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00)
“그땐 롤렉스니, 오메가니··· 그런 게 아직 한국에 안 들어왔을 때야. 아는 사람들은 일본 같은 데 가서 사 가지고 들어와 차고 다니기도 했지만, 그 시절 한국에선 론진 이게 최고급 시계 브랜드였지. 그땐 이 시계 하나가 중형 세단 한 대 가격이었어. 그걸 임원들한테 하나씩 차고 다니라고 선물을 하셨던 거야.”
“그런 의미가 있는 시계였던 거 같아서, 내일 사람들 많고 정신없는 자리에서 드리는 거보다는 이렇게 조용할 때 드리는 게 더 좋겠다 싶었습니다.”
“이 선물에 의미를 담아 달란 소린가?”
“네, 저는 저하고 하늘이가 같이 의미를 담아 준비를 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영석이가 하늘이를 쳐다봤다.
그런 자기 아버지의 눈길을 하늘이는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 내고 있었다.
과연 하늘이 이 녀석은 정말로 두렵지 않은 것일까?
용감하다고 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나와 재경 그룹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얻고자 하는 것,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 섰다고 봐야 하는 걸까?
너무 담담해서, 혹은 대담해서 옆에서 걱정 어린 눈으로 딸아이를 쳐다보는 영석이의 눈빛이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난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함께 의미를 담아서 준비한 게 중요한 거지, 이걸 꼭 내일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드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고요.”
태산이가 말했다.
“그럼 내가 내일 마땅한 기회를 봐서 손 회장한테 넌지시 이야기를 한번 꺼내 봐야 하나?”
그런 다음 영석이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응? 애비 생각은 어때?”
영석이는 신중했다.
“아버지. 그건 일단 식사부터 하시고, 나중에 우리 가족들만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하시죠. 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니잖아요. 급한 것도 없고.”
애써 내 기분까지 신경을 써 주려는 영석이의 그 마음이 고맙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자 하는 영석이었고.
“이제 하늘이 스물여덟이에요. 회사 일 배우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서두를 내용은 아닌 거 같아요.”
“당사자들이 마음을 맞춰서 이런 걸 준비했는데, 억지로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만 일부러 미룰 이유는 더더욱 없는 거야.”
“하지만···.”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뿐이야.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하늘이는 안에 들어가서 식사 준비 대충 다 끝났는지 보고 와.”
“···네.”
* * *
점심을 얻어먹고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언제나처럼 하늘이가 나와 같이 집을 나서겠다고 함께 현관으로 내려오려고 했는데, 거실 입구에서 영석이가 그런 하늘이를 붙잡았다.
“······?”
나도 살짝 당황을 했다.
“오늘은 집에 있어.”
하늘이를 현관으로 못 내려가게 붙잡은 다음, 영석이가 대신 현관으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정훈이는 나하고 같이 내려가.”
태산이하고는 방에서 장기를 한판 두고 인사를 나눴기에 그 자리에 태산이는 없었다.
영석이와 함께 현관을 나서서 반 층 아래로 만들어져 있는 차고로 내려갔다.
입고 나온 옷이 함께 어딜 가자는 건 아닌 거 같고, 그저 차고 안에서 짧게 나랑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거 같았다.
차 앞에서 문만 열어 놓고 기다렸다.
“그럼 저는 가 볼게요, 아저씨.”
“정훈아.”
무척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결국 영석이가 날 불렀다.
“네.”
“오늘은 아저씨가 조금 당혹스럽네.”
내 차 보닛 위로 한쪽 손을 올려놓고 영석이가 말했다.
“아저씨가 할아버지 생각도 미리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고, 또 이번에 무슨 드라마 관련해서 하늘이가 철회됐던 투자를 네 부탁으로 다시 진행한다는 내용까지 알고는 있었는데··· 그런데도 오늘은 당혹스러워.”
“그러셨어요?”
“그렇다고 너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다. 매주 널 이 집으로 부른 건 할아버지였고, 그지? 너 올 때마다 하늘이하고 같이 시간 보내러 나간다는 걸 다 알고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
“그런데도 딸 가진 부모 입장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거야, 이게. 혹시 뭐 두 사람··· 벌써 이렇게 뭐 좀··· 그런 게··· 있었나? 그런 건 아니지?”
여정이 놈 때가 생각나네.
여정이 놈 유학 보내 놓고 홍명이, 홍준이 때와는 달리 여정이 옆으로 사람을 넷이나 붙였지.
집안 살림을 살아 줄 도우미 두 명과 번갈아 기사와 경호 일을 맡아 줄 사람 둘.
그렇게 붙여 놓고도 꼭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처럼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방학 때마다 한국으로 불러들였고 또 때 되면 내가 안사람과 함께 여정이가 있는 곳을 직접 가서 사는 모습을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였다.
“아저씨도 참.”
“그지? 아니지?”
“그런 거 절대 아니고요, 사실 저도 할아버지 시계 선물 같이 사러 가자고 연락받았을 때 조금 놀랐어요.”
“······.”
“저도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게 고민 많이 해 보고 찾아온 거예요. 그동안 회장님이 저한테 보여 주시는 마음은 다 알고 있었지만, 하늘이 인생이잖아요. 하늘이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영석이는 날 따라와 자기가 만든 이 자리가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던지, 괜히 내 차 보닛만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 마음을 먼저 보여 주네요.”
“아저씨는 그래. 둘 다 이젠 다 큰 어른들이고, 그래서 할아버지가 만든 상황 속에서 각자가 생각들을 많이 해 봤겠지만 그래도 그 상황에 휘둘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그런 걱정이 있어.”
참 애쓰네.
그래, 영석이 성격이라면 그리고 현재 스너프 건으로 우리 재경과 사업적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미래금융의 실질적 리더라면 충분히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싶을 거다.
“저는 회장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구? 우리 아버지?”
“네, 비록 재경 그룹에선 그룹 전무로만 오래 계셨지만, 결국 제 할아버지가 재경을 일으킬 수 있도록 옆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신 건 바로 회장님이라고요.”
“어째서?”
“사업을 보는 눈과 사람을 보는 눈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두 눈 모두 함께 수준이 올라갈 순 있는 거겠지만, 근본적으로 타고난 두 눈 사이의 역량엔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
“제 할아버지는 분명 사업을 보는 눈이 좋은 분이셨을 거예요. 반면에 회장님은 사업보다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하셨을 거고요.”
“왜 그렇게 생각을 해?”
“그러셨으니, 제 할아버지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셨을 때 제 할아버지한테 당신이 가진 모든 걸 걸어 볼 수 있으셨던 거겠죠.”
“······.”
“그런데 회장님이 이번엔 절 선택해 주셨어요. 조심스럽죠, 저도. 그런데 분명 절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중입니다.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도 않고, 저도 궁금합니다. 제가 과연 회장님의 선택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아저씨.”
“왜?”
“하늘이 있잖아요. 저보다 아저씨가 훨씬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른들 걱정시킬 만한 일을 하는 사람 아니잖아요. 그렇게 안 키우셨잖아요. 귀하게 키우셨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귀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
“하늘이하고 저. 벌써부터 걱정하시는 그런 관계까지는 아니고요, 다만 오늘 이렇게 제가 찾아온 건 그동안 회장님께서 저한테 계속 회장님 마음을 보여 주시는데, 저는 그러지 못했던 거 같더라고요. 그 역시 예의가 아닐 거 같았어요. 그게 전부였어요.”
그제야 보닛에서 손을 떼어 내며 영석이가 내게 한 발 다가왔다.
“내일 가족들하고 다 같이 오나?”
“확인해 볼게요. 근데 아마도 다 같이 움직이는 건 애가 있어서 힘들 거예요.”
“하긴. 정태가 애가 있지?”
“네.”
“그럼 정훈이 너는 아버지한테 말씀드리고, 내일 조금 일찍 와. 한 30분 정도? 행사 시작하면 다들 정신없을 건데, 그 전에 소개해 줄 사람들 있음 내가 소개도 해 주고 하게.”
“네.”
“운전 조심해서 가고.”
“네, 알겠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 * *
너 돌아이지?
과연 장태산이다운 배려와 결단이 눈에 띄는 행사장이었다.
경성별장.
7, 8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히 유명한 요릿집이었다.
메이커 있는 요릿집으로 이름이 높았지.
지금도 어느 정도 명맥은 유지해 나가고 있는 거 같았고.
그 시절 경성별장이라 하면 주로 방귀깨나 뀐다는 나랏일 보는 사람들이 이용을 하는 곳이었고, 우리처럼 기업 하는 사람들도 그 나랏일 보는 양반들 요청에 한 번씩 불려 가 대접하는 그런 장소였다.
그런데 요즘은 분위기가 아주 긍정적인 쪽으로 쇄신이 된 느낌이고.
그곳 야외 정원으로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정도 먼저 도착을 한 난 영석이를 따라다니며, 먼저 행사 장소에 도착한 미래금융 쪽 사업 파트너들과 안면을 틀 수 있었다.
혹시라도 날씨 문제 때문에 행사를 안에서 해야 할지 몰라, 정원 정면에 자리하고 있는 본관 연회관까지 다 예약을 해 둔 거 같았는데, 태산이는 그 안에서 가볍게 차를 마시며 몇몇 기업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벌써 왔어? 이쪽으로 와, 이쪽으로.”
태산이는 자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인물들에게 날 소개하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손 회장도 같이 왔나?”
“아뇨, 저 먼저 왔습니다.”
“그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나의 배경을 흘리는 태산이었다.
“손 회장 둘째.”
“아···.”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태산이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함인지 크게 놀란 반응을 보이고 있었고, 난 그런 사람들 앞으로 짧게지만 최대한의 예의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우리 집 큰놈하고 대학을 같이 다녔어. 장기가 기가 막혀. 내 요즘 이 친구하고 토요일마다 장기 두는 재미로 한 주를 기다려.”
“하하하. 아주 회장님께 고마운 일을 하고 계시네. 반가워요. 나 효림의 주철민입니다.”
효림제과, 주철민 회장.
인터넷으로 확인했던 것보단 얼굴이 많이 좋네.
그는 내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고, 나 역시 함께 내 명함을 전달하며 짤막하게 인사를 나눴다.
“태광의 민재국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처음 뵙겠습니다. 손정훈입니다.”
태광 그룹의 민재국 회장.
부친을 많이 닮았네.
기억난다.
당시 정권에서 한창 개발 중이었던 강남에 침수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 정 회장님과 이 회장님을 함께 공관으로 불러들인 적이 있었다.
침수 문제를 해결할 만한 댐 건설 수주를 주기 위함이었는데, 쉽게 말해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두 기업 총수를 직접 불러 대대적인 경쟁을 붙였던 거지.
정 회장님도 참 인물은 인물이었던 게 명분보다는 실리를 챙기고 싶지, 정권의 압박으로 돈 안 되는 사업에 이 회장과 무리한 경쟁을 할 이유가 있겠느냐며 내게 좋은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때쯤 우린 가끔씩이라도 대포 잔을 나누며 함께 고향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던 사이였는데, 그때 내가 정 회장님한테 해당 수주권에 애는 쓰되, 이기지는 말라고 말씀드렸다.
해당 수주권은 지는 게 이기는 사업이 될 거 같다고.
뭐 하러 그 큰돈을 차관까지 내어 공사권을 따내겠나.
당시 대한민국 기술로는 어려운 공사여서 전문가들을 해외에서 데리고 와야 하는 번거로움도 큰 공사였다.
공사를 맡을 업체가 정 회장님네만 있는 거라면, 사회적 책임의 명분으로 마땅히 해야겠지만 그런 게 아니었지 않나.
그래서 말씀을 드렸지.
어차피 침수 문제가 해결되면 강남은 발전을 할 수밖에 없다.
댐 공사 따내고 진행할 돈이면 그 주위 땅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겠냐고.
땅을 사라 말씀드렸다.
그게 남는 장사가 될 것이라고.
그때 진짜 큰 재미를 보고, 그래서 덩달아 기업을 키울 수 있었던 인물이 바로 태광 그룹의 민 회장이었고.
자주 만났지.
나이도 나보다 한참이나 많은 양반이 항상 큰 어른을 모시듯 날 대해 주어, 그게 민망해 함께 애를 써 주었던 관계였다.
공도 참 자주 쳤고.
그 아들을 이렇게 보고 있자니, 그 양반 생각이 뜨문뜨문 나네.
결국 이 행사 자리에 참석을 하는 인물 대부분은 내가 이끌던 시절의 재경과 밀접한 인연이 있는 기업의 자식들일 거다.
태산이가 잘 가려서 연을 이어 오고 있었겠지.
그러니 난 얼굴 정도만 확인을 하면 충분하다.
* * *
행사장 어딘가에는 있겠지··· 하면서 하늘이가 눈에 띄기만을 기다리며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와인 박스를 켜켜이 쌓은 손수레 하나가 잔디밭 위로 올라왔다.
저 바퀴에 잔디가 상하지는 않을까 싶은 걱정도 잠시, 그 수레가 멈춰 선 곳에서 이곳 지배인 정도로 보이는 한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하늘이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와인 왔네. 이거 테이블당 두 병씩 올려 주시고, 드시든 안 드시든 지금 다 오픈해 주세요.”
“다요?”
“네. 행사 시작하면 건배 제의할 건데, 그때 필요해요.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필요할 때 분잡스럽게 움직이지 말고 와인은 지금 가져오신 것만큼 한 번 더 가져와서 미리 넉넉하게 준비를 해 놓으세요. 낮 행사라도 손님들이 술을 많이 드실 거예요.”
“네.”
“주차 관련해선 다 정리가 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