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9
제9화
그래, 모든 것은 나, 파우스트의 계획대로다.
하나도 빠짐없이, 조금의 빈틈도 없이 침입자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운이 좋았다?’
아니, 냉정을 유지했기 때문…인가?
위기의 순간, 냉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운 검이자 믿을 수 있는 우군이다.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 본다면, 이쪽의 전력은 페넥스뿐이었다.
나는 튜토리얼의 전투 체험 후 무기력증으로 전투 불능, 루시퍼 역시 장거리 전이의 후유증으로 전투 불능.
고블린 한 마리만으로 저 모험가를 상대하는 것 역시 애꿎은 가용 자원만 낭비하는 셈.
그렇다면 역시 페넥스가 제격이기에 그녀를 곧장 출격시켰을 것이다. 페넥스의 개성인 【불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불굴은 초창기, 레메게톤이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6성급 악마의 개성을 줄 세웠을 때 가장 평가가 박한 개성 중 하나였다.
정체 모를 횟수 조건은 떡 하니 달려있지를 않나, 효과를 자세히 읽어봐도 해괴하기 그지없는 내용.
‘던전 수호가 주 컨텐츠인 게임에서 던전 수호 임무 진행 중 승리할 수 없는 사역마라니….’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개성이었다.
아무튼, 페넥스는 던전 수호가 발동한 이상 침입자에게 승리할 수 없었으니 침입자를 상대할 다른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현재 함정, 저주, 환경 등 던전 수호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미비했다.
잔치가 열린다는 소문만 듣고 손님이 너무 일찍 도착해버린 상황.
‘그래도… 어떻게 손님이 섭섭하지 않게 맞이했군.’
절름발이 아그네아.
썩은 뿌리 던전을 세 구역으로 나누었을 때, 하나의 구역을 차지하고 있는 중립 우두머리 중 하나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나는 이미 녀석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 위치까지도 특정해둔 상황이었다.
녀석의 거처는 던전의 심처에서 매우 가까웠고 덕분에 아직 답파하지 못한 다른 구역들 대신 수호 영역으로 끼워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침입자는 분명 아그네아와 마주치게 된다. 아니, 마주치는 것으로 모자라 서로 생사를 건 싸움을 하겠지.
그리고 예외 없이 침입자가 패배할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죽지는 않았군.’
숨은 붙어있는 모양이지만 침입자는 목 아래가 실로 뒤덮인 고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질긴 목숨도 얼마 안 가 끊어질 것처럼 보였고.
녀석은 이미 전투 불능이다.
던전 수호 임무는 끝이 난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이 있다.
‘…아그네아.’
아그네아의 말살이다.
녀석은 침입자와의 전투 중 거미집에서 떨어졌지만, 여전히 건재한 채로 페넥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덩치와 군세의 차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아그네아의 승리를 점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아그네아가 둥지에서 떨어지면….’
최대 체력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잃었다는 의미다.
물론 이마저도 저 레벨 구간에선 굉장한 수치일 것이다. 아직 성장의 제단을 답파하지 못한 상태라 1레벨이 고작인 지금, 단일 무력으로 아그네아를 쓰러트릴 수 있는 사역마는 6성 악마 중에서도 손에 꼽는다.
떠오르는 것은 역시나 열이 되지 않는다. 페넥스의 이름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그네아가 거미집에서 떨어진 후의 ‘절름발이’ 패턴.
즉, 저 거대한 거미가 2 페이즈에 진입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앞선 괴물 6성 악마들의 이름 옆에, 몇 개의 이름이 더 떠오른다.
페넥스.
그녀의 이름 역시도.
‘페넥스….’
그녀의 이름은, 분명 그 대단한 이름들과 같은 선상에 있다.
원거리 격추 기술이 없는 투박한 스킬셋. 그러나 분명 담백하고 우직하다.
“페넥스, 내게 보여봐라.”
– …….
“네가 악마라는 걸.”
저 너머에서, 화답한다.
질끈…
– 응, 나리!
* * *
[페넥스의 기본 능력: 타오르는 불꽃이 발동합니다.] [페넥스는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지속해서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잃은 생명력에 따라 효과가 증가합니다.]화르르륵…
페넥스가 이글거리는 전신 갑주를 입은 채로 절름발이 아그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치러야 하는 전투는, 파우스트와의 계약 이후 첫 번째로 맞이하는 중대한 싸움이었다.
“후우… 후우….”
그녀가 이곳에 오기 전, 파우스트는 전황을 지켜보며 페넥스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 재생의 화원이 아직 잠들어 있다. 이 말은 한 번의 패배가 곧 죽음이라는 말과 같다.
실패하면 죽음.
간담이 서늘해지는 경고였지만, 그녀에게는 오래전 스승이 당부하듯 남긴 말들이 기둥처럼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 검을 뽑으면, 그 순간부터 죽음을 그려야 한다. 적수의 죽음, 혹은… 너 자신의 죽음을. 빼앗고자 하면 뺏길 수도 있다는 건 간단한 이치니까, 어렵지 않지?
그래, 검을 뽑으면 죽을 수 있다.
그녀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구할 때 검을 쥐는 법과 함께 가장 먼저 배운 것이다.
죽음이라는 건, 소나기처럼 불현듯 찾아온다는 걸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다.
“후우….”
이 모든 걸 이해하고 있음에도 숨이 벅차다.
– 키이이이!
간격을 두고 아그네아가 침이 질질 흐르는 입으로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페네스는 그제야 자각할 수 있었다.
그녀가 긴장하고 있음을.
싸움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죽는 게 무섭지 않은데도,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덜덜…
손이 떨렸다.
…알았다.
이것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모처럼, 찾아온 보금자리니까.
“지켜야 해.”
페넥스는 전투에 임하기 전 오래전 얼어버린, 그녀의 스승을 떠올렸다.
– 무장은 각오다. 단단히. 투구는 꼭 챙겨라, 네 밤톨만 한 머리통이 한 번에 두 쪽 나지 않게 해준다. 자, 어떻지? 너는 이제 누구보다 단단해졌다.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아.
‘투구는 못 챙겼는데!?’
툭툭…
철갑 대신 머리칼이 만져진다. 세월을 거치며 그녀의 무장은 점차 가벼워졌다.
철갑은 줄었지만, 용기는 늘었다.
“무장은… 각오.”
그래, 각오를 다지고 검을 뽑는다.
스르으으응…
발검과 동시에 발동하는 페넥스의 두 번째 기본 능력.
[페넥스의 기본 능력: 열기 전이가 발동합니다.] [페넥스의 기본 공격이나 능력에 피해를 받으면 적은 불씨 상태가 됩니다.] [불씨 상태의 적은 30초 동안 최대 체력이 15%에 해당하는 화염 피해를 입습니다.] [불씨 상태의 적은 사망하면 화염에 휩싸이며 주변에 불씨를 전이시킵니다.] [불씨가 전이된 대상은, 불씨의 지속 시간이 갱신되며 사망한 대상의 남은 화염 피해를 짊어집니다.] [기본 능력: 열기 전이는 기본 능력: 타오르는 불꽃에 영향을 줍니다.] [불씨 상태에 있는 적 하나당, 타오르는 불꽃의 생명력 회복 효과가 강화됩니다.]“큰 거미….”
– 키이이이이!
“쓰러트린다.”
파아아앗-!
그녀가 움직이자, 절름발이 아그네아의 두 번째 패턴이 시작된다.
– 키이이!
[아그네아가 점 찍기를 사용합니다.] [지정한 범위에 찌르기 일격을 가합니다.] [대상이 방어하거나 피해를 받으면 1회의 추가타가 발동합니다.]쒜에엑…
콰아아아아앙-!
아그네아의 앞다리가 페넥스가 머물렀던 자리를 강하게 짓이겼다. 암석이 부서져 튀어 오를 정도니, 이 거대 거미의 앞다리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 보는 것만으로 짐작이 갔다.
휙-!
페넥스는 그대로 뒤로 훌쩍 물러나 상황을 살폈다.
– 키이이…
아그네아는 그 자리에 머무르며 페넥스를 경계하며 앞다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나리의 말대로야.’
– 아그네아는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네가 접근하는 걸 기다릴 거다.
– 하지만… 나리, 나는 파고들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데?
– 파고들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확실한 순간을 만들어라.
끄덕…
‘접근은 확실할 때만.’
파우스트가 남긴 당부의 말은 이것으로 끝. 분명, 김서진이자 파우스트인 그는 이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아그네아의 정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보를 온전히 페넥스에게 넘기지 않았다. 그래선 의미가 없기에.
앞으로 닥쳐올 모든 시련을 그런 식으로 돌파했다간,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힐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는 아그네아 공략의 실패를 가정하지 않았다. 페넥스를 믿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이 정도쯤은, 해낼 수 있다고 판단한… 파우스트 자신을 믿어서다.
하지만 이후의 결과는 미지의 영역이다. 어쩌면 파우스트가 가진 비범한 능력 중 하나인 【냉정】이 위험한 판단을 내린 것일지도.
다다다닥…
페넥스가 전황을 살폈다.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
그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타고난 재생력은, 저렇게 흉악한 무기를 가진 마물을 상대로는 크게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아그네아의 앞다리가, 그녀가 재생하는 것보다도 더 빠르게 육체를 파괴할 테니까.
이렇게 되면, 조금 돌아가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수적 열세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으로.
– 키이이이!
– 키이이!
수십여 마리.
성체가 아닌, 덜 자란 새끼 거미들이 사방으로 포진해 페넥스를 감쌌다.
그녀의 불길을 경계해 섣불리 다가오지는 못하지만, 어쩐지 그 수가 점점 불어나는 것 같았다.
[아그네아의 기본 능력: 산지직송이 발동합니다.] [전투 시작 후, 20초마다 2개의 실고치가 깨집니다.]그 예감은, 사실이었다.
‘수를 줄여야 해!’
제아무리 페넥스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곳은 던전이다.
계약자의 던전 코어로부터 건네받은 정해진 마력만을 사용해 현현하는 곳.
그녀는 페넥스의 이름을 짊어지고 이곳에 소환되었지만, 아직은 지옥에서 쌓았던 힘을 극히 일부만 사용할 수 있었다.
허탈한 최후가 찾아올 수 있다.
꿀벌들이 달라붙어 날갯짓하면, 말벌이라도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한 마리!”
피이이이잉-!
서걱!
“둘! 읏!”
피이이잇!
서걱!
보람도 없이, 금방 빈 자리를 새로운 새끼 거미가 채웠다.
힐끗…
반면, 새끼 거미들을 거느린 아그네아는 추락 장소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대신…
[아그네아가 산성 맹독을 사용합니다.] [매우 빠른 맹독 오염 물질이 대상을 향해 쏘아집니다.] [대상에게 강한 산성 피해를 입힙니다.]촤아아아아아악-!
종종, 원거리에서 산성 액체를 뿜어냈다.
“으읏!”
산성 액체는 굉장히 빨랐지만, 집중만 하면 못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새끼 거미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의 회피이기에 어려움이 따랐다.
새끼 거미들이 다시 아그네아의 앞에 두꺼운 벽을 쌓아 올렸다.
이 모습을 본 페넥스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새끼 거미들은 어째서 아그네아를 보호하는가? 어쩌면 처음의 공격만 제대로 막아내면, 그 이후엔 아그네아가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은 곧 행동으로.
파아아아아앗-!
“비켜!”
촤아아아아악-!
화르르르르르르륵!
불길에 겁을 먹었음에도 아그네아를 보호하기 위해 앞을 막아서는 새끼 거미들.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바쁘다고!”
촤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장벽을 통과해 아그네아의 앞에 선 그녀.
예의, 그 앞다리가 그녀를 반겼다.
후우웅…
믿을 수 없는 속도.
내려찍는 거대한 힘.
콰아아아앙-!
“끄으으….”
[아그네아의 점 찍기를 방어했습니다.] [추가타가 발생합니다.]후우웅-!
콰아아아아앙!
“으그극….”
막았다.
막아냈다!
‘이번엔 내 차례…!’
퉁-!
그녀는 앞다리를 튕겨내고 곧장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이 앞 다리! 베어버리면 그만….’
쒜엑-!
카아아아앙-!
청명한 울림과 함께, 강철과 강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