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88
제88화
칠죄종.
최초의 마왕으로부터 이어진 혈맥으로, 그 피에 새겨진 힘만으로도 생물의 정점에 다다를 수 있다는 존재들.
오만, 탐욕, 질투, 나태, 음욕, 분노, 폭식.
태양 왕 솔로몬이 거느린 대천사들과도 비견될 정도의 세계관 최강자 무리.
살아남은 마족 대부분은 그들의 휘하에서 인간들이 저지른 끔찍한 사건에 대해 죄를 묻고자 한다.
일곱 대죄의 마왕들…
‘빌어먹을….’
이곳 마녀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 칠죄종 중 한 명인 음욕이 벌인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음욕의 일에 관여한 거군.’
상황이 이 지경이 되니, 지금 달을 쳐다보고 있는 저 놈팡이도 누군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왜 날 속였지?”
“속여? 내가?”
“칠죄종의 일이라는 걸… 어째서 말하지 않은 거냐?”
“아아, 그렇지만… 미리 말했으면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거잖아?”
당연한 말이다.
원작의 에니스는 에피소드의 길잡이가 되어줬지만, 현재로서는 마지막 청색 마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패.
그게 그녀의 위치였고 내 앞날에서의 비중이었다.
지금이라도 손을 떼는 게 맞았다.
“사실은 전에도 긴가민가했거든, 네 참견을 어디까지 용인해야 할지.”
“……”
“그런데, 이제 확실히 알겠어. 그때 널 내버려 둔 게 정답이었다는 걸.”
“…뭐?”
“일이 상당히 재밌게 됐거든.”
레온이 별을 세며 말했다.
“음욕이 이 일을 계획한 건 아주 오래전이야. 8년 전쯤? 그러니까 지금 마녀 사냥꾼 행세를 하는 녀석은 8년 전부터 이 일을 준비해온 거지.”
‘오래도 준비했군.’
피식-
“그런데, 음욕이 지금 이 일에 얼마나 관심이 있을 것 같아?”
예상 못한 질문이다.
음욕이 무려 8년 전부터 준비한 일.
당연하게도 관심이….
“없는 거로군?”
“큭큭… 맞아. 정확히는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잊었다고 보는 게 맞거든. 음욕의 밑에 저런 꼭두각시가 몇이나 있을 것 같아?”
“열은 넘게 있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백은 넘을 거야. 수백일 수도 있고. 칠죄종 개개인의 정확한 전력은 모르지만 말이지.”
“그게….”
“그녀의 말이라면 죽음도 불사할 녀석들이 아주 많아. 음욕은 그런 쪽에 장기가 있거든.”
그 말인즉, 뷔트너처럼 홀로 오지에 파견된 음욕의 하수인들이 잔뜩 있다는 얘기.
“그럼 이 밀서는 뭐지?”
“직접 확인해도 될까?”
파아앗-!
밀서를 넘기자 레온이 훑어보더니 만면에 가득 미소를 지었다.
“이거 봐, 잊었을 것 같더라니.”
“뭐?”
“음욕은 관심이 있으면 직접 전언을 남겨. 아마 음욕에게 동토의 일이 전해진 건 꽤 오래전일걸? 대부분 다 그 밑의 수하들이 처리하고 있는 걸 거야.”
그래, 좋다 이거야.
자잘한 사실쯤은 말이지.
근데, 내가 알고 싶은 건….
“…이봐, 레온.”
“응, 파우스트.”
“넌 뭐냐?”
“…….”
“칠죄종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잔뜩 알고 있는 건 물론이고… 이곳 마녀의 땅에 드러나지 않은 흉계까지 알고 있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꽤 오래된 의문이다.
“넌… 뭐냔 말이다.”
썩은 뿌리가 무너진다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으며, 몇 개월이 지나 자리 잡은 서리 둥지에 찾아온 녀석.
그리고… 칠죄종의 일에 관여하는 걸 경고해준 녀석이다. 물론, 이 일이 칠죄종과 관련 있다는 건 비밀로 하긴 했지만.
난, 녀석이 누군지 알아야만 한다.
“…그런가, 이제 통성명할 때가 되긴 했지.”
고오오오오오…
레온의 머리칼과 동공이, 점차 검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마족.”
변화는 아이타에게서도 나타났다.
스르륵…
그녀의 머리칼도 점차 검정으로 물들었다.
이들이 마족일 거라 예상하긴 했다. 정확히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뷔트너의 계획이 칠죄종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다.
레온이 변장하기 위해 얼굴에 붙여둔 인피면구를 떼내었다.
찌이익…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미안(美顔)이 드러났다.
“정식으로 인사하마.”
펄럭-
레온이 겸양을 떨며 한 팔을 안쪽으로 굽히며 인사했다.
“칠죄종, 탐욕의 좌 아카드다.”
“……뭐?”
잠깐 생각이 멈췄다.
…칠죄종이라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레온… 아니, 아카드의 기운이 갑자기 폭발하듯 주변을 장악했다.
끔찍하고 징그러운 기운….
살기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생명을 거둔 자의 기운.
그저 단순한 힘의 해방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사연이 있어 보이는 기운.
쉬이이이이이익…
마치 살아있는 촉수가 사방에 도사리고 있어, 언제든 날 집어삼킬 것만 같은 느낌. 가만히 저항하지 않으면, 그의 기운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후우….’
최대한 저항했음에도 여전히 검고 흉물스러운 기운이 내 뺨을 간지럽히는 기분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에 압박이 전해진다.
‘이게… 내가 찾던 칠죄종….’
내가 레온이라는 인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야 레온은 원작에서도 없던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카드의 이름만큼은 모를 리가 없었다.
‘칠죄종 탐욕… 파우스트가 가장 많은 피를 물려받은 존재.’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자는, 마왕이다.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거냐?”
아이타가 발작하듯 앞으로 나섰다.
“예를 갖춰! 감히 탐욕의 앞에서….”
“그만, 아이타. 편하게 얘기하고 싶거든?”
“하지만….”
“비밀스러운 관계잖아. 괜찮을 거야.”
째릿…
아이타가 날 째려보고는 다시 뒤로 물러섰다.
“자,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줘야 할까….”
아카드가 얘기를 시작한 부분은 상당히 과거 시점이었다.
“처음 널 봤을 때… 그러니까, 롬웰이 쓸만한 녀석이 있다면서 널 소개했을 때로군.”
썩은 뿌리에 머무르던, 그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어설픈 변장, 봐줄 만한 강단… 그리고 어디선가 본 듯한 기운. 한눈에 널 알아봤지.”
“…알아봤다고?”
“그럼, 그럭저럭 쓸만한 계획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설마, 버려진 실험체가 멀쩡히 살아 돌아올 줄이야.”
“너….”
나와 실험체들은, 칠죄종에게 버려졌다. 단두대에서 죽었어야 할 사생아들.
“아까, 매혹이 이곳 동토에서의 계획을 까맣게 잊었을 거라고 했지?”
“…….”
“너희 실험체들은 그것보다도 훨씬 오래전에 칠죄종에게서 잊혔어. 그만큼 가능성이 희박한 계획이기도 했고… 계획을 관심 있게 지켜본 자 역시도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게… 너라는 거냐?”
스윽-!
검지를 치켜세우며 말하는 아카드.
“맞아. 이 아카드 님이시지.”
“그렇다면 어째서 승전 섬에 병력을 보내지 않았지?”
“어째서냐니? 말하지 않았나? 너희는 칠죄종에게 버려진 거다. 이미 버린 걸 구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잖아?”
“…….”
냉정 속에서, 자그마하게 피어오르는 분노. 그러나 이내 그 자그마한 분노조차 사그라들었다.
‘내가 칠죄종이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그게 합리적이니까.
결함이 가득한 결과물을 위해 자원을 투자할 만큼 칠죄종의 상황이 여유롭지도 않았고.
‘다만… 이 발언은 날 의도적으로 건드리려는 의도겠군.’
마치 내가 감정에 휘둘려 칠죄종을 상대로 이를 드러낼 것인지를 지켜보려는 의도인 듯했다.
당연하게도, 걸려들지 않는다.
“호… 아무렇지 않나 봐?”
“사실은 죽었어야 하는 존재들이지. 알고 있다.”
“…뭐? 큭… 큭큭큭… 하하하하하!”
아카드는 뭔지 몰라도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길게 말하지 않을게. 내가 널 돕는 이유는 하나야. 내겐 말귀를 알아먹는 쓸만한 녀석이 필요해.”
“종이 되라는 거냐?”
“약간 다르지. 내가 네 후견인이 된다고 생각하면 돼.”
후견인이라….
하긴, 매혹조차도 수백에 달하는 수하를 오직 쓸만한 사역마를 늘리기 위해 외지로 파견하고 있으니.
“칠죄종이 지시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당장엔 그렇지. 하지만, 그건 할 수 있게 되면 되는 거니까. 말라시스로 가자.”
말라시스!
칠죄종의 본거지이자 지하에 파묻힌 거대한 왕국. 언더킹덤이라고도 불리는 에피소드 10장 이후에 등장하는 거점이다.
말라시스는 칠죄종의 본거지답게 미래 세대를 견인할 신진 마족을 육성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이렇게 야지에 나와 드문드문 찾아오는 모험가의 영혼을 집어삼키는 것보다는 훨씬 성장이 빠르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일찍 칠죄종 혹은 이 말라시스와 접촉하고자 했던 거다.
‘다만… 조금 씁쓸하군.’
마녀의 땅에 와서 얻은 거라고는 고작해야 마석 조금에, 고장 난 유물들.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퇴장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당장 가자는 얘기는 아니야. 제안이 하나 있거든.”
“제안?”
“들어보면 너도 구미가 당길 만한 내용일 거야.”
아카드가 차근차근 내게 하려는 제안에 관해 설명했다.
“이곳 동토에 들린 건 순전히 파우스트, 너 때문이야. 매혹의 계획도 알고는 있었는데, 네가 끼어들기 전까지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었고.”
왜 매혹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계획에 끼어들지 않기로 결정이 난 것 아니었나.
“마녀 사냥꾼 틈바구니에서 인간 행세하던 그자 말이야….”
“뷔트너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 뷔트너. 실패할 거야.”
“…뭐?”
“뷔트너의 계획은 실패할 거라고.”
“어째서냐? 혹시 정체를….”
“아니, 아니. 가장 중요한 관문이 남았잖아. 에켈라르트를 조복하려면 적어도 에켈라르트보다는 강해야지.”
그렇다면 설마, 뷔트너가 에켈라르트에게 패배한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되지도 않는 싸움에 머리를 들이미는 게….”
“이 계획이 낡아빠졌기 때문이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변한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동안 에켈라르트의 무위가… 상승했다는 말이냐?”
“그래, 아마도 초월자의 반열에 오른 것 같던데? 이제 막 문턱을 넘은 정도지만.”
초월자.
레메게톤에선 5성급 사역마들의 레벨이 최고점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벽을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들이 그 벽을 한 차례 뛰어넘는 순간 초월자라 이름 붙여진다.
조만간 업데이트될, 초월 시스템이다. 무슨 이런 중요한 시스템이 출시되고 나서야 업데이트되냐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다. 레메게톤이 망했던 이유 중 하나니까.
아무튼, 그렇다면 이 게임에 업데이트조차 되지 않은 초월자 타이틀을 지금 봉인된 에켈라르트가 달고 있다는 뜻이다.
“내 제안은 이래. 동토의 상황은 뷔트너의 계획대로 흘러가다가 중요한 순간, 급변할 거야. 뷔트너는 죽을 거고, 매혹 측에선 그의 죽음을 알아차리고 에켈라르트를 조복하기 위해 더 강력한 수하를 보내오겠지.”
빈틈.
빈틈이 있다.
“비는 시간이 있군.”
“맞아! 정보가 차단된 채로, 매혹의 수하가 이곳에 도달하기까진 적어도 일주일은 필요해. 이제 내가 뭘 원하는지 알겠지?”
“에켈라르트를 조복하는 것.”
“맞아!”
“직접 하면 되는 일 아닌가?”
“나나 아이타가 나서면 흔적이 남아. 꽤 뚜렷한 흔적이라 매혹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어.”
칠죄종끼리 어째서 서로를 견제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동료이면서도 서로를 의심하며 견제하는 게 그들의 관계다.
“내게 무슨 이득이 있지?”
“초월자인 에켈라르트를 조복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이득일걸? 그깟 마석보다 말이야.”
“어차피 매혹의 눈이 펼쳐져 있을 테니 쓸 수도 없는….”
“영혼의 가공을 거치면 가능하지. 그건 내가 도와줄게. 어때? 사실 이 계획의 마지막이 중요한데….”
아카드가 히죽 웃었다.
“네가 에켈라르트를 쓰러트릴 수 있느냐 없느냐가….”
“하지.”
아이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너 제정신이야? 용감한 줄은 알았지만, 무모한 줄은 몰랐는데. 아카드! 적당히….”
이 제안의 숨겨진 의도.
칠죄종 중 탐욕.
이건, 녀석의 마지막 시험이다.
“하겠다. 에켈라르트를 조복시켜 보지. 대신… 이 일에 성공한다면….”
아카드와 시선을 교차했다.
“그땐 날 네놈의 체스 말로 쓸 생각은 버려야 할 거다.”
“큭… 크하하하하하하!”
녀석이 미친 듯이 웃더니 눈을 빛냈다.
“그거야… 지켜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