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97
제97화
저벅…
저벅…
‘기이하군.’
방금까지 눈앞에 살아있던 자가 병기가 되어 돌아오다니.
‘…악마의 힘이라 이건가.’
칠죄종 중 탐욕은, 마족의 일곱 혈통 중에서도 무를 숭상하는 성향이 강하다. 애초에 혈통 자체가 그쪽 계통이니,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발달한 거겠지.
그 탐욕의 이인자가 거느리고 다니는 악마이니 능력 역시 특출난 걸지도.
‘칼집을 등에 메는 형태인가?’
호수처럼 허리춤에 메야만 했다면, 조금 불편했을 것 같다. 이런 쪽에서도 내 염원이 반영된 것 같다.
은은한 광채를 발하는 은색의 칼집. 칼집을 부여잡고, 도를 뽑았다.
스르으으으응-!
청아한 울음과 함께,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는 도신이 드러났다. 각진 형태의 칼날은 물론이고 손잡이에 장식으로 조각된 해골이 인상적이다.
후우우웅…
칼을 쥐자, 이것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흐음….”
촤아아아악-!
검을 뿌리자, 검로 전체가 얼어붙었다.
쩌저저저저저저적-!
‘순수한 냉기를 머금었으니, 이건 당연할 테고….’
스으으…
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후우우우우우웅…
자색 기운이 여기저기서 칼날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슨….”
“생기가….”
알았다.
이 자색 기운이 무엇인지.
‘다른 이의 생기를 빨아들이는 칼인가.’
그 생기는 내게 전해져, 칼을 몇 번 휘두르고 앓아누웠던 지난날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보다 이 생명력… 대체….’
아카드에게서 흘러나오는 생기는, 다른 이의 수십 배는 되었다.
“거기까지.”
철컥-
어느 순간, 시퍼런 칼이 칼집에 들어가 있었다.
‘…무슨 수를 쓴 거지?’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내가 직접 납도했다기엔 스스로의 움직임을 인식조차 못 했다.
‘이게 칠죄종인가….’
도무지 같은 마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비슷한 건 뒤집어쓰고 있는 껍데기뿐인 듯했다.
“뽑는 것만으로 생기를 빼앗는 칼이라….”
아카드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아이타가 불쑥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내 거랑 바꿀래? 내 것들 보여줄까?”
“…아이타.”
“역시 안 되겠지? 알았어, 아카드. 내버려 둘게.”
철컥…
칼집을 등 뒤로 넘겨 메고 물었다.
“내게 줘도 되는 건가?”
“네가 이룬 일의 보상을 네가 가지지 못하면 안 되지. 뭐… 다른 칠죄종들이라면 나와는 다른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음흉하게 웃는 아카드.
“여기서 널 제거한다든지, 힘으로 굴복시킨다든지 하는…. 내가 그런 눈앞의 잇속만 챙기는 자가 아니라는 것만 알아둬.”
깔끔한 거래.
아니, 사실 아카드 쪽은 물가에 내놓은 애가 잘 노는지 계속해서 신경을 써야 했었을 테니 명백히 내 쪽에 균형이 치우쳐진 거래였다.
“고맙군, 잘 쓰지.”
뭐, 녀석도 뇌물이라 했으니 나도 따로 신경 쓰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름은 정했나?”
“이름이라….”
동토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백이 넘는 인원이 이 사건에 휘말려 전멸, 마녀의 땅엔 이제 마녀도 마녀 사냥꾼도 없다.
“설원. 설원이 좋겠군.”
아무것도 없는 설원.
이 칼의 이름이다.
“좋은 이름이네. 음!”
아이타의 감상평 다음, 아카드의 당부가 뒤따랐다.
“흔적을 지우고 며칠 뒤에, 이곳을 뜰 테니 그 안에 준비를 마쳐두라고. 지체하면 음욕에게 꼬리를 밟힐 테니.”
* * *
마녀의 땅에 아직 남은 일이 있어, 에니스와 함께 설원을 이동했다. 루비와 세 거인, 그리고 빌이 날 호위하고 있으니 혹시 모를 사태가 일어날 걱정도 덜었다.
아직 이곳, 마녀의 땅에서 매듭지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몸 상태가 나쁘지 않군.’
전이었다면 에켈라르트와 전투를 치른 것만으로도 일주일은 앓아누워야 정상이었을 것이다.
‘생기를… 빨아들였기 때문인가?’
특히나 다른 이들은 제쳐 두더라도 아카드, 그의 생기를 빨아들인 게 큰 듯했다.
‘일단 이번엔 몸이 멀쩡해서 다행이지만… 아군의 생기는 빨아들이지 못하도록 컨트롤해야겠어.’
칼을 뽑았다가 아군과 적군 모두가 쓰러진다면, 그것만큼 우스운 꼴이 없을 것이다.
“저기, 보여?”
“봉우리를 말하는 거라면 보인다.”
“저긴 것 같아.”
“…가지.”
입을 꾹 닫고 이동해야 할 만큼 길이 험난했다. 한동안 관리를 안 한 것인지, 길 위에 눈이 쌓여 있어 천천히 이동해야만 할 정도.
다행인 건, 춥지는 않았다.
설원의 손잡이를 쥐니 한기가 침범하지 않는 듯했다. 아마도 설원이 가진 힘 중 하나겠지.
에켈라르트의 조복이 실패한 것이 어쩌면 다행인가 싶을 정도로 이득인 부분이 많았다.
설원이 취한 것은 에켈라르트가 남긴 마력일 뿐, 그의 영혼은 나의 심장과 공명하는 던전 코어에 흡수되었다. 덕분에 마력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다.
초월자의 영혼을 먹어 치웠으니 괴물 같은 파우스트의 몸은 또 한 번 더 진화했을 것이다. 전보다는 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에켈라르트와의 일전을 떠올리면서, 가장 충격적인 게 무엇이었냐고 되돌아보면 페넥스가 보여준 힘이었다.
‘화룡점정이라… 처음 보는 능력이었지?’
그건 페넥스의 스킬셋에는 물론, 공용 화염 스킬셋에도 존재하지 않는 능력이다. 만약 서버가 종료되지 않고 지속됐다면 등장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가정일 뿐.
즉, 페넥스는 게임에 없던 능력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기뻐하는 동시에, 덜컥 불안해지기도 했다.
‘이런 게 페넥스만 가능할 리 없어.’
페넥스가 해낼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도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만약 그걸 적이 해낸다면… 상당히 골치가 아플 것이고.
‘아니… 어차피 이제 이제 내가 알던 레메게톤의 역사는 거의 끝나간다.’
파우스트가 말라시스에 도달한 후, 몇 번의 에피소드가 내가 아는 전부다.
애초에 이 게임, 그렇게 진도를 많이 빼지도 않았다고. 모든 게 수수께끼인 상황에서 끝이 났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미래시에 의존할 수도 없다.
‘동토에서 마주쳤어야 하는 스칼라도 본 적 없으니….’
미래든 현재든 상당 부분이 달라진 느낌.
‘그런데… 내가 알던 서버 종료 시점이 되면 어떻게 되지?’
업데이트는 끝이 나나?
픽업 일정은?
혹은 이 세계 자체가 사라지는 건가?
‘모르겠군….’
어차피 얼마 안 지나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여기다! 찾았어!”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한 문이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다.
“특별한 저주는 없어 보이는데… 끊을 수 있어?”
“비켜라.”
스르으으응…
카아아아아앙-!
설원을 벼락같이 뽑아 휘두르자, 자물쇠가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투둑…
철컥…
‘좋군.’
칼의 베는 맛도 그렇고 무게감이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마력이 대폭 늘어난 덕분에 괜히 몸이 퍼지는 거 아닌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느낌이다.
끼이이이익…
“들어가자.”
루비와 빌은 함께 움직였고, 세 서리 거인은 밖에서 주변을 주시하게 했다.
“윽….”
냄새가 영 좋지 않았다.
무슨 냄샌가 싶어 확인하니, 에니스가 대신 말해주었다.
“저주를 개발하는 데 사용된 주물들이야. 작은 생명이 주로 쓰이는데… 영 맞지 않으면 그대로 썩혀서 독으로 만들기도 해.”
“썩은 내였군.”
“냄새가 독개구리 같은데. 이 근처에선 드문 건데.”
이곳의 규모는 청색 마녀단의 보물고와 비슷했다.
“저기 마석. 챙겨갈 거지?”
“…그래.”
최상급 마석은 두 상자.
나머지는 역시 자잘한 등급의 마석들.
그래도 청색 마녀단에서 얻은 마석들과 합하면 웬만한 점포 규모의 마석량이었다.
‘음?’
괴상하게 생긴 인형에 시선이 끌려 손을 가져가다가, 도중에 멈추었다.
스르르륵…
백색 마녀 페슈아가 남겨놓고 떠난 팔찌 유물. 주변에 독이 있음을 경고해준다고 들었었다.
다행히,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았다.
“함정인가 봐,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아 보여.”
“그러지.”
에니스가 이것저것 정리하며, 내가 챙길 만한 것들을 궤짝에 담아주었다.
“에니스, 넌 떠날 건가?”
“…….”
이곳에서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것 중 하나. 에니스의 거취다.
“맞아.”
그녀가 날 슥- 돌아보고 말했다.
“마녀도, 마녀 사냥꾼도 모두 죽었잖아? 그러니까 그 누구도… 내가 마녀라는 걸 모르겠지? 너희랑… 나만 아는 거니까.”
그러면서 입을 슥 가리고는,
“아, 네가 누구인지는 어디 가서도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사실은, 너희의 진짜 정체가 뭔지도 잘 모르는걸?”
“…방금 그 말이 널 살렸다.”
“뭐? 풋… 큭… 설인인 줄 알았는데 농담도 할 줄 아네?”
상황에 적절한 대사긴 했으나, 농담이었는지는 확신이 안 든다. 가끔 파우스트의 감정은 딱딱하게 굳은 덩어리를 만지는 것처럼,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아마 농담이었을 것이다.
“응?”
“왜 그러지?”
“여기… 궤짝 하나가… 끄응….”
비밀스러운 공간에 숨겨져 있던 작은 궤짝. 저주가 잔뜩 적힌 천으로 휘감겨 있다.
“기다려 봐, 자색 마녀가 아니라도 마녀단이라면 이 정도는 풀 수 있어.”
후우우우웅…
에니스가 중얼중얼하며 천에 담긴 저주들을 차례차례 무력화했다.
철컥…
궤짝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적당한 크기의 책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건….”
에니스가 먼저 자세히 살펴보고는 내게 책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해줬다.
“꼭두각시의 술이야. 자색 마녀의 비전….”
“꼭두각시라면 나와는 관련이 없군.”
“달라, 꼭 꼭두각시를 부리지 않더라도 자색 마녀의 꼭두각시 술은 최면이나 세뇌술의 극한에 다다른 비전이라고. 굳이 꼭두각시로 만들 필요도 없다고 해도 활용 방법이 무궁무진하니….”
툭.
녀석이 궤짝에 책을 집어넣었다.
“챙겨둬. 나보단, 네가 가져가는 게 좋겠어.”
“…그러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다.
“가자, 근처에 꼭두각시들을 모아놓은 곳이 있어.”
그녀의 말대로, 꼭두각시들을 모아놓은 창고와 흡사한 목조 건물이 있었다.
“자물쇠가 열려 있…네?”
“…물러나라.”
에니스를 뒤로 물리고 직접 꼭두각시들을 모아놓은 창고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죽었군.”
창고에는 시체들뿐이었다.
얼어붙어 딱딱하게 굳은… 부패도 할 수 없는 시체들.
다양한 종족들이 대략 열쯤… 모두 한데 뒤섞여 죽어 있었다.
“전투에 쓰일 수 없는 자들만 남겨둔 거군.”
“…그래도 출정 전에는 숨을 끊은 것 같아. 이들에겐 다행이려나…?”
에니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불태우자.”
“그러지.”
이 건물 채로 태워버리는 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묻어줄 만큼의 의리도 없으니, 화장이라도 해주려는 의도다.
그래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으면 장례보다는 소각처럼 보일 테니 시체를 끄집어내 한 줄로 눕혔다. 혹시 의복에 뭔가 폭발할 수 있는 물건이 있을 걸 우려해 간단하게 몸을 두드리며 수색하는데,
툭…
‘…뭐지?’
자세히 보니 마족의 시체였다.
마족… 남자, 한쪽 눈이 의안인 자.
품속에서 꺼내든 건 쪽지와 몇 방울 고작 들어갈 정도의 작은 유리병이었다. 유리병 안에 있는 액체는, 이 날씨에도 얼지 않았다.
스륵…
쪽지의 첫 문장을 확인했다.
– 드디어, 폭식의 피를 훔쳤다.
마족… 남자…
이건….
‘칠죄종… 폭식의 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