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99
제99화
“샌드웜인가?”
“비슷한 조상을 뒀을걸? 운 좋게 새끼때 얻은 거라 내 말을 잘 따르지.”
“지금 저 친구 입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 네 말대로 잘 따랐으면 좋겠군.”
살짝 악취가 나는 듯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지하실 정도의 퀴퀴한 냄새다. 참을 만하다.
지이이잉…
땅벌레의 위장에 신기하게 생긴 문이 있었다. 그러니까, 생명체의 위장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문이라고 해야 하나….
“들어가자.”
“이것도 가계낭의 일종인가?”
“비슷한 원리지.”
끼이이익…
문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산장의 내부가 나타났다.
“멀미는 하지 않겠군.”
“차라도 마실래?”
루시퍼가 훅 하고 다가오더니 물었다.
“무슨 차가 있습니까?”
“어… 편하게 골라봐.”
“제가 내려드리겠습니다. 모두 앉아서 대기해주시길.”
루시퍼가 차를 우리고 있는 사이, 탁자에 앉아 아카드와 대화를 시작했다.
“매번 벌레를 이용해야만 하는 건가?”
“그럴 리가. 이번엔 마침 가까운 곳에 있어서 미리 불러둔 거고, 먼 거리에 있으면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편이지. 뭣하면 전이도 쓸 수 있고.”
“전이는 왜 선택지에 없었지?”
“이번 경우엔 힘들지~. 말라시스에 내 전이 흔적이 남을 테고, 탐욕과 함께 전이한 마족이 누구인지를 다른 칠죄종의 간자들이 찾아내려 할 테니까.”
“연결고리가 없게 하겠다는 거군.”
“정답.”
달그락…
루시퍼가 나와 악마들, 그리고 아카드와 아이타에게 차를 대접했다.
후루룩…
“뜨하아아아….”
“한 번에 다 마시지 말라고 저번에도….”
한쪽에선 루시퍼가 페넥스를 훈계했고, 다른 이들은 차의 향기에 집중했다.
“내가 말라시스에서 뭘 하면 되는 거지?”
“큰 틀은 전부 알려줄 거야. 하지만 당장에 뭘 해야 할 필요는 없어. 요인 암살이나 공작을 기대했다면 미안하게 됐지만.”
그런 임무를 맡길 만한 녀석이라면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녀석은 다른 칠죄종에게 정체가 노출되지 않은 나를 굳이 찾았으니,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
“우선 네가 말라시스에 자리를 잡는 게 먼저겠지. 자, 이걸 받아둬.”
“…양피지군.”
“위조된 신분증명서야. 몰락한 아르칸드 가문의 남작.”
“그래도 귀족 신분이라니, 황송하네.”
“기본적으로 마족 사회는 계급이 최우선이야. 힘을 숭상해 출세의 기회가 열려있다는 점에서 제국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고.”
확실히, 귀족의 신분으로 활동하는 편이 나중에 일을 더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르륵…
양피지를 펼쳐 읽자, 순식간에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가문의 계보부터 이전 토지, 가보까지.
“아르칸드 가문의 행방불명됐던 어린 가주라… 녀석이 훌륭하게 성장해서 말라시스를 찾아왔다는 느낌인가. 내 나이대의 청년이 가주라면….”
“맞아, 아르칸드 가문은 멸문했어.”
“왜지?”
“이것저것 복잡한 게 얽혀 있지.”
“만약 다른 아르칸드의 후손이 나타나면? 내 정체가 들키는 것 아닌가?”
“그럴 일은 없어, 확실하게 다 죽였거든.”
“…뭐?”
아카드가 히죽 웃었다.
“아르칸드를 멸문시킨 게 나니까.”
“…정치적인 이유겠군.”
“오호… 거기까지는 바로 알아채네.”
“네가 쓸데없이 원한 같은 거에 발목 잡힐 녀석이 아니라는 건 몇 마디만 나눠봐도 알 수 있다. 덕분에 걱정은 덜었군.”
이제 진짜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칠죄종은 분열됐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나를 외부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쓰이는 칼보다는 내부의 적을 찌르기 위해 쓰는 단도로 쓰려는 생각인 것 같아서.”
“분열이라고 하기엔 뭐한데, 냉전인 상황이야.”
“어째서지?”
“가장 큰 이유는, 마왕의 자리가 공석이기 때문이지.”
“흐음….”
“선대 마왕 이후로, 일곱 가문… 칠죄종에서 다음 마왕이 추대되었었는데 솔로몬의 정복 전쟁 이후로는 꽤 오랜 기간 마왕의 자리를 비워두었어.”
“그럴 겨를이 없었나 보군.”
“맞아.”
그런데 지금 와서 서로 눈치를 본다는 얘기는….
“살 만해졌나?”
“하하하하하! 정답! 마왕은 기본적으로 모든 마족의 어버이니, 칠죄종 역시 마왕의 산하로 들어가게 돼. 그러니 권력에 욕심이 있는 자들은 계속해서 마왕을 옹립하자는 압박을 해오고 있는 거고. 사실… 구심점이 필요한 시점이긴 해.”
“구심점이라….”
“인류와의 전쟁에서 패퇴했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 명맥을 이었고 이젠 반대로 제국에서 솔로몬의 행방이 묘연하잖아? 승천했다는 얘기도 있고… 전세를 뒤집는다면 우리 세대가 아닐까 싶은 거지.”
“말라시스의 전력은… 강한가?”
“…어떨 것 같아?”
아카드가 음흉하게 웃었다.
* * *
말라시스에 진입하기 위해선, 몇 가지 관문을 거쳐야 했다.
우선 지하를 떠돌아다니는 왕국답게, 출입구 역시 지하에 있다.
5개의 외문, 3개의 내문, 1개의 정문.
외문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내문과 정문이 봉쇄된다. 반면, 외문에서 문제가 없었다면 내문과 정문 역시 크게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다.
말라시스와 한참 떨어진 곳에서 땅벌레에게 뱉어진 우리는, 탐욕이 건넨 신분증명서 하나만을 믿고 외문으로 향했다. 몇 번 사용했던 좌표인지, 지하에도 길이 나 있었다.
‘아무래도 상상이 안 되는군. 여기가 말라시스라고?’
원작에서 말라시스는 마족의 거대한 왕국 하나를 통째로 옮겨놓았다는 묘사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외문의 규모만 봐서는 기껏해야 산적의 은신처 정도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뭐, 겉으로만 평가하는 건 의미가 없긴 하지.’
– 크르르르르르…
거대한 늑대.
얼마나 거대하냐면, 다리를 쭉 폈을 때 3층 건물쯤 되어 보이는 크기였다.
‘문지기 사역마군.’
말라시스는 사역마와 던전 키퍼, 그리고 마도 공학의 천국이다. 사역마를 군견처럼 활용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는 얘기.
외문이 다섯 개나 되다 보니, 내가 찾은 외문은 한산한 편이었다. 짐마차 몇 개가 우르르 외문 안으로 들어가고, 다음에 내 차례가 왔다.
“오호라… 으흐흐, 어디서 인간 노예들을 잔뜩 데려왔군그래.”
“사역마다. 인간도 아니고.”
“인간이 아니라고?”
“요마족이다.”
요마족은 요정과 마족의 혼혈이다.
전에는 마족 사회에서 천대받던 종족이지만, 인간의 정복 전쟁 이후에 패퇴한 마족과 요정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면서 주류로 급부상했다.
– 악마들의 신분은 요마족이 적당할 거야. 인간 사역마는 말라시스 어딜 가든 관심을 끌 거라.
대륙의 모든 종족은 사역마 계약을 할 수 있는데, 말라시스에서 거리를 다니기만 해도 관심을 끄는 사역마를 꼽자면 마족과 인간일 것이다.
마족은 동족을 사역마로 부리는 행위를 경원시하기 때문이고 반대로 인간은 혐오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시민권.”
“신분증명서가 있다.”
“그거 말고, 규격화된 거 없어? 관리청 인장 박힌 거.”
“이번 방문에서 발급받도록 하지.”
스윽…
신분증명서를 챙겨가는 다른 경비병.
“정말로 노예가 아니란 말이지?”
스으읍…
경계병이 불쾌할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다.
– 크르르르르…
경계를 맡은 늑대 사역마가 내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으르렁거렸고.
‘안 되겠군.’
이목을 끄는 건 질색이지만, 어쩔 수 없다.
휘오오오오오오…
“…내 시간을 빼앗을 생각인가?”
군주의 위압감을 끌어올리자, 주변 경비병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윽…….”
“시, 심장이….”
“큭….”
제멋대로 이빨을 드러내던 사역마 역시도, 위압감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 끼이이잉…
납작 엎드려 혀를 내미는 늑대 사역마.
초월자의 영혼을 잡아먹은 코어.
당연하게도 위압감의 수준 또한 한차례 진보했다.
“흐흠….”
경비 조장이 다가와 눈치를 줬다.
제법 실력이 있는 자다.
경비 조장이 슬슬 뭘 모르는 불쌍한 부하들을 놓아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스으으으으…
“허억… 허억….”
“꾸웨에엑… 허억….”
“이게… 헉… 대체….”
경비 조장이 신분증명서를 살펴보며 말했다.
“흐흠… 귀족 나리셨군. 미안하게 됐소. 얼마 전부터 노예 상인들이 자주 왕래해서 말이야. 부하들이 제멋대로 군 건 사과하겠소.”
“통과인가?”
“증명서에 문제는 없었으니, 통과요. 내문에는 미리 기별을 넣어둘 테니, 별문제 없이 통과하게 해주겠소.”
“고맙군.”
꼭 실력 행사를 해야 대우가 달라지는 건 인간이든 마족이든 같은 모양이었다.
“요마족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모양이군.”
“저자가 특이한 걸지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귀찮은 일에 엮이는 건 사양이니.”
“아카드가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테니, 사실이겠지.”
아카드가 건네줬던 반지의 성능은 상당했다. 반지는 마기를 억누르는 것뿐만 아니라 생체 정보를 왜곡해 마족들이 보유한 각종 측정 마도구에도 진짜 정체가 발각되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도 그 성능을 확인 했으니, 이것 역시 사실이겠지.
철커어어어엉…
내문을 지나고, 정문으로 향하는 길.
“그렇군.”
“안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구조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거지?”
처음 외문 앞에 깔린 대로와는 달리, 정문 앞의 길은 그 규모가 엄청났다. 정문 꼭대기에서 우리를 내려다봤으면 점처럼 보일 게 뻔할 정도로.
“말라시스라….”
– 통과!
정문은 이미 벌어져 있어서 그 틈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후우우…
정문을 통과하자, 산뜻한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시원하게 뚫려있는 하늘.
그곳으로 비추는 별 무리와 달.
지상엔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불빛과 건물들. 곳곳에 우뚝 솟은 위엄 있는 건축물들이 눈에 띄었다.
– 끼이이이이이익…
창공을 날아다니는 기상천외한 생김새의 괴조들. 하나같이 마족보다도 더 큰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가….”
“말라시스, 별들의 안식처.”
“마족 최후의… 낙원.”
감상에 빠져있는 건 우리뿐, 모두 갈 길이 바쁜 듯 주변을 채근했다.
“비켜! 길 막고 있지 말고.”
“요마족들은 경우가 없는 건지 참….”
푸르르르…
갈기가 불꽃처럼 일어난 말 형태의 사역마.
– 그으으으어…
쿵…
쿵…
수레를 끄는 오우거.
“묵을 곳이 없다면, 주인님의 여관으로 오세요! 특별히 싼 방이 있어요!”
빵모자를 쓴 말하는 너구리 사역마까지.
“나 여기 좋아!”
“나, 나도….”
페넥스와 이포스가 상당히 들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사역마들의 천국이었다. 온갖 희귀해 보이는 마물을 비롯해 솔라리아의 모든 종족이 한자리에 모인 것처럼 셀 수도 없는 다양한 종족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마도 공학과 함께 어우러져 감탄이 나올 만한 경치를 만들어냈다.
띵띵띵-!
마력 엔진으로 철로를 따라 움직이는 작은 전차까지.
“소란스럽구나….”
“그간 너무 조용했던 걸지도.”
궁벽한 산골에 파묻혀 살다가, 도시의 소란스러움을 처음 경험한 느낌이다.
곳곳에 검은 머리와 검은 동공이 잔뜩 보였다.
“내 사역마는 잠자리에 꼭 모래가 필요한데, 괜찮은 곳을 아나?”
“그건 저쪽으로 가시면….”
……
“이건 사기야!”
“이러지 말고 차분하게 대화를….”
……
모두 마족이다.
나도 모르게 안심했다.
마족을 혐오하고, 거리낌 없이 죽이는 이 끔찍한 세계…. 이 가혹한 세상과 맞서는 게 나뿐만은 아니구나.
나는 지금, 말라시스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