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60
제60화
‘이게 바뀐 에피소드 3막이었다고?’
놓쳐버린 3막의 종적을 이런 곳에서 발견할 줄이야.
‘아니… 확신하기엔 일러. 특히 이 책의 내용.’
미분류 기록물이라는 딱지 하나 달랑 붙어있는 이 책이 내 불길한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는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좀 억울했다.
하지만….
대개 절체절명의 위기는 당사자가 위기의 전개를 못 본 척하고 넘어갈 때 찾아오는 법. 절대 허투루 치부할 사안이 아니다.
“모두 내려가 있지.”
“파우스트 님께서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루비.”
“어? 어… 으응.”
루비와 모리가 날 홀로 남겨두고 자리를 피했다.
‘자, 처음부터 짚어보자.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를.’
분명 이야기의 흐름은 조금 다를지라도 1막 최종장 보스인 칼 쿠르소와 2막 최종장 보스인 불쾌한 3인조를 만났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 …매년 가을이 절정에 다다르면 썩은 뿌리의 숙주가 깨어난다.
“가을… 가을이라….”
원작 게임에서의 가을이 어땠더라?
기억이 흐릿했다. 가을 분위기를 좀처럼 느낄 수 없었다고 해야 하나.
왜 썩은 뿌리의 가을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라고 한다면.
“…이런.”
원작에서 가을을 보낸 곳은, 썩은 뿌리가 아닌 다른 장소였기 때문.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잘못 계산한 건가?’
이건… 원작의 시간대대로 흘러갈 거라 계산한 게 크나큰 패착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원작의 에피소드 1막에서 5막까지 이어지는 일은 파우스트가 썩은 뿌리에 자리 잡은 상황에서 그해의 가을을 맞이하기도 전에 전부 일어났던 일이다.
말하자면, 원작에서는 고작해야 반년 동안에 에피소드 5막까지 초스피드로 달렸는데, 내가 지금 들어와 있는 세계에서는 고작해야 이제 2막이 끝났다는 것. 그 결과, 원작에서는 가을이 되기 전 5막인 모험가 협회 조사단이 파견되어 파우스트가 썩은 뿌리에서 쫓겨났기에 내가 그곳에서 가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을 턱이 없다.
‘이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절망적이다.’
대처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 게 아니다. 냉철한 이성을 유지한 채로 해야 할 것들이 잔뜩 떠오르기에 오히려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해서 한숨부터 나오는 상황이지.
그리고, 이 밖에도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 역시 존재했다.
‘레온은 왜 내게 이 책을 가져와 달라 말했을까?’
조롱의 의미?
혹은 날 돕기 위해?
처음 만난 나를? 어째서?
아니… 그보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난 녀석에게 썩은 뿌리에 머문다고 말한 적 없다.’
레온에게 답했던 건 어디까지나 던전 키퍼라는 사실뿐. 썩은 뿌리에 대해선 일절 말한 적이 없다.
어쩌면 녀석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나?’
대체 언제부터?
그렇다면 적인가?
‘적이었다면 내게 이런 정보를 줄 리 없잖아?’
그렇다면 아군?
그것도 이상했다.
원작에서 등장한 적도 없는 녀석이 갑자기 아군으로 등장할 리가 없을 테니까.
더군다나 아군치고는 너무 수상하다.
달리 내게 경고할 생각이었다면, 다른 방법도 무수히 많았다.
애초에 내가 썩은 뿌리에서 자리를 비우지 않게 하는 방법 말이다. 녀석은 내게 이곳 키레네까지 직접 향하길 바랐고 만일 녀석이 썩은 뿌리에서 조만간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이는 명백히 아군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모르겠군. 모르겠어….’
혼란스러운 상황에 던져넣은 게 혼란스러운 인물이니 머릿속이 명쾌해지는 게 말이 될 리가.
저벅…
저벅…
책을 챙겨 사서의 눈을 피해 키레네 중앙 도서관에서 빠져나왔다.
아래층의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리와 루비. 그리고 빌도 어느새 합류해 있었다.
“모리, 네가 협회에 가 봐야 할 일이 생겼다.”
“협회라면… 어떤 협회를… 설마 모험가 협회를 말씀하시는….”
“그래.”
“…제가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시지요.”
모리는 의태 능력을 활용해 던전에서 사망한 모험가 중 몇몇을 위조 신분으로 활용했다. 이들의 신분 증명서 또한 멀쩡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도의 큰 도시가 아니라면 그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나는 그에게 썩은 뿌리, 혹은 리우디라 인근 대수림에 혹시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알아봐 달라 말했다. 확인하는 즉시 최대한 빨리 합류하라고도.
내 이런 지시에 당혹스러워 하는 일행.
“…문제가 생겼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내 비밀을 전부 다 말할 순 없었으니 이들이 이해하는 데 필요한 딱 그 정도 수준의 정보만을.
“지금부터 최대한 빨리, 던전으로 귀환해야 한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썩은 뿌리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이할 테니.”
“그런….”
빌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답했다.
“마차는 헐값에 넘겨야겠군요. 당장 인원수대로 말을 구해오겠습니다.”
* * *
기이잉-
기이이잉-
“몸이 왜 이렇게 찌뿌둥한 것이지?”
아몬의 작은 일손들이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을 주무르고 있었다. 아몬이 만든 기계 손들은 그 움직임이 마치 인간의 손처럼 자유롭고 섬세하기에 안락함을 제공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되었다. 그만두거라. 아무래도 육신의 피로가 아닌 듯하니.”
아몬이 언짢은 듯이 손짓하자, 일손들이 일제히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대체 이 불쾌함은 무엇이지?”
하아암…
아몬은 오랜만에 연구소를 벗어나 던전을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스읍…
지하에 조성된 거대한 숲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그 빼곡함을 자랑했고 맑은 공기를 배출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환경.
‘이 몸의 취향은 아니다만….’
아몬이 심드렁한 채로 토성이 있는 곳을 피해 숲의 외진 곳에 있는 동굴로 나아갔다.
동굴은 얼마 안 가 곧바로 새로운 장소로 이어져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임시로 마련된 숲 필드의 히든 보스 ‘아리엘’의 거처다.
흑요정 여왕인 그녀는 쟈킴에게 필드의 주도권을 내어주고 이곳에 머무르며 그녀만의 정원을 가꿨다.
“그곳이 아니에요, 모암.”
– 구우우우?
유적 수호자 모암이 머리를 긁적였다.
모암은 평소엔 숲 필드가 아닌 다른 필드에 머물렀는데 대개 필드에 배치되지 못한 사역마들이 그러했다.
그들에겐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환경만이 주어진다. 던전의 자원은 유한하며, 전투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던전 운영의 기초이기 때문에.
사역마들은 이 간단한 이치를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고, 이 때문에 필드에 투입되는 것을 바라는 사역마가 대부분이다. 만약 아리엘이 호전적인 성향의 우두머리였다면, 쟈킴과 그녀 사이에 지독한 신경전이 펼쳐졌을 것이다.
“이쪽의 바위에요.”
– 구우우우!
“모암이 와줘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저 혼자선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 구… 구우우우!
쑥스러워하는 모암.
“한창 바쁠 때 온 모양이군.”
“그렇지 않아요, 아몬 님.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죠.”
“…고맙구나.”
아몬은 아리엘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는 점잖고 교양 있었으며 예절을 알았다.
아몬이 지옥에서 평소에 얼마나 괴팍한 녀석들을 상대해 왔는지를 안다면 그녀를 이해할 것이다.
자잘한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아몬은, 본론을 꺼냈다.
“오늘, 이상한 느낌이 들더구나.”
“이상한 느낌이라면….”
“불길한 예감이다.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이것 덕분에 피해 갈 때도 있어서 말이지.”
“그렇다면 꽤 중요한 일일 수도요. 다만, 전 아몬 님께 보탬이 되지 않겠어요. 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걸요?”
“역시 그런가? 그렇다면 그대가 맞을지도.”
“파우스트 님이 자리를 비우셨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 녀석 때문이라고? …농담도.”
이야기를 끝낸 아몬은 이곳에서 더는 얻어낼 것이 없을 거라 판단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떠나시는 건가요?”
“연구소가 아니고선 한 자리에 오래 못 있는 성격이라서.”
그녀는 숲을 지나서 용암 동굴에 다다랐다. 도착한 것은 던전 썩은 뿌리의 2번째 필드.
– 키히히히히히!
변함없이 활기찬 산토를 지나쳐 페넥스를 찾으려 한 그녀는…
“…자리를 비웠나?”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더 커지는 듯했다.
방금 숲 필드를 훑어보았으니 페넥스, 그녀가 갈 곳이라곤 심처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부산 떨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연구소를 지나쳤다. 그리고 심처의 문을 열었다.
쿠궁-
끼이이이이익-
심처에는 단 두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페넥스와, 루시퍼다.
두 여성은 모두 악마.
그리고 마침 심처에 들어선 아몬 역시 악마다.
던전 내의 모든 악마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한자리에 모였다. 오직 악마들만이 무언가를 감지한 것처럼.
“설마….”
“아몬도 뭔가를 느낀 겁니까?”
“불길해! 엄청나게 불길한 기운이….”
따악-!
“알겠군. 신체의 이상이 아니었어. 괴상하게도 주변의 마력이 흩어지고 있다.”
루시퍼가 고개를 저었다.
“다릅니다.”
“달라?”
“마력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무언가에게.”
“아… 그 말이 정말로, 정확하구나.”
셋이 동시에 천장을 바라보았다.
으직…
천장에 실금이 한 줄.
으지지지직…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균열.
“…던전이 무너지고 있느니라.”
루시퍼가 다급히 소리쳤다.
“페넥스! 코어를…!”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콰지지지지직!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던전이 내려앉으며 그 터를 중심으로 시커먼 뿌리가 지반을 파고들었다.
그 틈으로 비추는 거대한 형체는, 대수림의 나무들보다도 몇천 년은 더 살아온 듯한 거대목 형태의 마물이었다.
– 끄아아아아아아악!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 * *
쾅쾅쾅-!
“누굽니까?”
“스승님, 접니다!”
“버릇없는 새끼, 스승님 집 대문을 박살 내려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냐? 또 조사단은 어쩌고? 오늘 출발하는 것 아니었나?”
“그게… 일단 문을 좀.”
끼이이이익…
문을 열어준 장년이 조금 앳된 얼굴의 사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파견은 어쩌고 아직도 도시에 남아 있어?”
“지금 파견이 중요한 게 아니걸랑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듣고 있잖아.”
“아이이잇! 그러니까… 나타났어요!”
“……?”
젊은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
“대수림의 그 녀석 말이에요! 쓰러지지 않는 우레아요!”
“토벌령이 내려졌나?”
“오늘 아침에요! 지금 조사단 파견도 뒤로 미뤄지고 당장 리우디라로 향하라는 지시가 있었어요.”
“흐음….”
스승이 말했다.
“닐, 이번에 토벌령에 응한 녀석이 몇이나 있지?”
“수십… 아니, 백은 넘을걸요? 그뿐 아니라 다행히 근방에 실력자들이 좀 있었나 봐요.”
“그래?”
“쌍살도(雙殺刀) 이문은 물론이고 야광화 파티도 합류한다고 들었어요.”
“그럼 그 녀석들이면 충분하겠군.”
“엥? 장난하세요? 당연히 스승님도 가야죠!”
“내가 왜?”
“아니 무슨 말을… 하….”
닐이란 사내가 이마를 짚었다.
“그야 작년에 우레아를 벤 게 다름 아닌 스승님이니 이번에도 힘을 보태야죠!”
“모험가가 그렇게 정의롭게 움직이는 거 봤어?”
“협회 쪽에서 내건 보상을 읊어드릴까요?”
“해봐.”
닐이 그의 스승에게 서류에 적힌 내용을 달달 읊어주었다.
“…짭짤한데?”
“거봐요! 이럴 때 외눈박이 늑대 스칼라가 뒷짐 지고 있는 게 말이 되겠어요?”
“거… 그렇게 부르는 거 관두지 않을래?”
“안 가시면 평생 그렇게 부를 거예요. 외눈박….”
“알았다, 갈게.”
“…간다고요? 히히… 협회에 그렇게 전달해 둘게요! 스승님이 가신다고!”
“하아….”
쿵-!
문을 세게 닫고 사라지는 제자 닐. 그의 스승인 외눈박이 늑대 스칼라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가을이 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