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08)
호텔 로비에서 살짝 금발기가 감도는 머리카락의 키 큰 여자 한 명과 딱 봐도 한국인인 정엽이,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태어난 또렷한 이목구비의 아기를 보는데,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홍명이 놈이 내 눈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고모부!”
나와 남 사장을 발견한 정엽이 놈이 얼른 들쳐 안고 있던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는데, 녀석의 처 되는 사람은 남 사장과의 이런 만남이 제법 익숙한지 한국식으로 고개까지 깊게 숙여 가며 어색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
“정훈이!”
너무 적응이 안 됐다.
아무리 봐도 내 앞에서 호들갑을 떨며 아는 척을 해 오는 이놈은 정엽이가 아니라 내 아들 홍명이다.
어쩜 이렇게 찍어 낸 것처럼 제 아비와 똑같이 성장했을까.
내 손을 잡은 솥뚜껑만 한 큰 손도 제 아비와 영판 같고, 누구보다 불편할 이 자리에서 가장 호쾌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까지 홍명이 놈을 그대로 찍어 놓았다.
“이야… 고모부.”
“왜?”
“얘가 진짜 그 코찔찔이 정훈이에요?”
“네가 직접 물어보면 되지, 바로 앞에 놔두고 왜 나한테 물어봐?”
“믿기지가 않으니까 그러죠. 너 진짜 정훈이야? 완전 몰라보겠다.”
나는 멀리에서도 바로 알겠던데….
“너 형 기억은 나냐?”
“기억이 왜 안 나? 당연히 나지.”
“당연할 수는 없는 거지. 언제 보고 안 봤어? 나는 하늘이 통해서 네가 나 만나 보고 싶어 한다는 말 듣고 이놈이 날 기억이나 하고 보자고 하는 건가? 하면서 완전 의외였거든.”
“우리 말 다 알아들어?”
난 바로 옆에서 멀뚱히 서 있는 정엽이의 처를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못 알아듣지.”
“그럼 인사라도 시켜 줘.”
정엽이의 입에서 유창한 불어가 나왔다.
하지만 ‘안나’라는 이름의 정엽이 처는 불어가 아닌 영어로 내게 영어가 가능한지를 물었고, 그렇다고 하자 영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배려 있는 미모의 사람을 아내로 맞이했구나 하는 생각에, 그간 어떻게 살았든,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살았든 지금은 무척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안나, 나 우리 조카 한 번만 안아 봐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얼마든지 안아 보세요. 데이빗. 데이빗! 엄마가 호텔에선 뛰는 거 아니라고 말했지? 이리 와서 삼촌한테 키스해 줘.”
내가 제 애비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일까.
분명 낯선 사람이라 거부를 할 만도 한데, ‘데이빗’이라는 정엽이 놈의 아들은 내게 안기어 두 팔로 내 목을 감기까지 했다.
정말 복잡하고도, 내 의지로는 추스르기 힘든 묘한 감정들이 데이빗을 안고 있는 동안 날 힘들게 만들었다.
난 정엽이와 그 처가 입고 있는 옷, 신고 있는 신발, 들고 있는 가방까지 데이빗을 품에 안고 유심히 확인했다.
묘한 이질감.
이걸 어떻게 나 스스로 납득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날 헷갈리게 만들 정도로 홍명이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외모.
안나 역시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특유의 품격이라는 게 있다.
홍명이는 내게 자랑이었다.
나에겐 씻어 낼 수 없는 억척스러움이라는 게 있었는데, 내가 가진 억척스러움 대신 제 어미가 가진 품위와 고상함을 잘 물려받은 녀석이 바로 홍명이었다.
총명하기도 했고, 호탕하기도 했으며, 남들에게 보이는 여유와는 반대로 지기 싫어하는 승부사다운 기질도 가지고 있는 놈이었다.
그런 제 애비의 기질을 다 가지고 있는 거 같은데, 처 되는 사람 역시 아주 곱고, 품격 있는 교육을 받으며 자란 사람인 게 분명한데… 왜 이 자리에 이렇게까지 볼품없이 해서 나왔을까?
이건 어느 정도 의도가 깔려 있는 연출이라고밖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숨겨 놓고 정엽이가 예약을 해 놨다고 하는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머리카락과 손톱.
아주 단정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이 정도로 헤어스타일과 손톱을 신경 써서 정돈하고 다니는 놈이 저딴 시계를 차고 있다고?
안나의 테이블 매너는 고지식했던 이탈리아의 80년대를 몸소 체험했던 내 기준에서도 완벽에 가까운 매너였다.
이 정도 테이블 매너를 가지고 있는 파리 여성이 이런 다이닝 레스토랑을 그것도 남편이 예약을 했는데, 청바지를 입고 나온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엽이 이놈.
숨어 지낸 거구나, 그동안.
이빨과 손톱을 날카롭게 갈면서, 그간 파리에 숨어 지내 있었던 거구나.
그래, 내 손주답다.
손중길이 장손주다워!
어떻게 살고 있든 실망할 마음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하지만 기대할 준비는 항시 하고 있었다.
역시나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었구나.
고맙구나.
“야, 정훈아. 나 하늘이한테 이상한 소리 들었다?”
“무슨 소리?”
“태산이 할아버지 생신날, 너랑 하늘이 결혼 발표 비슷하게 했다면서?”
나이프로 적당히 덜어 낸 푸아그라를 딱딱한 바게트에 바르며 정엽이가 놀리듯 물었다.
“그러게. 그 자리에 형도 있었음 참 좋았을 건데.”
“앞으로 자주 만나면 되지.”
“그러자. 말만 하지 말고, 진짜 앞으로는 자주 좀 보자. 한국 들어올 일 있음 하늘이를 통하든 고모부를 통하든 이야기 좀 해 주고. 아니다. 그냥 직접 연락해도 되잖아.”
숨기고 있는 이빨이 뭘지, 어떤 손톱을 숨기고 있을지가 궁금해 일부러 내 명함을 건네 봤다.
“그래, 앞으로는 서로 연락 자주 하자.”
그러자 그 명함을 건네받고 얼른 자기 명함을 내게 건넸는데, 난 그 명함을 보자마자 이건 정엽이 놈의 진짜 명함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은 이래도 전에 다니던 회사는 큰 회사였어. 근데 확실히 큰 회사에 다니니까 내 시간이 없는 거야. 그래서 우리 데이빗 태어나자마자 작은 스타트업이지만 내 시간이 보장되는 회사로 옮겼지.”
“데미안? 여기에서 쓰는 이름이야?”
“응, 이젠 정엽이라는 이름이 어색해.”
안나의 표정 변화를 관심 있게 지켜보며 말했다.
“그럼 데이빗도 아빠 이름은 정엽이 아니라 데미안으로 알고 있겠네?”
“그렇지.”
“데이빗은 국적이 한국이야, 프랑스야?”
“당연히 프랑스지. 아빠, 엄마가 둘 다 프랑스 국적인데.”
“귀화를 했어?”
“너도 참.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렇단 말인지….
그냥 반갑기만 할 줄 알았는데, 내게 알 수 없는 희망과 기대심을 가지게 만드는 정엽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강인성 과장을 찾았다.
“신 팀장님은요?”
“아직 안 들어왔어요.”
설마 아직 이전할 지사 사무실 건물에 있다고?
“계속 그 건물에 있는 거예요?”
“네, 저도 7시까지 같이 있어 주다가, 도저히 끝날 기미가 안 보여서 먼저 들어왔습니다.”
“아니, 아직 아무것도 없는 거기에서 뭘 한다고 이 시간까지 거기에 있어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노트북 펼쳐 놓고 계속 뭘 하는데, 제가 봐서 알겠습니까?”
“저녁은요?”
“저는 먹었는데, 신 팀장은 생각이 없다길래 따로 챙겨 주지도 못했어요.”
벌써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괜히 걱정이 되어서 신 팀장한테 전화를 걸어 봤더니, 여전히 그 안에서 인테리어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진짜 돌아이네.
난 얼른 택시를 타고 오라고 지시를 한 다음, 강 과장에게 말했다.
“우리 쪽 항공, 식품, 모직. 그리고 부경 그룹의 전 계열사를 상대로 지분 구조를 한번 훑어보세요.”
“부경 그룹도요?”
“네.”
“어떤 지분 구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디든 프랑스 투자사가 끼어 있는 게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프랑스 투자사요?”
난 고개를 끄덕여 놓고 말했다.
“제가 봤을 때 우리 쪽으로는 없을 거 같고, 부경 계열사 쪽으로는 거기가 어디든 무조건 한 곳 이상엔 프랑스 투자사가 어느 정도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을 거 같아요.”
“……?”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항공, 식품, 모직 쪽으로도 확인을 해 보세요.”
“모직엔 없습니다.”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식품 쪽도 없다.
하지만 항공 쪽은 워낙 우회 투자가 많이 이뤄지는 곳이니만큼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부경 쪽엔 반드시 프랑스에 자리를 잡고 있는 투자사가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계열이 있을 것이다.
* * *
오지 마, 오지 마!
파리 출장을 다녀오고 시작된 한 주.
월요일 점심시간. 강인성 과장이 날 찾았다.
“재경항공으로는 우회 투자로도 프랑스에 물려 있는 투자 같은 건 일절 없었습니다.”
강 과장의 보고에 난 안심을 했다.
투자가 담겨 있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안 된다.
그 부분은 홍준이 놈이 사업 확장이 아닌 경영권 확보에 사활을 걸다시피 회사를 운영해 왔기에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기분 문제다.
만약 재경 그룹 쪽으로도 프랑스에 물려 있는 투자사 쪽(내가 의심하고 있는 정엽이의 투자사) 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지분은 곧 홍준이를 향한, 혹은 작은집을 향한 정엽이의 복수심이라고 봐야 하는 거니까.
정엽이가 홍준이와 작은집 형제들을 상대로 그런 복수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나름의 쓸모는 있겠다 생각 중이었다.
물론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니 안심이기도 하고.
정엽이는 현재 프랑스인으로 숨어 지내며 뭔가 작전을 걸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작전은 태산이의 미래금융이 없이는 시도를 해 볼 수 없는 성격이었을 것이고.
나는 그간 정엽이에게 들어간 태산이의 지원이 꽤 컸을 거라는 확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정엽이를 실제로 만나 보기 전까지는 사실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이번에 파리에 가서 직접 만나 보니까, 그 반신반의가 확신으로 바뀌어 버렸다.
내 손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봐도 단단하기가 짱돌보다 묵직하고 빈틈이 없어 보이던데, 그런 정엽이를 사람 보는 눈이 귀신보다 더 정확한 태산이가 놓쳤을 리가 있겠냔 말이지.
“부경 쪽으로는요?”
“부경호텔이 현재 프랑스 계열의 투자사 쪽으로 물려 있는 게 꽤 있습니다.”
맞네.
정엽이가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투자사가 틀림없다.
그렇지.
백화점 유통이나, 호텔 쪽이 그나마 정엽이 입장에선 건드려 볼 엄두가 나는 곳이었을 거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고작 돈 몇 푼, 그 돈 몇 푼 굴릴 수 있는 파이프 하나 가지고 이리저리 눈치나 살피며 기회 봐서 찔러보는 게 투자사들이 가진 전술의 전부가 아닌가.
그런 코딱지만 한 투자사 하나를 가지고 겁 없이 부경가 장남의 화학을 건드리겠나, 아님 차남의 통신을 건드리겠나?
가당치도 않지.
만약 정엽이가 프랑스에 숨어 있으면서 혼자 이빨과 손톱을 갈고 있었다면, 그 이빨과 손톱을 드러낼 상대는 무조건 부경가여야 맞는 거다.
정엽이가 이빨과 손톱을 갈아 볼 수 있도록 계기와 자극을 태산이가 끊임없이 해 줬다는 전제하에.
그렇다고 태산이의 배짱으로 미래금융 전체가 덤벼도 답이 안 나오는 화학의 부경가 장남이나 통신의 부경가 차남을 먹잇감으로 삼지는 못했을 것이고….
결국은 삼남의 백화점 유통 쪽 아니면 사돈 양반이 시집간 딸에게 넘겨준 호텔 쪽을 노리고 있을 거라, 나 역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물려 있다는 건 자금 수혈을 받았다는 거겠죠?”
“네, 적지가 않습니다.”
“얼마나 있습니다.”
“11퍼센트가 프랑스 ‘드모어’라는 투자사 앞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드모어.
호기심이 폭발을 하고 있었다.
“회사 정보는 확인해 봤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