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59
제59화
레온.
이 녀석은 내가 던전의 주인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이 세계에서 던전의 주인이라는 게 곧 마족이라는 것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싶은 사령술사나 연금술사, 그리고 대마법사 역시도 던전을 꾸려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심지어는 망국의 귀족 역시도 비밀 던전에서 힘을 키우는 경우가 있었다.
즉, 아직 레온에게 마족이라는 건 들키지 않은 상황.
‘그게 딱히 좋은 상황이라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순순히 인정하기 싫지만… 유물의 기능이 진짜라는 건 이미 아몬으로부터 확답을 받았다.
대답했으니, 부인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보다 이딴 걸 왜 궁금해하는 거지?’
이 녀석이 롬웰과 비슷한 류의 사람이라면 내가 던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을 몰아세울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자들 또한 뒤가 구린 편이니까.
“내 던전 코어를 노리는 거냐?”
“던전 코어? 아… 나는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 알잖아? 이 유물은 내 질문의 의도까지 증명한다고.”
그래… 이 녀석의 의도는 단지….
“의문. 그저 궁금했을 뿐이야.”
“어떻게 눈치챈 거지?”
“롬웰에게서 정보를 들었으니까. 리우디라 인근 모험가들의 계속되는 실종… 때가 되면 녀석들의 장물을 들고 나타나는 자. 굉장히 수상하잖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는 게 더 잘못됐다고.”
“산채의 두령이라면?”
“성립하지 않아. 대수림은 대규모 산채가 자리를 잡기엔 최악의 장소야. 주변에 약탈할 대상도 없고 대수림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평범한 산적일 수가 없거든. 애초에 그런 실력을 가졌다면 산적 말고 다른 일을 했겠지?”
녀석의 말대로 추론은 가능했지만… 이 일에 무려 최상급 마석 한 궤짝을 태우는 녀석이 있을 줄이야.
‘이 녀석… 맹탕이 아니었어.’
이제 보니 헤실헤실 웃는 저 면상도 좀 짜증이 났다.
“좋잖아? 서로 솔직해지자고. 난 네 던전을 뺐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오히려 서로가 공유하는 비밀이 하나 늘어서 기쁜걸.”
지나치리만큼 나와 가까워지길 원하는 레온. 저의를 짐작할 수 없으니 경계심을 누그러트리기도 어려웠다.
“내게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이유가 뭐지? 오히려 내 경계심만 부추긴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것 때문에 망설였지만… 망설이다간 영원히 맴돌기만 한다는 것도 모르지 않거든, 하하하하!”
정신이 어딘가 이상한 녀석.
마치 이 대화가 놈의 구애처럼 들렸다.
“난 널 원해. 내가 갖고 싶은 건 무조건 가져야 직성이 풀린다고 얘기했던가?”
“어른이라면 떼쓰는 게 자랑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 텐데.”
“하하하! 그것도 그렇네?”
이 녀석과 나는 오늘로써 2번 보았을 뿐이다.
“난 처음부터 숨김없이 말했어. 내 신용을 받을 만한 자가 필요할 뿐이야.”
“그게 나라는 거냐?”
“응.”
“…….”
이 근거 없는 확신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건지….
이제는 정말로 단순히 녀석이 나를 좋아할 뿐일지도 모르겠다고 느껴졌다.
“너도 결국 최상급 마석이 필요하잖아?”
“…….”
“네가 원하는 만큼의 최상급 마석을 문제없이 융통해줄 수 있는 건 이 근방에서 내가 유일할걸?”
…맞는 말이지.
“끌려가는 느낌이군.”
“하하! 그래? 그러면… 음, 이건 어때?”
녀석이 제안했다.
“한 가지 일을 더 맡기지. 이 일로 우리는 더 가까워질 거야.”
“…확신하는 거냐?”
“그럼! 확신하고말고!”
별 해괴한 녀석이 다 있네….
가만? 이렇게 의심스러운 척하면 계속해서 쉬운 일만 굴러들어 오는 거 아니야?
‘그러면 좋겠다만….’
스윽…
녀석이 손가락 2개를 폈다.
“이번 일을 마치면 최상급 마석 궤짝 2개 분량을 넘기지.”
“뭘 하면 되지?”
한다 안 한다의 문제가 아니다.
무조건 한다.
“간단해, 네가 직접 키레네로 가서 내가 원하는 걸 찾아오면 돼.”
“직접?”
“맞아, 직접.”
이상한 조건이다.
직접 해야만 하는 일이라니.
‘뭐 그렇다고 해서 어렵거나 한 일은 아니지만.’
최근 영혼을 잔뜩 흡수한 던전 코어는, 내가 던전에서 키레네까지 왕복하는 데에 무리가 없게 했다.
“그것뿐? 혹시 찾기 어렵거나 시간이 필요한 물건인가?”
“전혀! 친절하게 위치까지 적어줄 테니 마음 편하게 다녀오면 돼. 단지….”
녀석이 말끝을 흐렸다가 이어서 말했다.
“조금 서두르는 편이 좋을 거야.”
“급한 일인가?”
싱긋…
“급하냐고? 음… 글쎄, 그럴지도. …내가 아닌 누군가에겐 말이지.”
* * *
다그닥-
푸르르…
마차의 덜컹거림과 투레질 소리가 잠에서 기분 좋게 깨어나게 했다.
“키레네에 거의 다 와 갑니다, 파우스트 님.”
“…알겠다.”
슬며시 떠지는 눈.
마차에 드리운 볕이 너무도 따스해서 그대로 다시 잠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여유롭다 못해 하품이 나오는군.’
때이른 혈교 무리의 습격을 막아낸 이후엔, 사실 한동안 던전에 찾아올 위협은 없었다.
에피소드 5막인 모험가 협회 조사단 파견 역시도, 롬웰과의 합작으로 당장엔 뒤로 미뤘다고 판단된다.
‘그럼 대체, 이제 에피소드 3막엔 뭐가 오는 거지?’
원래 3막의 보스였던 롬웰도 아니요, 조사단의 파견도 멀어졌다면 혹시….
‘에피소드 4막의 보스인 그 녀석인가?’
길 잃은 암흑 상인 멤피르.
이 녀석은 공략 루트가 두 개로 나뉘는데, 하나는 그냥 때려잡는 게 첫 번째 루트.
이 경우엔 멤피르가 가진 상품들로 무장해 어마어마한 난이도를 자랑한다. 기본 스펙 역시도 뒤에 나올 다른 에피소드의 보스보다 오히려 강할 정도니… 그와 싸우는 건 사실상 정공법이 아니다.
다른 루트는, 소지금으로 멤피르의 상품 중 하나 이상을 사야만 한다. 물건을 하나만 사도 군말 없이 돌아가고 던전에 대한 소문도 내지 않는, 상인으로서의 직업윤리가 뛰어난 녀석이다.
‘그 녀석이 찾아오려나?’
– 뭐든 말해봐, 난 네가 원하는 걸 파니까.
기억하기로 이게 멤피르의 시그니처 대사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멤피르는 에피소드 보스 중 다소 특이한 녀석이었던 게 맞는 것 같다.
이 녀석이 찾아오더라도 역시 문제는 없다. 롬웰과의 거래로 소지금 자체는 빵빵한 상황이니까.
‘그렇다면 대체… 다음 에피소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바로 저깁니다, 키레네의 성문이.”
도시 키레네를 처음 본 느낌은, 투박하고 소탈하다 정도. 단지, 어마어마한 크기의 건물이 도시 밖에서도 보여 그 건물에만 눈이 갔다.
키레네에 진입하는 것은 크게 무리가 없었다. 일행 중에 빌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이런 도시의 경계 정도는 우습게 통과하는 게 가능했다.
현재 이 도시에 함께 와 있는 일행은 첩보 활동을 도맡아 하고 있는 루비, 빌, 모리다.
“그럼, 마차를 정비하고 있겠습니다. 루비?”
“응, 대장! 내가 옆에 착! 달라붙어 있을게.”
“괜히 문제 생길 일 없었으면 합니다.”
“물론!”
전투복이 아닌 일상복을 입은 루비와 모리는, 마치 귀족을 옆에서 챙기는 고급 하인들처럼 보였다.
“저곳인가?”
“히-야! 한눈에 봐도 되게 크네! 저게 도서관이라는 거지?”
키레네의 중앙 도서관은 도시의 상징이자 기이한 역사를 지녔다.
이 도시는 세워질 때 그 터에서 유적이 함께 발굴되었다. 건축을 도맡았던 귀족은 유적을 함부로 허물지 않고 그 안에서 돈 될 만한 것들은 싸그리 챙기고 역사적인 가치는 높지만 환전할 수는 없는 출토품은 도시에 기부했다.
뭐, 엄청나게 해먹은 게 양심에 찔려서인지 도서관의 건축 비용은 그자가 다 내었다고 한다.
원래는 박물관을 지으려고 했는데, 출토품 중 상당수가 고서적이었고 그 양이 끝도 없었기에 도서관으로 지었다는 역사다.
“처음 오신 건가요?”
도서관의 입구부터 따라붙는 사서.
이 도서관을 유지하는 데에만 엄청난 수의 사서들이 투입되었다.
빌이 먼저 나서 답했다.
“그렇습니다.”
“신분증을.”
나와 모리, 그리고 루비의 조작된 신분증명서를 내밀자 사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했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찾으시는 본 도서관의 장서가 있으신가요?”
원하는 질문이 나오자, 자연스럽게 내 몸이 앞으로 나왔다.
스윽…
“이것을.”
어느 구획에 어느 열, 몇 번째 칸에 있는 장서인지 적힌 양피지. 레온이 건네준 물건이다.
아무래도 그 녀석이 찾길 원하는 물건은 키레네 중앙 도서관의 서책인 듯싶었다.
“잠시만 이쪽에서 대기해 주시길, 장서의 정보를 확인한 후 안내해 드릴게요.”
끄덕…
사서가 저 멀리 사라지고 나서, 루비가 주변을 보며 감탄했다.
“히야… 이게 다 책이란 말이지?”
“…놀라운가?”
“놀라워! 종이의 바다에 와 있는 것 같은걸.”
그 말은 묘한 울림이 있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스윽…
근처 책장에 있는 책을 제목도 보지 않고 집어 들었다. 대충 내용을 훑어보니 현재 솔라리아에서 약진하고 있는 소국의 왕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별달리 집중할 내용도 아니었건만, 엄청난 흡입력으로 몇 페이지나 넘기게 했다.
탁.
책을 덮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 세계의 겉모습만을 알고 있다.
원작의 에피소드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72 악마 각자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전부 솔라리아의 주민이라면 알지 못해도 상관없는 것들이다.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말이다.
반면, 나는 오직 그런 정보들만을 중점적으로 기억해 두었다. 아직 이들의 삶에 진정으로 녹아들지 못했다고 봐야 할지….
이 도서관의 방대한 장서들을 펼치면, 그 안에 모두 빼곡하게 내용이 차 있을까? 아니면 허술했던 원작처럼 빈 페이지로 가득할까.
이제는 전자였으면 한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괜찮다.”
내 자연스러운 하대에 사서가 잠시 나를 올려다봤지만, 이내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볼이 발그레해진 게 아무래도 쑥스러움이 많은 모양이다.
“확인해 본 바, 문제가 조금 있는 장서였어요.”
“문제?”
“저자가 불분명하며 그 내용의 분류가 대기 중인 책이거든요.”
“흐음….”
“분류는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고….”
“대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지?”
“확답은 못 드려요. 아마… 3년 이상은 걸릴 듯해요. 이것도 꽤 빠른 편이에요.”
“혹시, 그 책을 읽어볼 수 있겠나?”
“그게….”
사서를 지그시 바라보며 압박했다.
군주의 위엄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렇다고, 진짜 위압감을 발휘했다간… 문제가 생기겠지.’
꾸욱…
“원래는 안 되지만, 반출하지만 않으신다면….”
“고맙군.”
“이쪽으로요.”
사서가 얼굴에 부채질하며 오종종 앞서가자, 루비가 나를 힐끔거렸다.
“악랄하단 말이지.”
모리가 옆에서 큭큭 하며 웃었다.
“배워둬야겠군요. 쓸 만한 방법입니다.”
“…다들 시끄럽구나. 이곳이 도서관이라는 걸 잊었나.”
키레네 도서관 깊은 곳.
아직 흙먼지도 채 털어내지 않은 듯한 장서들이 잔뜩 쌓여 있는 장소다. 아마도 미분류된 책들이 이곳에 있겠지.
“여기, 이 책이네요.”
뭔가의 가죽으로 짜였는지 알 수 없는 표지. 상당히 얇은 내용물이 만져졌다.
“그럼, 편하게 읽으세요. 전 이만….”
사서가 물러나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가져갈까 하는.
“그냥 가져가도 됩니다.”
“책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채면…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양이군.”
“예, 미분류된 책만 해도 그 양이 족히 호수를 메울 겁니다.”
도난 방지 마법이 걸려있지도 않다.
분류가 완료되지 않는 책에 그런 비싼 마법을 걸어두기엔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이미 내가 이 방으로 안내된 순간부터, 도난을 당해도 도서관 측은 할 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넓은 장소에 사서가 많으면, 이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덕분에 마석 궤짝 2개를 쉽게 손에 넣었군.”
“바로 움직이시겠습니까?”
“잠시만….”
대체 이 책이 뭐길래, 레온이 급하게 원한 걸까?
특별한 잠금도, 특별한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는 얘기는….
“뭔가 특별한 내용이 수록된….”
– 대격변 시기에 버려진 던전들에 대하여….
‘던전에 관한 내용인가?’
살펴보니 그렇게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다. 저자가 마족이라는 점 외에 달리 기억할 만한 내용도 아니었고.
내용은 이러했다.
필자는 아주 오래전 인물로 버려진 던전을 기록하는 떠돌이였는데, 버려졌던 던전을 굳이 찾아가 이 던전이 왜 유실되었던 것인지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읽다 보니 또 술술 읽혀서 계속해서 책장을 넘겼다.
사락…
사락…
그러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손이 멈추게 되었다.
– 던전, 썩은 뿌리에 대하여.
‘…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로 글자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알고 있던 부분과 모르고 있던 부분이 혼재된 내용. 그리고… 아예 몰랐던 내용까지.
– 썩은 뿌리는 이제, 안타깝게도 던전으로 기능할 수 없다. 매년 가을이 절정에 다다르면 썩은 뿌리의 숙주가 깨어난다. 이 과정에서 던전??붕괴하는 동시에 재구축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반 시설이 파괴되며….
“…뭐?”
레온이 마지막으로 내게 남겼던 말이 이 순간 뇌리에 꽂혔다.
– 급하냐고? 음… 글쎄, 그럴지도. …내가 아닌 누군가에겐 말이지.
어쩌면, 새로운 에피소드 3막은 이미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던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