳐서 내게 덤벼들지 않는 이상, 나는 이 녀석과 싸울 이유가 없다.
‘원작에서는 어떻게 흘러갔었지?’
아마도 불쾌한 3인조의 계략과 얽혀 롬웰의 패거리가 썩은 뿌리로 습격해왔었다. 그리고 그땐, 롬웰과 파우스트가 알던 사이도 아니었고 말이지.
원작에서 살짝 뒤틀린 전개의 세계관.
그게 바로 현재다.
‘애초에 이번에 불쾌한 3인조뿐만 아니라 마난까지 상대해야 했던 것처럼 에피소드의 보스는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보다, 최상급 마석을 롬웰에게서 구할 수 없으면 결국 베스 교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다만, 제안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제안?”
“일단 장물부터 처리하지. 여기, 감정에 차질 없게 해라. 계산에 예민하신 손님이 앞에 있으니.”
롬웰의 수하 중 저번에도 봤던 단안경을 쓴 노인이 궤짝 여러 개를 감정하기 시작했다.
“애를 태울 셈인가?”
“천만에, 그게… 소개할 사람이 있는데 아직 안 와서 말이야.”
“…소개?”
미간을 찡그렸다.
사전에 얘기되지 않은 손님은 불청객일 뿐. 거기다 내 정보를 어디까지 흘렸는지에 따라 미래엔 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말했잖나, 최상급 마석. 내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그러면?”
“구할 수 있는 분을 안다.”
갑자기 존칭을?
‘소개할 사람이라는 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자인가?’
덜컥…
“여기, 장물 가치입니다.”
“흠, 열심히도 하셨군.”
툭.
“확인해 봐라.”
“…계산을 상당히 후하게 했군.”
“적은 돈으로 네 환심을 샀다고 생각해. 그보다, 얘기를 계속하지. 소개하려던 분은 인근 귀족들과도 연줄이 있는 분이시다. 자리엘 남작이 그림할의 영지를 포기한 것도 이분의 입김이 어느 정도 들어갔다고 봐야 할 거야.”
설마…
‘베스 교의 아델리아는 아니겠지?’
긁적…
“그분이 널 만나보고 싶어 하시더군.”
“날? 내 얘길 한 거냐?”
“해야 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는 그쪽에도 전달해야 했으니까. 그보다… 너도 요구한 게 있었잖아.”
틀린 말은 아니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왜 날 보고 싶어 하는….”
그때.
끼이이익…
“아하하하하! 내가 좀 늦었나?”
“어, 저기 오시는군.”
롬웰이 벌떡 일어나 머리를 긁적였다.
“좀 늦긴 하셨습니다.”
“오다가 진창에 굴러서 말이지.”
“대체 어쩌다가…?”
“여차저차! 으하핫!”
뒤를 돌아보니, 진흙으로 범벅이 된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에도 진흙을 잔뜩 뒤집어써서 마치 머드팩을 한 것처럼 보였다.
‘…미친놈인가?’
높으신 양반이 저렇게 화끈하게 넘어졌다는 것부터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파우스트 님, 변장입니다.”
새롭게 등장한 남자에 대한 빌의 한 줄 평이다. 당연히 속삭임이었기에 나에게만 들리는.
“이쪽은 레온 님이시다.”
“레온이라고 불러. 늦어서 미안!”
롬웰의 뒷배라….
‘뭐 하는 녀석이지?’
스토리에선 나온 적도 없는 녀석이다.
물론 만약 서버가 종료되지 않았다면 후에 등장했을지도 모르지만.
“최상급 마석이라면 내가 취급하는 물건이긴 해. 그걸 원했다지?”
“…맞아.”
어째 술술 풀리는 것이 상당히 수상하다.
“좋아, 안 그래도 네 활약상을 듣고 나도 널 만나보려 했으니까.”
“어째서?”
“마침 밑에 쓸 만한 녀석이 없었거든.”
아, 이런 타입인가.
“난 누군가의 수하가 될 생각은 없는데.”
“이런! 설명이 부족했나? 거래라고 생각하면 돼. 롬웰과 했던 거래처럼 말이야. 거래했다면서?”
“거래?”
“당황스러운 건 이해할게. 하지만 나도 좀 급해서 말이야.”
레온이 히죽 웃었다.
“난 내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하고 넌 무슨 이유에선지 최상급 마석이 필요하고… 맞지?”
어쩐지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들리는 제안.
“…좋다.”
난 악마랑 친하다.
* * *
어쩐지 폭풍처럼 지나간 롬웰과 레온과의 만남.
특히나 진흙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레온의 첫인상은 좀 충격적이었달까.
하지만 난 녀석이 필요했다.
레온이 아니라면 당분간 다음 가챠를 위한 마석을 충분히 모을 수 없었으니까.
“반갑습니다, 파우스트 님. 레온 님의 시종인 마넷입니다. 인사 올립니다.”
“인사는 되었다. 레온이 내게 전달할 게 있다지?”
– 내 시종이 오늘 널 찾아갈 거야.
“예, 이것을.”
스으윽…
좀 이상하게 생긴 정사면체의 큐브가 빌의 손에 주어졌다.
“이건….”
“유적의 출토품이니 아마도 유물이 분명하겠지요.”
“용건은?”
“이 유물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 아니, 사실 정체에는 관심이 없으시며 유물이 가진 비밀만을 궁금해하십니다.”
“이걸 왜 나에게….”
“비밀을 밝혀내신다면, 궤짝 하나를 가득 채워드리지요.”
“최상급 마석을?”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양하지 않지.”
밝혀내 주마 유물의 비밀!
별로 힘도 안 들이고 10연차를 얻을 수 있다면 나야 땡큐다. 지난번에 쌓아둔 스택도 꽤 있고 말이지.
[첩보 활동 중 조력을 제안받았습니다.] [보상은 최상급 마석 3,000개입니다.]“저는 항상 리우디라에 상주하고 있으니, 언제든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시종 한 명을 아예 마을에 머무르게 하다니 얼마나 여유로운 건지….
‘하긴… 그림할 같은 자식도 사병만 수십 명이었으니.’
유물은 던전에 도착하자마자 아몬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무엇이지?”
“유물이라더군. 용도를 알아봐 달라던데.”
“네게 맡긴 일이잖느냐?”
“내 일이 곧 네 일이기도 하지.”
“치워라. 난 이런 것에 허비할 시간이 없으니.”
“아쉽게 됐군. 그럼, 우리 쪽엔 이런 걸 부탁받을 정도로 유물에 해박한 자원이 없다고 전달하는 수밖에.”
“…뭐라?”
잘도 걸려들었다, 이 녀석.
“그렇잖아? 네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지?”
“…이 몸이 탄생한 후로부터, 미지는 그 빛을 잃었다. 어찌 얄팍한 미지가 나라는 이치에 닿겠느냐?”
“시간이 없다면서?”
“이런 건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거기 앉아 있도록.”
기이잉-
아몬의 주위에 둥둥 떠다니는 작은 손들이 이 주먹만 한 큐브를 해석하기 위해 애썼다.
“흐으음….”
기이이잉…
기이잉…
정말로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큐브를 해석해내는 아몬.
“음… 알았느니라. 근데, 이 물건을 누구에게서 넘겨받았다고?”
“새로 알게 된 거래 상대.”
“…꽤 흥미로운 녀석이다. 조금 어울려줘 볼까?”
“그게 무슨 소리지?”
“이 유물의 기능은 간단하다.”
철컥…
큐브의 한쪽이 열리며 문양이 빛났다.
“이 상태에서 마력을 불어넣으면, 유물에 의도와 질문을 집어넣을 수 있게 된다.”
“의도와… 질문?”
“질문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래서는 재미가 없지. 네게 그 녀석이 이곳에 질문을 집어넣은 의도만을 알려주도록 하마.”
“…녀석이 이곳에 질문을 집어넣은 의도가 뭐지?”
아몬이 씨익 웃었다.
“호기심. 순수한 호기심이다.”
“뭐?”
“재밌구나. 두려움이나 불안이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 뭐, 애초에 너를 무척이나 얕잡아 본 모양일 터.”
“그 말인즉, 나를 자신의 호기심이나 채워줄 용도로 사용했다는 건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악의는 없다는 것도 인지해야겠지. 녀석은 단지 네가 정말로 궁금했던 모양이니까.”
으음…
“어쩌겠느냐? 이건 너에 대한 일종의 시험이다.”
“질문은 어떤 형식이지?”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것뿐.”
즉, 당신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요 혹은 당신이 숨기고 있는 비밀 중 하나를 말해주세요는 안 된다는 얘기.
그렇다면 내게 그렇게까지 위협적인 질문은 없을 것이다.
“악의가 없다면….”
철컥…
큐브의 반대편을 열었다.
“이쪽도 질문이 무엇인지 궁금해지잖아.”
애초에 이것은 나를 믿을 만한 상대인지 시험하는 것이며, 이것에 응하지 않으면 레온과는 여기서 굿바이다.
“눈을 가져다 대라.”
“눈?”
“그래. 딱히 떠올리지 않아도 질문에 답할 것이니.”
기이이잉-
큐브를 눈에 가져다 대자, 큐브 속에 감춰진 무언가가 시야로 쏟아졌다.
후우웅…
마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감각.
“되었다.”
“끝인가?”
“나머진 그자에게 확인해봐라. 앞으로 함께할 자라면, 네 답에 대한 반응이 있을 것이니라.”
* * *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유물과 그에 대한 해설서를 동봉해 리우디라에 있는 마넷에게 전달한 지 또다시 며칠이 지나고….
마넷으로부터 레온이 나를 급하게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의사를 전달받고, 다시금 리우디라로 향했다.
“…레온.”
“훌륭해. 완벽한 해석이야.”
“거래를 빙자해 나에 대한 시험을… 조금 기분이 상하는군.”
“에이… 그랬다면 여기 나오지도 않았을 거잖아?”
빌어먹을 놈.
어떻게 알았지?
이 녀석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무장했듯, 나도 첫 만남부터 괴상했던 이 녀석이 궁금했다.
쿠우웅-!
궤짝 하나를 시종들이 내려놓았다.
“확인해 봐, 최상급 마석이니까.”
철컥…
빌이 궤짝을 건드리자 그 안의 내용물이 드러났다.
[첩보 활동의 보상이 최종적으로 확정됐습니다.] [보상은 최상급 마석 3,000개입니다.]‘정말로 최상급 마석이군.’
인정하기 싫지만, 이 녀석이 정말 한가락 하는 녀석일지도.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묻지 않아?”
“어차피 말할 거잖나?”
“으핫! 맞아!”
레온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지며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쏟아냈다.
“파우스트는… 던전 키퍼지?”
…뭐?
“너, 그 질문이란 게….”
“맞아.”
레온이 싱긋 웃으며 큐브에 담겼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당신은 던전을 소유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