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79
제79화
후두둑…
환영 속에 나뒹구는 얼음 조각들은 방금의 전투가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만족스럽군.’
서리의 악마 이포스의 전투력은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이포스의 전투 기믹 중 한 가지인 소녀의 온기는 적들의 수가 많을수록 그에 맞춰 양이 증가한다.
때문에 많은 적에게 둘러싸일 확률이 있는 첩보 활동이나 차후에 업데이트 될 새로운 모드에서 그 효용이 높았다.
‘다대일의 전투에서는 등급표의 최상단에 위치한 악마 중 하나였지.’
서리의 드루이드는 그 자체로도 막강했지만, 전용 무기인 거울까지 장착한다면 거의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다.
에피소드가 꽤 진행되어 동상 기믹을 스스로 파훼할 수 있는 적 혹은 이포스를 어마어마한 파괴력으로 일격에 때려눕힐 적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이포스의 가장 큰 특징은 스킬이 많다는 점이다.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많아 모든 악마 중 가장 많았다.
‘스킬셋도 가장 먼저 개편되었던 악마이기도 했고.’
원작이 한창 겨울 축제 이벤트를 진행했을 당시, 유저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이 바로 스킬 파워 밸런스였다.
이포스가 이딴 식으로 초등학생이 수업 중에 공책에 써 갈긴 것마냥 스킬이 많고 강하면, 그동안 마석을 퍼부어서 뽑은 기존의 악마들은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말이었다.
과금 유도를 위해 지나친 밸런스 파괴라는 말이 주요 여론이었다.
‘기우였지만 말이지.’
정확히 설명하자면, 기우에 불과했다. 제작사는 레메게톤의 모든 악마가 모험가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절망감을 선사했으면 한다고 말했으며 향후 출시될 악마들이 기본적으로 이런 기조를 가진 기본 스킬셋을 갖게 될 거라 말했다.
‘즉, 레이드 보스처럼 기믹이 첨가된 스킬셋 말이지. 모험가 입장에서도 공략할 수는 있으나 까다롭고 힘겨운 느낌.’
그렇다고 기존에 출시된 악마들을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지나치게 간단한 스킬셋을 가졌던 초창기 악마들의 채용률이 떨어지고 그들이 함정 픽이라는 여론이 형성되자 스킬셋 개편을 진행해줬다.
상당히 유저를 위해 이것저것 신경 써주는 모양새긴 했다만, 사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었다.
‘유저가 이때쯤 대거 떨어져 나갔었지.’
밸런스 패치 겸 스킬셋 개편이 대체 언제쯤 진행될 줄 알고 믿고 기다린단 말인가?
진즉에 모바일 게임의 유동층은 대거 탈락해 다른 모바일 게임으로 거처를 옮기기 시작했었다. 부랴부랴 준비한 패치는 그 후에 빠르게 이뤄졌지만 이미 떠난 민심은 회복되지 않은 채 흉터처럼 새겨졌고.
‘후… 이렇게 보니 이 게임이 왜 망했는지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망할 만했던 것 같긴 하네.’
당장 페넥스는 【불굴】이라는 괴상한 개성을 달고 나와 성질을 돋우는데 이포스는 【교감】이라는 개성으로 즉시 활약이 가능했다.
‘성질이 날 만하지!’
내가 첫 악마로 페넥스를 뽑았기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다. 나도 이제 엄연히 이포스 보유자다.
이런 이포스도 상대적으로 약점으로 취급받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일대일 상황에서는 다른 악마들과 비교했을 때 취약한 편이라는 것.
그래서 이포스는 첩보 활동에 나설 때나 일대일로 모험가를 상대해야 할 땐 스킬셋 대부분을 다른 스킬로 교체해야만 했다.
‘그 어떤 악마도 만능은 아니라는 거지, 결국.’
아니, 예외는 있다.
아몬과 같은 대악마들 말이다.
그들은 약점이 없는 존재들이니까.
“이럴… 수가… 이게 악마의….”
최후의 청색 마녀 에니스가 덜덜 떨며 그녀의 곁에 있는 페넥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히죽-
페넥스가 개구쟁이 같은 미소로 그녀에게 화답했다. 머리에 달린 커다란 뿔이, 이제야 에니스의 눈에 들어온 듯했다.
“뿔… 여기도!”
루시퍼의 뿔까지 확인하고는 머리를 감싸 쥐는 그녀.
“악마라니… 내가 악마에게 붙잡혀왔다니.”
뭔가 이상했다.
그녀가 굉장히 곤란한 상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나, 날 어쩔 셈이야!”
“내가 널 어떻게 할 거라 생각하지?”
아, 잠깐.
말이 좀 그렇나?
“나… 난 산 제물로 쓰기엔….”
“그럴 일 없다.”
“서, 설마 너… 봉인을 노리는 거구나!”
봉인된 빙하의 주술사 에켈라르트를 말하는 것이다.
“봉인?”
짐짓 모르는 척하자, 에니스가 의심을 품었다.
“역시, 봉인인가….”
“봉인이 무엇인지도 모르거니와, 관심도 없다.”
“…뭐? 그럼 뭐야? 뭘 노리고 마녀의 땅에 악마를 거느린 마족이 자리 잡은 거냐고!”
“뭘 노려야지만 자리를 잡을 수 있던 거였나?”
“그야…… 그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없는 이 땅에 굳이 찾아왔다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머무는 것이다. 대답이 됐나?”
“…못 믿겠어.”
루시퍼가 이마를 짚고는 한숨 쉬었다.
“하아… 이 우매한 인간에게는 계몽이 필요해 보입니다. 굳이 파우스트 님께서 불필요한 대화를 나눌 필요 없이,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루시퍼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는 마치 고용인을 타박하는 집사처럼 조근조근 훈계했다.
“인간. 파우스트 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구원해준 것으로도 모자라 그대를 쫓는 추격자까지도 섬멸해주었습니다.”
“그건….”
“당신은 크나큰 빚을 졌습니다. 파우스트 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당신의 육신이든 운명이든 거부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뭐, 뭣! 유, 육체라니!”
“아, 실례.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 해부라든지, 도축이라든지….”
실시간으로 에니스의 안색이 죽어갔기에 말을 멈췄다.
“그쪽은 더 아니다, 루시퍼.”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의미를….”
“아니, 애초에 그 여자의 육체가 필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아?”
끄덕…
루시퍼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뒤로 물러났다.
“에니스라고 했던가?”
“그래… 마족이 젊고 싱싱한 인간을 놓아줄 리 없지. 하지만, 나까지 이렇게 죽어버리면….”
“에니스, 맞나?”
“어… 으응. 에니스.”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저간의 사정은 차치해두고, 본론을 말하지. 네 도움이 필요하다.”
“내 도움?”
“정확히는 보답이겠군. 널 구해주고 추격자들의 목숨을 대신 끊어준 것에 대한 보답.”
“마, 말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라.”
“…….”
“마족의 던전에 들어와 놓고 아무렇지 않게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낯짝이 그 정도로 두껍진 않을 거라 기대한다. 기대에 어긋나는 인간을 보는 건 굉장히 고역일 것 같으니 말이야.”
에니스가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너도 정체를 숨긴 악마야? 아니… 악마에…요?”
“말은 편하게 해도 좋다. 난 마족이다. 악마는 아니지만, 이 던전은 악마의 것이나 다름없지.”
“그렇구나….”
내가 굳이 나와 관련된 위험한 정보를 이렇게 오픈하는 건, 원작에서 에니스가 파우스트의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호의를 건네 보스를 조력자로 만든 경험도 있는데 원래 있던 아군은 당연히 아군으로 만들 수 있지.’
뭐 그사이에 천지가 개벽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땅에 자리를 잡고 아무런 관련도 없는 마녀의 이야기를 왜 궁금해하는 거야?”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뭐?”
“말 그대로다. 난 당분간 이 땅에 자리 잡길 원하고 넌 내게 위협이 될 만한 자들과 상황을 알고 있지.”
“그 말은… 만약 목표가 겹친다면….”
“함께 걸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청색 마녀 에니스가 고민하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켈라르트에 대해 알아?”
“빙하의 에켈라르트를 말하는 건가?”
“맞아. 오래전 이 땅에 머물던 전설적인 주술사… 세 마녀단이 힘을 합쳐 봉인했었지.”
“그래서?”
여기까지는 아는 얘기다.
“최근에… 마녀 사냥꾼들과의 소모전이 극심해지다가 결국… 봉인에 문제가 생겼어.”
“…뭐?”
…이런 스토리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봉인에… 금이 간 거야. 청색 마녀들은 봉인을 수호하는 것을 최우선이라 주장했는데, 다른 마녀단들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야.”
“봉인을 풀 생각이었나 보군. 어째서지? 에켈라르트를 푼다고 어떤 이득이 있다고….”
“자색 마녀단은 그를 봉인한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했어. 자색 마녀단의 특기가 뭔지 알아?”
“…세뇌? 매료?”
“맞아. 그들은 에켈라르트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네가 보기엔 어때?”
“미친 거지! 에켈라르트가 그렇게 쉽게 지배당할 멍청이였으면 당시에 뭐 하러 세 마녀단이 힘을 합했겠어!”
“흐음….”
에니스가 추가적인 설명을 했다.
“에켈라르트의 봉인에 관한 마지막 회합 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에, 청색 마녀단은 기습을 당했어.”
“다른 마녀단이로군.”
“…맞아.”
뭐, 사소한 부분들이 다르긴 했지만, 원작의 스토리는 그대로 따라가는 듯했다.
“저항도 못 한 건가?”
“눈치채지 못한 결계에 당했어.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거든.”
“그래서 전멸인가… 충격적이긴 하다만, 넌 어떻게 혼자 살아남은 거지?”
“대모께서 희생하셔서 길을 뚫어주셨어. 난 꼭 살아야 한다고….”
“어째서?”
에니스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마지막 열쇠지기니까.”
“…뭐?”
“에켈라르트의 봉인은 3개의 열쇠가 있어야지만 풀려. 모든 마녀단이 각기 하나의 열쇠를 지니고 있는데….”
“청색 마녀는 너 하나 남았으니 네가 열쇠지기겠군.”
이제야 알았다.
마녀단의 추격이 한 번에 그치지 않은 이유를.
“내가 널 마녀단에 넘기면, 어떤 보상을 받을까?”
“…뭐?”
“널 맹목적으로 도울 거란 얘기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내게 이득이 되는 쪽이라면 함께 갈 수 있다고 했지.”
“거짓말을!”
“거짓말이 아니다. 넌 마녀단은 물론이고 마녀 사냥꾼들도 탐을 낼 마지막 청색 마녀야. 널 그들에게 넘기면 막대한 보상을 받겠지만 널 지키려 하면 그들과 충돌해야 한다.”
“…….”
“넌 내게 그 충돌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말해줘야 해. 그래야만 너도 그 가치에 기대 날 믿을 수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내 호의에 기댄 동맹이라는 건데… 그런 관계를 믿는 건 아니겠지?”
틀린 말은 아니라 에니스가 잠시 쭈뼛쭈뼛하다가 제안했다.
“동토에서 겨울을 나야 하지 않아? 뗄감을 구하기 어려울 텐데… 비밀의 숲을 알고 있어.”
“부족해.”
“이런 큰 던전의 마물들을 겨울 동안 전부 먹일 수 있어? 청색 마녀가 보존식을 만드는 방법과 그 사냥감들을 어디서 찾는지 알려줄게.”
“부족해.”
에니스는 거의 울상이 되어 악에 받힌 소리를 내질렀다.
“그냥 좀 도와줘! 청색 마녀단의 마을도 습격받았단 말이야! 만약 그곳에 재물이 남아있으면 전부 줄 테니까!”
“재물?”
“대, 대단한 건 아니고… 마녀들은 물욕이 없어서 금은보화 같은 건 거의 없어… 마법 실험에 쓸 마석 같은 거나 하급 유물은 몰라도….”
“…그거.”
“유, 유물? 훌륭한 건 전부 지니고 다녀서 다른 마녀단에게 빼앗겼을 텐데….”
“아니, 그거 말고.”
“…마석?”
“최상급인가?”
“쓰임이 각각 달라서… 물론 최상급도 있고….”
“놈들이 가져갔나?”
“최상급 마석은… 대모님과 그 가족들만 아는 은밀한 보물고에 있어.”
“하아….”
“보물고의 위치는 다른 마녀단들은 모르지만, 대모님은 내 할머님이기도 하시니….”
벌떡 일어나 물었다.
“청색 마녀단의 수장이 네 할머님이라고?”
“마, 맞아…. 난 그분의 손녀딸이야.”
“보물고의 열쇠는?”
“봉인의 열쇠와 같아.”
정했다.
스윽…
“…무슨 의미?”
에니스가 내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한다. 그래서 근거지가 어디라고?”
[첩보 활동 중 조력을 제안받았습니다.] [보상은 최상급 마석 ???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