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83
제83화
“부탁일세, 카쿠스잔과 함께 가게 해주게!”
“이렇게 부탁하네!”
나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거인들이 머리를 조아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오든, 이게 네 뜻인가?”
“이들을 거두어 주게. 다시는 못 볼 줄 알고 잊었다만,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필시 운명이라네. 외면하기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게 가능한가?
이런 일이 있으면 마치 도라에몽을 찾는 진구처럼 아몬을 쳐다보게 된다.
“이렇게 커다란 존재들도 직접 사역마 계약을 맺을 수 있나?”
“…조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육신의 크고 작음은 문제가 되지 않느니라. 오로지 영혼의 격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이다.”
설명이 조금 복잡했다고 생각했는지, 아몬이 부연해서 설명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네가 지금 주인 없는 악마를 만난다고 해서 조복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페넥스, 아몬, 이포스… 루시퍼는 예외고.
‘…그려지지 않는다.’
악마란 그런 존재다.
아군일 때도 든든하지만, 적으로서 마주친다면 솔직히 이긴다는 미래를 떠올리기가 어렵다.
“어렵겠군.”
“반면 이들은?”
거인을 굴복시킨다.
“…가능할지도.”
“그 감이 맞을 것이니라. 네가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어렵겠지만 제압할 수 있는 상대라면 영혼의 그릇이 허락하는 한 가능하지.”
말을 하는 사이, 어느새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일전에 잠시 에니스에게도 사용한 적 있는 마법진.
“시동어는 알고 있겠지.”
스윽…
손을 뻗고 말한다.
“종으로써 나를 섬기리라.”
후우우우웅…
신비로운 광채가 서리 거인들을 감쌌다.
[★★★★ 서리 거인 병사를 소환합니다.] [★★★★ 서리 거인 병사를 소환합니다.]……
이들의 영혼과 내 던전 코어가 하나로 묶였다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만 보면, 마석 없이 사역마를 늘리는 조복 의식이 대단한 것처럼 보일 텐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이 느낌….’
영혼의 그릇이 허락하는 한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곧바로 깨달았을 정도로 부담스러운 느낌.
“느낌이 오는 것이지?”
“…그래.”
“주력으로 발달시킬 만한 능력은 아니니라. 선택받은 몇을 제외하고는….”
“선택받은?”
“나중에라도 만나게 되리라. 녀석의 혈통이 쭉 이어져 왔다면 말이지.”
서리 거인 둘만으로 충만한 감각. 한동안 다른 어떤 존재도 조복 의식을 치르기가 불가능할 것 같다.
쿠우우우우…
일어서는 거인들의 눈에 푸른색 안광이 맺혔다.
“카쿠스잔… 앞으론 영원히 함께 싸울 수 있게 됐군.”
“자네가 없는 동토는 시시했네.”
“크하하하하! 그럴 테지. 그보다 난 이제 카쿠스잔이 아닐세… 내 이름은 오든, 계약자가 내게 준 이름이지.”
“오든….”
서리 거인 둘 다 이름을 원하는 듯하기에 생각하고 있던 이름을 주었다.
“호킨, 볼단. 너희의 이름이다.”
“호킨과… 볼단…. 받들지.”
“크하하하하!”
두 마녀와 두 거인까지.
불어난 인원들을 잔뜩 데리고 던전으로 되돌아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 나섰을 땐 단출했던 인원이 돌아올 땐 뭔가 한가득 불어난 느낌이다.
* * *
던전으로 복귀 후, 호킨과 볼단은 재생의 화원으로 향했다. 자색 마녀들에게 혹사당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든이 너무 시원하게 매타작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끙끙 앓고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다.
‘오든이 있는 구역에 배치해야겠군.’
오든도 심심하다고 투덜거렸으니 셋이서 투덜대면 좀 낫지 않을까.
“그럼, 난 이만 여독을 풀러 가보마.”
청색 마녀의 본거지에서 입수한 온갖 유물들을 바리바리 챙겨 연구실로 향하는 아몬. 그중에서도 낙뢰 유도기 알비누스를 애지중지하는 듯했다.
자, 그럼 남은 건…
“이제 차분하게 얘기를 들어볼 수 있게 됐군.”
“…….”
“…….”
이쪽은 발루아라는 자색 마녀.
그리고 이쪽은….
“이름이 뭐지?”
“…세네카.”
“좋아, 발루아와 세네카. 이제부터 질문 공세가 이어질 거야. 협조적이면 죽이지 않을 거야.”
“그, 그게 정말인가요?”
“나는 마녀에게 원한이 없거든. 원한은… 이쪽이다.”
스윽…
에니스를 바라보자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은 원한보다 정보가 더 중요하니까. 더 큰 복수를 위해서.”
“그러고 보니, 에니스. 네 목적은 복수인가?”
“당연하지, 왜?”
“한동안은 추격을 따돌리는 데만 집중했잖나. 그렇기에 물어본 거다.”
청색 마녀단 몰살의 충격에서 정신을 차린 에니스가 가야 할 길은 명확했다. 죽은 마녀들의 복수를 하는 것.
만약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면, 진작 동토를 떠났어야 했다.
‘내 목표도 정리해야겠군.’
에니스와 나의 목표는 같지 않다.
어디까지나 나의 목표는 동토의 안정이자, 내 던전이 무사히 이곳에 안착하는 것이다.
‘지리적인 특성 탓에 모험가들이 찾아올 일은 없지만….’
대수림에 머물던 때와는 달리, 이곳에는 자연 발생하는 모험자 파티의 수가 적다 못해 고갈되었다. 차원문 중계기가 있으니 그래도 기본적인 영혼 수확은 가능하겠지만…
‘이 부분은 고민이로군… 가을 전쟁 시기엔 생존만 신경 쓰느라….’
원작의 파우스트가 밟았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행동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멀지 않았어. 스토리를 알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게.’
거기다, 던전이 자리 잡을 수 있던 조건 자체도 꽤나 달랐다.
‘원작은 할당제처럼 모험가가 무조건 찾아오게 되어 있었지. …이상한 일이긴 하지, 험지 중의 험지이자 자원도 보상도 없는 이 동토에 열 개에 가까운 파티가 우연히 습격해온다는 게.’
아무튼, 서리 둥지에 이대로 머물러야 하냐는 심각한 고민은 제쳐두고.
공부하기 위해선 책상부터 정리하고 보는 게 인간이다. 주변이 깨끗해야 고민에 대한 답도 명확하게 내릴 수 있겠지.
“어떤 복수를 원하지?”
“그들이… 대가를 치르길 원해.”
“헛소리. 너희 청색 마녀단이 결사반대만 하지 않았어도…!”
“맞아요! 언제까지 마녀 사냥꾼들에게 쫓겨 다녀야만 하는데요! 그들에게 죽어간 마녀들은….”
이래서는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하다.
‘시끄럽군….’
스으으으…
“…모두 언성을 높이지 마라.”
혈통에 깃든 권능.
선택된 자들만이 휘두를 수 있는 위압감.
“크읍….”
“시, 심장이….”
“이게 대체….”
위압감을 발휘하자 소란을 멈추고 마녀들 모두 심장을 움켜쥐었다. 조금 조용해진 듯하자, 슬며시 기운을 풀었다.
“쿨럭… 켁… 켁….”
“하아아아… 하아아….”
“요, 용서를… 쿨럭….”
이제야 대화할 자세가 된 듯했다.
힘을 보여야만 대화가 수월해진다니… 귀찮기 짝이 없다.
“발루아… 세네카, 너희는 포로다. 자각하는 게 좋겠지.”
“…….”
“…….”
“내가 원하는 건 눈물겨운 화해도 아니고, 누가 정의인지 밝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이 땅의 안정과 그걸 손에 넣은 후의 보상이지.”
“그, 그거라면… 자색 마녀단도 충분히 보상할 수 있어요. 당신의 그 거인… 우리를 돕는다면….”
“백색 마녀도 장담할게! 우릴 도와 청색 마녀를 호송한다면….”
에니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이야기는 그녀에게 불리한 흐름이다.
“거절. 에니스는 내게 약속을 지켰다. 나도 약속을 지켜야만 하지.”
“파우스트….”
“다른 선택지를 말해봐라. 상황에 따라 너희를 전령으로 쓸 수도, 혹은 돌려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게 무슨….”
“그래요. 그게 무슨 말이죠?”
스으윽…
뒤로 몸을 누이며 차분하게 응대했다.
“남은 두 마녀단의 말살도 고려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너희도 돌아가지 않는 편이 좋겠지.”
“뭐, 뭐라고요!?”
“마녀단의 몰살이라니… 네, 네게 그 정도 힘이 있다고는….”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그 말살을 내가 이룬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럼….”
“마녀 사냥꾼들에게 휘둘리고 있지?”
“……”
“아마도 이대로 전황이 이어진다면, 너희들에게 그리 밝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군.”
마녀 사냥꾼들이 마녀들을 몰아붙이고 있다는 건 이미 에니스에게 듣기도 했고 원작의 스토리에서도 드러났었다.
“그래서, 만약 에니스가 마지막 열쇠를 넘겨 에켈라르트가 부활한다면 무슨 수로 그를 부릴 생각이지? 완벽하게 부릴 방법이 있다면 그의 부활도 고려해보마.”
“자색 마녀단의 힘이라면….”
“기각. 서리 거인조차 스스로 풀어낸 세뇌다.”
“대모님의 세뇌라면 달….”
“서리 거인과 에켈라르트도 다르다.”
발루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납득하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게 아니다. 에켈라르트의 세뇌가 잠깐이라도 느슨해지게 된다면 동토에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굳이 지금 시한폭탄을 이불에 넣고 끌어안고 자는 방법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백색 마녀단은?”
“아킬라 님께선….”
“아킬라라….”
– 동토를 벗어났을 수도 있겠어. 흐음… 역시, 아킬라의 계획대로 진행해야 하나.
청색 마녀의 근거지에서 고위 마녀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 나온 말이다.
“아킬라의 계획은 뭐지?”
“그건… 3번째 열쇠를 포기하고 남은 두 열쇠로 에켈라르트의 봉인을 푸는 거야.”
“…에켈라르트의 힘이 반토막이 날 텐데?”
“그편이 더 안전하게 세뇌를 시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니까.”
“반편이가 된 에켈라르트가 마녀 사냥꾼들을 몰아낼 수 있을까?”
“에켈라르트를 우습게 생각하지 마. 오래전, 이 땅의 대부족들을 무릎 꿇린 주술사야.”
“음… 그나마 합리적인 방법이긴 하다만.”
역시나 걸리는 게 많았다.
애초에 자색 마녀단과 백색 마녀단의 계획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동토의 안정을 바라지? 마녀 사냥꾼들이든 마녀든 어느 한쪽은 사라져야만 평화가 찾아올 거야. 마녀 사냥꾼들을 없애는 데 힘을 보태는 게 어때? 우리 편에 선다면 보상은….”
“기각. 누굴 머저리로 보는군.”
“뭐?”
“청색 마녀단이 너희 마녀들에게 배신당해 몰살당했다. 그럼 너희를 믿는다는 가정 자체가 틀려먹었다는 말이지. 내가 뭘 믿고 마녀 사냥꾼들과 맞서지? 버림받을 사냥개가 될 게 뻔한데.”
“크윽….”
배신은 명명백백했으니, 신뢰를 입에 담을 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이것도 저것도, 허황된 이야기군. 이러면 마녀단과 손을 잡는 건 불가능한 선택지다. 차라리 마녀 사냥꾼 쪽과 손을 잡는 건?’
…그것도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마녀를 이단이라 부르짖으며 긴 세월 쫓아다닌 녀석들이 던전 키퍼인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게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제일 좋은 건 양쪽 다 괴멸적인 피해를 받고 녹아웃되는 거다.’
양측의 전멸.
이보다 깔끔한 결말은 없을 테지만….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미스란테에 대해 알고 있나?”
“미스란테? 알다마다. 백색 마녀의 신물이나 마찬가지니까. 에켈라르트를 봉인한….”
“웃기고 있어! 그게 왜 백색 마녀단의 신물이야! 청색 마녀단이 제련한 건데!”
“그러는 너야말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떠들면서! 청뢰포 알비누스든 저주받은 검 미스란테든 백색 마녀단의 비전 술식이 중추가 됐다는 걸 부정하는 거냐?”
이번엔 옆에서 지켜보던 발루아가 발끈했다.
“다, 당신들이 뭐라고 떠들든 에켈라르트의 봉인에 가장 큰 일을 한 건 자색 마녀단이었어요! 그 저주받은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를 키워낸 것도 자색 마녀단이었고 봉인 전 에켈라르트를 붙잡아 뒀던 것도 자색 마녀단의 병력이었으니까요.”
“웃기시네! 그 키워낸 검사도 미스란테를 고작 한 번 휘두르고 재가 됐으면서!”
“한 번이라도 휘두른 게 다행이죠! 다른 자들은 손잡이를 쥐기만 했어도 저주에 머리가 터져 죽었으니까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이고 그때 당시엔 태어나지도 않았던 자들이 잘도 공과 과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너희도, 황금 겨우살이에 대해 알고 있나?”
“모를 리 없지. 미스란테를 제련하는 데 필요한 거니까.”
“얼마나 필요하지?”
내 질문에 삼색의 마녀가 각자 양손을 펼쳐 가상의 수량을 정했다.
“요, 요 정도?”
“에이, 요 정도는 되어야죠.”
“기록에 따르면 그것보다는 많아야 했어. 그러니까… 이 정도?”
“만약, 황금 겨우살이가 있으면 지금 이 시대에 그걸 벼려내는 건 가능한 일인가?”
“처음부터?”
“원형이 있다. 날이 절반쯤 손상됐지만.”
백색 마녀 세네카가 팔짱을 끼며 가소로워했다.
“수복하는 것 따위는 그리 큰일이 아니야.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지. 근데, 이런 가정은 무의미해. 황금 겨우살이는 자취를 감췄는걸.”
“있어.”
“그러니까요, 애초에… 네?”
발루아가 눈을 끔뻑끔뻑 뜨며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루시퍼.”
“예.”
루시퍼가 미리 꺼내둔 상자를 열었다.
끼이익…
상자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황금 겨우살이.
“말도… 안…돼….”
“화, 황금 겨우살이에요!”
에니스가 다가와 황금 겨우살이를 손으로 만졌다.
“이 기운… 정말로… 황금 겨우살이….”
다행히, 내가 가지고 있던 게 이들이 말하는 황금 겨우살이가 맞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벼릴 수 있다고 했지?”
이쪽도 보험 하나는 들어둬야지.
“저주받은 검 미스란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