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87
제87화
– 에켈라르트에 대해 아십니까?
“…찾았다.”
“차… 찾은 거야?”
“그래.”
회의록에 깊숙한 곳에 남겨진 얼룩.
누군가가 에켈라르트에 대한 화두를 꺼내고 그것을 차근차근 발전시킨 게 지금 동토의 상황이었다.
4명의 부대장 중 가웬이라는 자가 있다. 이 자가 가장 처음 에켈라르트의 봉인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봉인과 관련된 계획을 수립할 때부터 지속적으로 흘러나온 그의 발언이, 마녀 사냥꾼이 동토에서 벌인 지난 일들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가웬… 이 녀석일 확률이 높다.’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위험인물이었다.
기록관은 아직도 돌아오고 있지 않았기에 회의록에 남은 흔적을 지우고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스으윽-
되돌아온 막사는 여전히 불이 꺼져 있었다.
“돌아오셨군요.”
“수확이 있었나?”
“시간이 좀 남아 다른 부대장들의 정보도 준비했습니다만….”
먼저 와 대기하고 있던 빌.
“뭔가 알아내신 듯하군요.”
“가웬에 대한 정보만 얘기해 봐.”
“역시… 다른 부대장들은 괴리가 조금 있었습니다.”
“그랬나?”
“예. 그럼… 가웬은 6년 전에 자진해서 마녀 사냥꾼 무리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마흔이 넘은 중년 남성이고 부대장 중 가장 무력이 출중하다고 알려졌고….”
“합류하게 된 사연은?”
“마녀에게 부인을 잃었다고 합니다. 확인되지는 않은 정보입니다.”
“음….”
“야전 사령관인 베흐만의 신임을 받고 있으며 사실상의 전략 참모로서 활약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최근 전술 회의에 전부 참여한 건 부대장 중 그가 유일하다고 하는군요.”
이밖에도 다른 자잘한 정보를 전달받았는데 그리 영양가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끝인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달이 조금 더 기울면, 곧 전략 회의에 들어간다는군요.”
“참석자는?”
“전초기지에 남아있는 부대장은 전원 참석할 예정이고 이전과 같이 기록관 정도만 동석할 듯합니다.”
나이스 타이밍이다.
당장엔 추가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기에 가웬이 자리를 뜨는 순간만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렇게 되면 붕 뜨는 시간 없이 곧장 가웬의 숙소를 수색할 수 있었다.
텅텅 빈 숙소에서 달이 조금 더 기울기를 기다렸다. 기록관이 이동하는 것을 확인한 후, 그를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전초기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야전 사령관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기록관이 그곳으로 건장한 남성들과 들어가는 것을 기점으로 가웬의 거처로 향했다.
‘호위가 있군.’
스으윽…
빌이 먼저 나서 호위를 고꾸라트렸다.
툭…
일전에 사용한 수면 비약을 낮은 농도로 써먹은 듯했다.
“회의가 길어질 듯하기는 한데, 그리 여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정보가 될 만한 것을 찾아 떠난다.”
아무것도 찾지 못하거나, 정보가 부족하다면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부대장 가웬을 납치해 심문하는 방법처럼.
“…깔끔하게 생활하는군.”
“애초에 어지를 겨를도 없었을 겁니다. 전초기지는 어차피 임시고 짐이라고 해봐야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요.”
이곳에 아무런 정보도 없을 수 있다. 그것을 감안하고 가웬의 거처에 들어갔을 때, 직감했다.
‘…이상한데?’
전초기지의 임시 거처치고는 뭐랄까… 지나치게 깔끔한 느낌이다. 빌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바닥을 계속해서 살피다가 말했다.
“발자국이 아예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지운 거죠. 방금까지 이곳에 머물렀다는걸 알고 있으니… 조심성이 많은 건 물론이고….”
이윽고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숨기는 게 있을 겁니다.”
“같은 생각이다.”
“꼼꼼히 찾아보도록 하죠.”
안 열리는 서랍까지 뿌득뿌득 열어가며 장장 10분이 넘도록 감춰둔 것을 찾던 도중.
텅텅-!
“…여기다.”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이 카페트 밑, 비어있군.”
“함정일지 모르니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펄럭…
철컥…
끼이이이이이이-
‘이 냄새… 이곳은 연 게 오래되지 않았다.’
폐쇄된 장소에서 뿜어져 나올 만한 공기가 아니다. 적어도 자주 이곳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게 분명했다.
“가방?”
“내가 확인하지.”
가방을 열고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았다.
“…밀서로군.”
밀랍으로 봉인된 밀서.
아직 그 주인조차 확인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시간 끌 것 없지.’
이미 가웬의 납치까지 생각한 판국에 거칠 게 뭐가 있으랴.
툭-
밀서의 봉인을 뜯고 활짝 핀 그 순간.
휘이이이이이-
마치 활자가 빙글빙글 돌며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려 했다.
‘정신 공격! 함정이다!’
어떻게든 저항해야만 했다.
– 긴장을 풀고 몸을 맡기렴….
달콤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 어디에서도 기척은 느껴지지 않으니 밀서 자체에 숨겨진 함정일 것이다.
‘저항해야….’
“파우스트 님?”
휘이이이이…
주변 사건이 느리게 보였다.
만취한 것처럼 몸을 비틀거릴 것만 같고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게 될 위기.
그 순간, 내면에서부터 일어난 서늘한 기운이 폭발할 것처럼 달궈진 내 머릿속으로 뻗어나왔다.
고오오오오오오…
‘이건… 아!’
파우스트의 피에 새겨진, 냉정이다.
그 어떤 순간에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힘.
쩌저적…
살점이 뜯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밀서로 인해 발동한 함정은 무력화됐다.
“…함정이었군.”
“함정이라는 말씀입니까?”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이 밀서를 열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다. 신기하군… 밀서 자체에 이런 힘이 있다니.”
“밀서를 보낸 자는 평범한 자가 아닌 모양이군요.”
“애초에 마녀의 땅을 저 혼자 주무를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다. 내용이 기대되는걸.”
내용을 살펴보기 전, 이포스가 내 팔을 끌어당겼다.
“저기… 파우스트….”
“왜 그러지?”
“오고 있어, 여기 주인.”
“…뭐?”
“느껴져.”
이포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녀는 얼어붙은 영혼들의 날카로운 감각을 공유하니까.
빌이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가 왔다 간 흔적을 순식간에 지웠다.
파아아앗-!
밀서라는 수확이 있었으니 우리는 일단, 근방의 야지로 몸을 뺐다.
“여기라면 괜찮겠지.”
“흔적은 모두 지워뒀으니 한동안은 괜찮을 겁니다.”
이제 조금 차분한 마음으로 밀서의 내용을 볼 수 있게 됐다.
스륵…
– 주인님께서 계획이 지연되고 있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하시고 계세요.
사실은 뷔트너 공에게 그런 임무를 지시하신 것조차 잊고 계십니다.
고작해야 변두리의 주술사를 조복하는 것조차 이리 오래 걸리신다면…
‘주인님? 뷔트너? 조복?’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실마리들.
‘주인님이라 부르는 자의 하수인이 쓴 지령서 같은 거군. 생각보다 거대한 조직인가?’
그리고 새롭게 튀어나온 이름 뷔트너.
‘뷔트너는… 가웬이로군. 놈의 진짜 이름은 뷔트너였어.’
즉, 뷔트너의 주인이라는 자가 오래전 뷔트너에게 임무를 맡겼고 그 임무의 내용이 에켈라르트의 조복인 듯했다.
남은 밀서의 내용은 별다른 게 없이 그저 뷔트너를 타박하는 내용뿐이었다. 이렇게 늦어서야 임무를 완수해도 돌아오는 것은 없을 거라는 둥, 주인님은 이미 뷔트너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둥.
뜬금없이 사랑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가 등장했다는 게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노리는 건 에켈라르트의 조복이었나?’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마녀단에 소속될 수 있는 건 여성뿐.
남성인 뷔트너가 에켈라르트의 봉인에 관여할 방법은 단신으로 쳐들어가 마녀들을 모조리 죽이든가, 마녀 사냥꾼에 합류해 마녀들을 압박하는 것 정도.
전자가 가능한 인물은 대륙에 거의 없을 것이고 후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뭐, 선택지가 없었을 테지.’
후자를 선택한 뷔트너가 수년간 이 일에 매달렸고 이제 그 열매의 수확만을 남겨둔 상황.
‘뷔트너가 몸담은 곳은 어디일까….’
평범한 자들은 아닐 것이다.
밀서에 꽤 강력한 함정을 남겨두기도 했고, 수년이 걸리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지시하기도 했으니.
…밀서를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
‘밀랍을 짓누른 도장은 평범했고…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게….’
파락…
밀서를 펼쳐서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잘 모르겠다.
“흠….”
밀서를 달빛에 대어보았다.
스으으으…
그러자, 반응이 왔다.
달빛이 밀서를 투과하며, 밀서에 한 가지 은은한 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찾았군.”
‘그보다 이 문양…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순간, 심장이 갑자기 쿵쿵거렸다.
아니겠지 하면서도 내가 문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의심을 넘어 확신까지 해버렸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여기서 당장….”
파아아아아아앙-!
파공음을 내며 날아오는 무언가.
평범한 창이다.
그럼에도 빌은 막을 수 없다.
따아아아아앙-!
이포스가 창을 후려쳐 날려버렸다.
치이이익…
그 바람에 몇 걸음이나 밀려났다.
“저기… 강해….”
창을 던진 사내가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도둑고양이들이 조심성이 없군.”
“큭….”
“남의 연애편지는 뭐 하러 훔쳐 갔지?”
강자다.
휘오오오오…
이 자는,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강했다. 그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 정도인가….’
정체까지 들키게 되면 아마도 영원히 추격당할지도 모른다. 밀서에 새겨진 문장은 그 생각이 허황하지 않았다는 증거나 마찬가지니까.
“그 가면, 벗지 그래?”
“착오가 있는 것 같으니, 우린 이만 물러나지.”
“착오…? 착오라고?”
뷔트너가 기운을 끌어올렸다.
“오늘 그 착오 때문에 너희는 죽을 것이다.”
스르으으으응…
뷔트너가 검을 뽑아 쇄도했다.
파아아앙-!
“곰 아저씨! 도와줘!”
이포스가 비명 아닌 비명을 내지르자, 설원의 눈이 포탄이 터진 것처럼 밀려났다.
후우우우웅…
웅혼한 기운.
“이 힘… 제법인데?”
후우우우웅-!
이포스의 손이 뷔트너의 목을 노렸다.
카아아앙-!
흰곰이 깃든 그녀의 몸은 강철보다도 단단한 상태. 검과 가녀린 손이 부딪혔는데도 강철이 부딪는 소리가 났다.
카아아앙-!
카아아아아앙-!
이포스가 악마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는 모습. 자신보다 약한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않는 듯했다.
‘가세해야 하나? 뷔트너를… 죽여야 해?’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이 모든 건 밀서에서 본 문양 때문이다.
“네 주인은 생각이 많은 모양이지?”
치지지직…
뷔트너의 검이 빛났다.
[뷔트너가 손톱달을 사용합니다.] [부채꼴 범위에 공격력의 150%에 달하는 강력한 달 속성 피해를 줍니다.]콰아아아아아아-!
이포스가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른 능력을 끌어올려 대응했다.
[이포스가 흰곰: 크레바스 펀치를 사용합니다.] [대지를 후려쳐 크레바스를 형성합니다. 설원 지형일 시 추가적인 크레바스를 만들어내며 아군이 있는 방향으로는 형성되지 않습니다.]콰아아아아아아앙-!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
“뭐, 뭐야!”
“지진이다!”
저 멀리 떨어진 전초기지에서 들려오는 소란.
뷔트너의 공격 역시 이포스가 일으킨 균열에 휩싸여 사라졌다.
“이포스!”
파아악-!
이포스를 옆구리에 끼고 달렸다.
지금 상황에선 뷔트너와 얽히지 않는 게 최우선이었다.
“도망치려는 거냐!”
파아아아아앙-!
뷔트너가 금세 따라붙으려 했다.
저 정도 힘이면 스칼라와 자웅을 겨뤄볼 만하지 않을까.
‘제기랄… 도망칠 수조차 없는 건가?’
이렇게 되면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바로 그때.
– 숙여라.
‘…뭐?’
익숙한 목소리에 빌의 손목까지 잡아 넘어지듯 앞으로 굴렀다.
쒜에에에에엑-!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륜(輪) 형태의 병기가 우리와 뷔트너 사이의 대지에 내리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 즉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숨어야 해!’
하지만, 마력 교란 현상이 일어난 건지 거동하기가 어려웠다.
절뚝거리며 움직이는 그때, 누군가 우리를 잡아끌어 데려갔다.
“어디 숨은 거냐! 제길….”
뷔트너가 방방 뛰며 사방을 헤집고 다녔지만, 다행히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돌아갔다.
“이쪽으로 와, 할 얘기가 있다고 했으니까.”
“아이타….”
그때, 나를 찾아온 레온의 곁에 있던 강자다. 눈발이 잦아드는 언덕의 바위에, 레온이 달을 보며 앉아 있었다.
“어서 와.”
“레온, 왜 말하지 않은 거지?”
“…….”
–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개입할 수가 없는 거다! 이 일에 네가 개입하게 되면….
그때, 녀석이 한 얘기다.
이제는… 이해가 가는 수수께끼 같던 말.
녀석에게 밀서를 들이밀었다.
달빛에 비치는 문장.
“뱀이 사과를 휘감은 문장… 음욕의 문장이다.”
“…그래.”
“이 일을 꾸민 건….”
과거, 태양왕 솔로몬에게 마족들은 멸종에 가까운 피해를 받았다. 하지만, 다행히 마족 수뇌부는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고 현재 인간의 제국 아슬란에 대항하는 반란군의 수장으로 장막의 뒤에 숨어 많은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들 개개인의 무력은, 세계관 정상급에 닿아있고 신비로운 행보는 대륙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래… 내가 이 솔라리아에서 마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찾아야만 했던 자들.
“칠죄종인가?”
칠죄종.
난 지금 일곱 마왕 중 누군가의 일에 끼어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