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0)
화내지 말자, 흥분하지 말자.
지금 이 세상은 나의 세상이 아니다.
흥분할 이유도, 답답해할 이유도 없다.
그러면 뭐 하나.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따끔하게 혼을 내고 싶은 대상, 정훈이 놈은 나로 인해 이 몸에 있지도 않은 상태인데.
김원호 차장에게 허락을 받고 사무실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과장님!”
정 대리가 날 따라 나왔다.
“지금 퇴근하시는 겁니까?”
“네, 보니까 제가 할 일도 없는 거 같고… 그래서 먼저 가 볼까 합니다.
“저기, 과장님. 그럼 잠깐, 진짜 잠깐이면 되는데,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될 이유가 뭐가 있겠나.
오히려 난 고맙지.
분명 이곳 재경은 내가 만든 세상인데, 더 이상 이곳엔 내가 있을 곳이 없다.
이것만큼 비참하고 속이 쓰릴 수도 없는 거고.
“지하 주차장으로 가실 거죠?”
“아뇨. 그냥 잠시 좀 걷고 싶기도 하고… 차는 두고 움직일 겁니다.”
“그럼 2층 미팅실로 잠깐만 좀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
“다른 사람들 보는 데서 하기보단 과장님과 단둘만 있는 자리가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럽시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2층이든, 3층이든 같이 가 봅시다.”
전체 창으로 건물 밖, 서울의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아주 세련되고 근사한 회의실이었다.
그곳에서 정 대리가 내게 흰 봉투를 하나 건넸다.
“이건 뭡니까?”
“아까 과장님 댁에서 받은 돈입니다.”
* * *
어제와 같네요
내게 받았던 돈을 다시 내 앞으로 내밀며 정 대리가 말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순간 너무 큰돈을 주겠다 하셔서 그 이야기를 듣고 정상적인 판단을 못 했습니다.”
정현수 이 친구 이거….
“그리고 과장님 댁에서 돈을 받을 때도, 제가 잠시 미쳤던 거 같습니다. 천만 원이라는 돈에 제가 제 양심과 자존심을 너무 쉽게 팔아 버린 거 같습니다.”
“양심과 자존심? 나는 이 돈을 정 대리한테 주면서 분명 나쁜 짓을 부탁한 게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든 억지로 그 봉투를 내 손에 쥐여 주며 정 대리가 말했다.
“네, 과장님께서 저한테 하신 부탁들은 분명 나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탁을 돈을 받고 들어드리는 건 분명 문제가 있는 겁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오늘 제가 정 대리에게 보여 줬던 모습, 그리고 저에게 문제가 생긴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몰랐음 한다고.”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저는 오늘 과장님의 다른 모습을 저만 알고 있을 것이고,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강단이 확실한 놈이다.
눈빛도 살아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늘처럼 과장님께서 제게 뭘 물어보시거나,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시면 최선을 다해 알려 드리고 또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돈은 왜 돌려주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그렇게 하고 싶은 건 이 돈과는 상관없이 제가 인사부 소속이기 때문이고, 과장님은 저의 부서 상사이시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회사 직원들의 개인적인 사정, 비밀, 가족 관계 및 금전적 문제에 관한 내용을 비밀로 유지하는 건 바로 인사부의 책임이고, 또 인사부의 역할입니다.”
“흠….”
“저는 그 책임과 역할을 당연히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과장님도 회장님 아드님이신 걸 떠나 이젠 재경모직의 직원이시니까요. 그리고 전 인사부 HRM의 대리이고요. 제가 순간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그 선택이 실수가 되고, 잘못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내가 오늘 실수를 참 여러 번 하네.”
“…네?”
그래, 태산이에게도 전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호텔로 정 대리를 부른 것 역시, 내 실수였다.
그냥 원래대로 자연스럽게 돌아가길 기다리며, 눈을 감기 전 그렇게 해 보고 싶었던 담배도 한 대 피워 보고, 태화장 육개장에 소주 한잔하면서 차분하게 이 생을 마무리 지을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뭐가 그리 이생에 미련이 남아, 재경 그룹에 걱정이 많아 호들갑을 떨었단 말인가.
“정현수 씨.”
“네, 과장님.”
“만약 내가 오늘 정 대리에게 보여 줬던 모습과 또 달라져 있다면,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면… 그런 나에게도 오늘 내가 정 대리 앞에서 보여 줬던 모습에 대해선 비밀로 해 줘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말했잖아요. 금방 원래대로 돌아갈 거 같다고. 그렇게 되어야 정상이니까.”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정 대리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렸다.
그런 내 등에 대고 정 대리가 말했다.
“저는 오늘 제가 본 과장님의 모습이 진짜 과장님의 모습이길 바랍니다.”
“……?”
뭔가 싶어 다시 몸을 돌려 정 대리를 바라봤다.
“원래대로 안 돌아가셨음 좋겠습니다.”
“큰일 날 소리. 방금 정 대리가 나한테 한 그 말 내가 원래대로 돌아가서도 다 기억하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정 대리는 내가 농담처럼 던진 그 말이 사뭇 두려웠는지 주춤했다.
그래서 난 다시 한번 피식하고 가볍게 웃어 주며 몸을 돌리려고 했다.
“이미 제 입 밖으로 내뱉은 말, 어떻게 주워 담겠습니까?”
“네?”
“그냥 제 마음이 그렇다는 겁니다. 오늘 과장님하고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호텔에서 과장님 댁까지 함께 다녀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생각이요?”
“어제의 과장님과는 달리 오늘, 지금 제 앞에 계신 과장님은 비록 이상한 점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이상한 점들보다 더 이상하게 어쩐지 꽤 상식적이시고, 또 정확한 분이실 거 같다는 생각이요.”
“…….”
“만약 그런 분이라면 제가 충분히 옆에서 잘 챙겨 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노예가 아닙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정훈이 이놈은 어떻게 사람을 노예라고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내가 한 짓은 아니지만,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정 대리, 그건 이제….”
“저는 노예가 아닙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이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건 맞지만, 돈에 저의 양심과 자존심 모든 걸 다 아무렇지도 않게 팔 수 있는 그런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 돈을 돌려드릴 생각을 못 했다면 전 정말 노예가 되는 거겠죠.”
“그건 내가 진짜 미안합니다.”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제 바로 위 상사가 지금의 과장님 같은 분이시길 바라는 겁니다. 진짜 회사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요.”
“…….”
“그럼 퇴근하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이번엔 내가 정 대리를 불렀다.
“정현수 씨.”
“네.”
“…….”
불러 놓고 고민을 했다.
“말씀하십시오, 과장님.”
“이젠 회사에서는 담배를 못 피웁니까?”
“네?”
“내가 2시간 동안 사무실에 있으면서 가만히 지켜봤는데,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
“네, 당연히 사무실에선 담배를 못 피우죠.”
당연한 거라는 말을 듣는데, 도대체 그 당연함이 무엇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린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업무를 보는 게 당연한 사람들 아니었나.
그런데 이곳은 그 당연한 게 당연하지 못한 게 되어 있고, 또 다른 당연함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럼 혹시 사무실에서 못 피우면 흡연실 같은 게 따로 있는 겁니까? 공항처럼?”
“네, 물론입니다.”
“정 대리 혹시 담배 피웁니까?”
“한 대 드립니까?”
“네, 괜찮으면 흡연실도 좀 알려 주세요. 담배 생각이… 많이 나네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잡았다.
“어서 오세요.”
“기사님, 혹시 태화장이라고 아십니까?”
“태화장이요? 서울에서 택시 운전하는 사람이 태화장을 모른다고 해서야 그게 어디 말이 되겠습니까?”
많은 게 변해 있는 세상에서,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게 있었다.
“태화장으로 가 주세요.”
“어디에 있는 태화장으로 가 드릴까요? 태화장이라고 하면 마포 본점도 있고, 잠실, 논현… 여러 군데 되잖아요.”
그리고 변하지 않았다고 여겼던 것들은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했다뿐이지, 조금씩 저마다의 성격대로 보이지 않는 변화가 생겨 있었다.
태화장의 분점이 여러 개 생겼나 보다.
“마포 태화장으로 부탁드립니다.”
“네, 그럽시다.”
이 시대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겠지?
이 맛은 절대 30년 전 태화장 육개장 맛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육개장 한 그릇 먹겠다고 줄을 서서 기다린 거 아니겠나.
비단 이곳 태화장의 변화는 육개장 맛뿐이 아니었다.
이게 과연 물인지, 소주인지 분간이 안 되는 맨숭맨숭한 소주.
“소주가 혹시, 이거 말고 좀 더 독한 건 없습니까?”
“독한 거요? 그럼 제주 소주 한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그건 몇 도나 합니까?”
“그건 그래도 23도, 24도… 그 정도는 합니다.”
“그럼 그거 한 병 새로 갖다주세요.”
그래도 여전히 내 입엔 그 23도, 24도짜리 소주가 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도대체 난 여기에서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다시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원해서 여기에 있는 건 아니지만, 정말 괜히 왔다.
그냥 편히 눈을 감았음 좋았을 것을, 어쩌다 이곳에 와서 안 해도 될 근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래, 담배 한 대 피워 봤음 됐다, 어설프나마 그렇게 절실했던 육개장 한 그릇에 밥 한 공기를 뚝딱 말아 땀을 흘리며 시원하게 먹어 봤음 됐다.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이곳, 이 세상에 있고 싶지가 않았다.
적응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확신.
이 몸은 내가 함부로 써선 안 되는 몸이라는 생각.
비록 다시 눈을 감는 게 두렵지만, 그래도 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야겠다.
한숨 푹 잔다는 생각으로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와 있겠지.
택시를 타고 손주 놈의 집으로 돌아와서, 어쨌거나 이것 역시 이생에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거기에 시원하게 목욕을 한 번 했다.
밥도 먹었고, 술도 한잔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목욕 한번 개운하게 하고 잠에 들자.
그럼 모든 게 다 끝나 있겠지.
하지만 이게 웬걸.
목욕을 하고 잠을 청해 봤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정훈이 놈의 스마트폰을 찾아 꺼냈다.
갑자기 낮에 정 대리에게 들었던 사진첩이라는 기능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정훈이 이놈은 과연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일지, 그래도 내 핏줄이기에 이놈의 평상시 관심거리나 주위 친구들, 함께 어울리는 인맥들이 궁금했다.
그리고 혹시 또 모를 일 아닌가.
이놈의 사진첩을 보다 보면 이제는 재경을 이끌고 있는 홍준이 놈, 내가 눈을 감기 전보다 이젠 더 많은 나이를 먹었을 아들 내외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정태 녀석도 결혼을 했다고 하니까 어떤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는지, 그것 역시 조금은 궁금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게 스마트폰 화면에 내 얼굴을 갖다 대어 정 대리에게 배운 대로 안면 인식을 시킨 다음 사진첩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