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80
제80화
최후의 청색 마녀 에니스와 함께 생전의 청색 마녀들이 머물렀던 근거지로 떠나기로 했다.
에니스가 충족해줄 만한 다른 결핍도 많았으나, 그녀의 근거지 쪽에 있는 물품은 지금 당장 가져오지 않으면 영영 얻기 힘들 것 같아서 말이다.
그녀는 컨디션이 최고조인 지금, 곧장 움직여야 한다고 날 재촉했다.
“당장 가야 해, 당장!”
“알겠다. 말해두겠지만… 이번에 함께 움직인다고 해서 그게 꼭 널 돕겠다는 말은 아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서두르자.”
그녀를 배신할 생각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전부 가정일 뿐이다.
만약 근거지에 남은 보물이 하나도 없으면? 만약 에니스가 결국 짐덩이에 무엇 하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만약 적들의 수준이 너무 높아 우리 쪽 전력이 상대도 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가정들 속에서 굳은 약속 같은 건 무겁기만 한 족쇄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각자의 잇속에 따라 움직이자는 말이다. 그녀를 팔아넘길 생각은 없지만, 목숨까지 바쳐가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아직 없었으니까 말이다.
“필요한 걸 말해라.”
“만약을 위해 아주 강력한 수하… 예를 들면 악마! 많으면 안 돼, 딱 한 명만!”
“또.”
“커다란 수하. 만약 없다면 우리는 빙벽을 올라갈 생각도 해야 해.”
“…한 명 있지.”
“잠입에 능한 사람, 몸놀림이 빠르면 좋아.”
“있다.”
“거짓말, 전부 다 있다고?”
“이만한 던전을 운용하는데, 없을 거라고 예상하는 게 더 신기하군.”
“그런…가? 아무튼, 준비되면 바로 출발하자.”
에니스는 일족이 몰살당하는 끔찍한 경험을 했음에도 금세 기운을 차렸다. 청색 마녀단의 대모이자 그녀의 할머니인 자가 남긴 유산을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 때문인 것 같다.
‘씩씩한 게 장점이었지.’
강철과도 같은 멘탈이다.
동토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이러한가.
유산 탈환대의 인원 구성은 이러했다.
당연하게도 유산이 있는 장소를 아는 에니스는 무조건 껴 있었고 그녀와 거래를 한 나 역시 껴 있었다.
“이 몸도 함께 가도록 하지.”
“아몬, 네가?”
든든하긴 하다만, 원래는 이포스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녀의 유산이라면, 당연하게도 일생에 거쳐 남긴 괴작들이 있지 않겠느냐? 겸사겸사 이 근처 생태를 조사할 생각이기도 하고.”
“…알았다.”
아몬이 따라나선다면 당연히 이쪽에선 환영이다. 애초에 당장 던전은 아몬이 없더라도 잘만 굴러가게 되어 있으며 내 영혼의 성장보다도 던전의 사역마들이 굶어죽지 않게 하는 게 더 급선무였으니.
“차원문 중계기는?”
“곧 복구가 될 것이다. 이번에 나선 이유 중에 그것과 관련된 것도 있으니… 염려치 말거라.”
아몬이 흰곰의 털가죽으로 만든 외투로 온몸을 감쌌다. 동토의 한파는 숨조차 얼어붙게 할 정도니, 이 정도도 과한 게 아니었다.
아무튼, 만약을 대비해 함께 가는 강력한 사역마는 아몬으로 당첨.
“빌, 준비해라. 잠시 외부에 다녀올 것이니.”
“예.”
빌은 거절이 없다.
이걸로 잠입에 능한 인재, 확보.
다음으로, 커다란 녀석이라면…
“오든, 지낼 만한가?”
“지낼 만하기는… 좀이 쑤셔 못 견디겠다!”
“그럼 외부에 같이 다녀오지.”
“정말인가? 크하하하! 얼마든지! 추위가 그립더군!”
커다란 녀석도 확보.
“코닝, 출발한다.”
“으잉? 나도 가는 것인가?”
“…당연한 말을.”
“알았다네!”
* * *
코닝, 오든, 아몬, 나, 그리고 에니스로 이루어진 탈환대가 던전을 나섰다.
후우우웅-!
“먼저 주변을 정찰하겠네! 별다른 소식이 없으면 주변은 안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코닝이 눈보라를 해치고 저 멀리 사라졌다. 코닝이 올빼미의 모습으로 뒤바뀌었을 때 온몸을 덮고 있는 털이 방한에 상당한 효용이 있는지, 그녀는 눈보라에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걸음이 느린 것 같은데, 모두 내 어깨에 타게! 으하하하하!”
“엉덩이가 시린데. 네 피부는 차갑지 않으냐?”
“크하하하, 악마께서는 까탈스럽기도 하시지. 그렇게 작은 보폭으로는 올겨울이 지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기 어려울 테니 하는 말이라네.”
“…뭐, 호의를 받아들이지.”
모두가 오든의 든든한 어깨 위로 올라섰다. 다행히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운 피부가 아닌 갑주가 있는 부위였다.
“흐으앗!”
“차, 차갑군요….”
동토에서 자란 에니스는 물론이고 웬만한 고통은 웃어 넘기는 빌까지도 척추에 스미는 한기에 신음했다.
“그 말랑한 엉덩이로 덥히고 있으라고. 으하하하하!”
어쨌든 호의는 호의다.
덕분에 체력을 낭비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으니.
“그런데, 신기하네… 서리 거인은 동토에서도 난폭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데 사역마라니….”
에니스의 의문에 오든이 답했다.
“떠돌이 생활도 지쳐서 말이지. 더는 마땅한 적수를 찾기도 힘들고… 가만히 있어도 적이 찾아오는 삶은 얼마나 멋진가! 죽지 않고 계속 싸울 수 있는… 그런 계약이다.”
전투광은 던전에서의 생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듯했다.
“무리가 있었나?”
“무리? 추종자들은 있었지만, 전부 떨어트려 놓았다.”
“그렇군…. 달리 사역마가 된 동족은?”
“모르지. 첫 계약은 저 먼 사막에서 이루어졌으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오든의 걸음 한 번에 저만치 이동한다. 산은 가까워지고 우리가 머무르던 던전은 점차 멀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눈에 띄게 이동해도 괜찮은 겁니까?”
빌의 질문에 에니스가 고개를 저었다.
“문제없어. 서리 거인에겐 관심도 주지 말라는 게 마녀들 사이에선 불문율이거든.”
“크하하하… 맞지, 너희들의 천적이나 다름없으니까.”
서리 거인은 거인족 중에서도 태생적으로 마법에 저항력이 가장 높은 종족이다. 그 살갗은 얼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정이라는 얘기도 있고, 그들의 심장박동 자체가 마력을 밀어낸다는 얘기까지.
“오든을 데려오지 않았으면 족히 일주일은 허비했을 거리로군.”
“작은 종족에게 동토는 가혹하지. 그래도 이틀 정도면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네.”
추위에 꾸벅꾸벅 졸면서 오든의 어깨에서 시간을 보내다, 저 멀리서 코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 깨어났다.
“설인이라네! 설인들이 떼 지어 이쪽으로 오고 있다네!”
후우우웅-!
코닝도 날아와 오든의 어깨에 앉아 급박하게 말을 쏟아냈다.
“위험해 보이는 녀석도 있었다네! 아마도 이쪽을 발견한 모양… 크허어어어어… 크허어어어….”
곧장 잠이 드는 코닝.
“…코닝? 뭐 하는 짓이냐.”
빌이 그녀를 툭툭 쳤다.
“음… 아아! 너무 안락해서 잠이 들어버렸군. 낮에는 잠이 많은 편이라! 다음에도 종종 어깨를 빌려주겠나, 오든!”
“크하하하하하! 재밌는 녀석이군. 얼마든지!”
“좋아! 그럼 모두 해결된 건가!”
“해결됐을 리가 없잖습니까, 코닝.”
“아앗! 그렇지. 설인들을 피해 달아나는 편이 어떤가? 수가 좀 많던데….”
크흠…!
콧바람을 씽씽 부는 오든이 답했다.
“그럴 수야! 난 살아생전 물러난 적이 없다. 하물며 새로운 주인 앞에서의 첫 전투를 그렇게 비겁하게 흘려보내고 싶진 않군!”
“오든, 생전에는 설인과 자주 충돌했습니까?”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군. 동토에서는 내 적수를 찾기가 힘들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네.”
그럼 됐다.
“코닝, 오늘은 이 근방에서 쉬었다 출발하겠다.”
“그럼 설인들을 피하지 않겠다는….”
두두두두…
눈 덮인 지형을 달려오는 무리. 키와 덩치는 인간의 두 배에 달하고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는 구강 구조.
초원에 오크가 산다면, 설원엔 설인이 날뛴다.
“크하아악-!”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설인이 성을 냈다.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요? 잠시만요….”
후우우웅…
[에니스가 의념 통역: 원시 종족을 사용합니다.] [미리 혈액을 채취해둔 종족의 언어를 잠시 통역합니다.]동토에서 나고 자란 마녀답게 설인과의 의사소통도 가능한 듯했다.
“신기한 마법이군, 챙겨둬야겠구나.”
아몬이 허공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적어나갔다.
그 사이, 우두머리 설인이 다시 한 번 화를 냈다.
“어째서 또! 또 나타난 것이냐!”
“…음?”
오든이 설인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를 아나?”
“알다마다! 카쿠스잔 아니냐! 이 미친 폭군 자식!”
“카쿠스잔… 맞아, 그런 이름을 가졌었지.”
“예전에 강탈해간 것들이 부족했더냐? 왜 다시 내 앞에 나타나느냐! 널 피해 이곳까지 이주해왔건만!”
…어라?
‘재밌게 돌아가는데?’
그러니까, 오든이 마녀의 땅이 아닌 동토 어딘가에서 패악질을 부릴 무렵의 이름이 카쿠스잔이라는 것이고 과거의 카쿠스잔을 아는 설인이 바로 눈앞에 이 녀석이라는 건가?
첩보 활동에 몰두하다 보면 재밌는 이벤트들이 생기긴 했다만, 이렇게 디테일한 이벤트는 생소했다.
이유는 뻔하다.
‘게임이 아니게 됐잖아, 한참 전에.’
게임에서만 제시하는 것, 게임에서만 나왔던 것, 게임에 문구로 표시된 것만 가치 있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이 일에 대해선 생각을 좀 해봐야겠군.’
어쩌면, 앞으로의 방향성과도 관련이 있을 부분일지도 모르니.
“이 이상 우리를 괴롭히겠다면, 우리도 더는 참지 않으리다!”
“잠깐, 아아… 기억이 났군. 크하하하하! 맞아, 이렇게 시끄러운 설인이 있었지. 너였군.”
“모르는 척하지 마라!”
“정말 몰랐다고, 약탈은 시시해서 관둔 지가 오래되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정말이냐? 그럼, 네 추종자는 왜 여기 끌고 나타난 거냐?”
갑자기 오든의 안색이 변했다.
“…뭐?”
“그 빌어먹을 두 녀석 말이다.”
“잠깐, 그 녀석들이 살아있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모른 척할 셈은 아니겠지?”
쿠우웅-!
오든이 발을 구르자 설인 대다수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고작 발을 구른 것만으로도.
“자세히 말해보게. 녀석들을 이곳에서 봤다고?”
“무, 물론… 몰랐던 거냐?”
“놈들은 어딨지?”
“모, 모른다! 얼이 빠진 건지 멍청한 몰골로 이 근방을 떠돌고 있었어!”
“흐으음….”
오든의 과거 인연인 듯했다.
“이봐, 설인.”
“넌 또 뭐냐, 인… 마족? 마족 냄새로군.”
“이 근방에서 하루 묵어가야겠는데, 자리를 내줄 수 있나?”
“그게 무슨… 당장에 네놈 목을….”
후우우…
오든의 콧바람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목을, 뭐?”
“…….”
“뭐.”
“…묵을 자리라면 적당한 곳이 있지. 단,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약속해!”
끄덕…
“약속하지.”
“따라와라.”
* * *
졸지에 설인에게 안내받아 편안히 쉴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다.
“근방의 짐승들은 씨가 말랐으니 걱정할 것 없다! 내일까진 떠나도록 해! 아니라면 약속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겠다.”
“크하하하하! 그러지.”
바람이 잘 불지 않는 장소라 그런지 생각보다 춥진 않았다. 불을 피워도 꺼지지 않았기에 잠자리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치이이…
타닥…
탁……
낮에 실컷 돌아다닌 여파였는지 코닝이 가장 먼저 잠이 들고 아몬도 뒤이어 잠자리에 들었다.
“오든.”
“…잠이 오지 않는 것인가?”
“그대도 마찬가지처럼 보이는군.”
“이런저런 생각할 게 좀 있군….”
“추종자에 관한 생각인가?”
“크크… 맞네. 사역마 계약을 맺으며 과거와는 더 이상 연관될 일이 없다고 여겼건만… 녀석들이 아직도 이 땅에 살아있었을 줄이야.”
“사역마의 과거와 맞닿는 경우가 종종 있나?”
“거의 없을 거라네. 특히나 나 같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종족은 말이지….”
“…찾아볼까?”
“무엇을?”
“네 추종자였던 자들 말이다. 거인이지?”
“…그래, 거인이다. 하지만 찾을 이유도 가치도 없는 일. 과거에 묻으면 그만이다. 신경 쓰지 마시게.”
“…….”
“종일 강행군을 했더니 피곤하군. 먼저 잠들겠네.”
모두가 잠이 들었다.
나만 빼고.
야지에서 자는 것은 오랜만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불편한 건지도.
으드득…
으드득…
불가에서 몸을 일으켜 잠자리에서 잠깐 걸어 나왔다. 추위를 스며들게 하다 불가로 가 몸을 녹이면 곧장 잠이 들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였다.
“으하핫! 마중 나온 거야?”
“…….”
절대로, 이 자식을 마주치기 위함은 아니었다.
“오랜만이네?”
“형편없는 변장은 언제까지 할 셈이지?”
“좀만 봐줘, 당당한 입장은 아니라서.”
그 녀석이다.
“레온….”
“얘기나 할까?”
가을 전쟁을 견뎌낸 후, 녀석을 처음 만난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고, 화를 내고 싶은 감정도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말 한마디에 그 모든 것들은 아득히 저 뒤로 사라졌다.
“마녀의 일에 손 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