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1)
그리고….
“이, 이… 이런 얼빠진 놈을 봤나!”
사진첩 가득 담겨 있는, 차마 눈을 뜨고는 보기가 힘든 음란한 영상들에 난 조금 전까지 또 다른 죽음을 기다렸던 마음이 싹! 하고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이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심장은 참으로 오랜만에 터질 듯이 뛰고 있었고.
도대체 홍준이 놈은… 어떻게 이런 괴물 같은 놈을 만들어 냈단 말인가!
잠자리 상대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 많은 여자와의 잠자리를… 도대체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 놓은 거지?
온통 그런 영상들뿐이다.
가족사진은커녕, 자기 얼굴이 온전하게 나온 사진조차 하나 없다.
“하….”
정말 내 피에서 괴물이 태어났구나.
결국, 난 침실에서 내려와 1층 거실로 내려갔다.
취하지 않으면 잠에 들 수 없겠다는 생각에, 좀 독한 술을 찾을 수 있음 좋을 거 같았다.
다행히 이놈도 입은 고급인지, 거실 진열장에 살아생전 내가 즐겨 마셨던 위스키가 들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한 잔 가득 따라서 절반쯤은 단숨에 비워 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불길이 식도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다시 거슬러 올라오는 느낌이다.
다시 남은 반 잔을 마저 입속으로 털어 넣고 한 잔을 새로 따랐다.
그 술을 따르고 있는데, 불현듯 퇴근 전 정 대리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퇴근하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
만약 이렇게 술기운을 빌어 눈을 감았는데, 다시 내일 아침에 이 상태, 정훈이 몸에 든 상태로 눈을 떠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만약 이 상태에서 변화가 오지 않고, 계속 이대로 쭉 가는 거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다시 한번 정 대리의 음성이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급하게 마신 독주였던 만큼, 취기도 급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저는 오늘 제가 본 과장님의 모습이 진짜 과장님의 모습이길 바랍니다.”
나도 그렇다, 나도.
나도 내 손주 놈이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회사 사람들을 대하고, 제 아비와 형을 도와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놈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술이 취하는 건가?
갑자기 살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이렇게 내가 잘 모르는 세상이라도 좋으니까, 조금만 더 오래 살았음 좋겠다는 생각이, 내 진심이 스멀스멀 술기운과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살아서 정엽이 놈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확인을 하고 싶고, 내 친구 태산이의 늙은 모습도 보고 가능만 하다면 함께 술도 한잔하고 싶다.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살아서… 지금 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나의 삶, 나의 인생이었던 재경 그룹을 다시 반열 위로 올려놓고 싶다.
* * *
그냥 이대로 모든 게 끝이 났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다시 살고 싶다는 진심이 뒤섞인 잠자리였다.
중간에 몇 번이나 잠이 들 만하면 다시 깨고, 또 잠이 들었다가 놀라서 깨었는지 모른다.
7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전화가 걸려 왔다.
정 대리였다.
“여보세요?”
―과장님. 저 정 대립니다.
“네.”
―혹시 괜찮으십니까? 걱정이 되어서 출근 전에 전화를 드려 봤습니다.
여전히 난 정훈이 놈의 몸이었다.
“그렇… 네요. 이게 괜찮은 건지, 안 괜찮은 건지 헷갈리는데… 어제와 같네요.”
―주무시고 계셨던 거 같은데,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걱정해 주는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사과를 받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 마침 잘됐네. 어제 내가 급하게 퇴근을 하느라 못 물어봤는데, 출근이 몇 시까지입니까?”
―출근은 9시까지입니다. 그런데 과장님, 괜찮으시면 제가 지금 과장님 댁으로 모시러 가도 되겠습니까?
“이쪽으로요? 왜요?”
―제가 과장님께 꼭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실은 저 간밤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왜요?”
―만나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제 회사에 차 놔두고 가셨지 않습니까? 다른 차도 있으시지만, 그냥 오늘은 제가 모시러 갈 테니까, 저랑 같이 출근하시죠. 꼭 보여 드리고,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야… 그래 주면 고맙죠.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천천히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정 대리도 천천히 와요.”
―출근 준비 다 끝내 놓고 전화 드린 겁니다.
* * *
나가서 놀다가 들어올까요?
8시가 거의 다 되어 갈 즈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정 대리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긴 했는데, 마땅히 대접할 게 없었다.
오히려 대접을 내가 받는 꼴이 되어 버렸다.
“저기 커피 머신 있네요. 캡슐도 많네. 커피 드실 겁니까?”
“커피를 그걸로 만든다고요?”
“네, 마침 탕비실에 있는 거랑 같은 브랜드네요. 와 보세요. 제가 커피 내리는 법 알려 드릴게요.”
정 대리에게 커피 머신 쓰는 법을 배운 뒤, 각자의 커피를 들고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였다.
“저 어제 간밤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과장님.”
“나도 그래요. 나도 몇 번이나 자다 깨다를 반복했는지 모르겠어요.”
“병원… 안 가 보셔도 되겠습니까? 제가 잘은 모르겠지만, 기억 상실이라는 게 결국은 뇌 쪽의 문제일 텐데, 방치해서 될 게 아닙니다.”
“네, 그건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뭐예요?”
언제 꺼냈는지, 거실 탁상 위로 책 한 권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책 표지엔 같은 이북 출신이라는 이유로 우리 재경 쪽 사업에 큰 도움을 주셨던 정주형 회장님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정주형 자서전입니다. 제 아버지가 정주형 회장의 찐팬이시거든요. 제 아버지 책인데, 제가 몇 번이나 읽었던 책이기도 합니다.”
“……?”
“제 아버지도 그곳 자동차 쪽에서 인사부장까지 하시다가 결국 그렇게 바라시던 임원까지는 못 올라가시고 몇 년 전에 정년퇴직을 하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 책을 왜…?”
“과장님께서 한번 읽어 보시면 좋을 거 같아서요.”
“제가요?”
어색하게 그 책의 표지를 쓰다듬다가, 이내 그 책을 내 앞으로 밀어 넣으며 정 대리가 말했다.
“어제 하루가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아주 부끄러운 하루였습니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했으니까요.”
“저는 모르는 일인데, 무슨 선택을 하셨을까요?”
나 역시 크게 떳떳한 일은 아니었기에 그쯤에서 없었던 일로 덮어 두자는 의미로 모르는 척을 했다.
그랬더니 정 대리도 함께 미소를 지으며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제 아버지는 정주형 회장의 팬이시지만, 저는 우리 재경 그룹의 창업주셨던 손중길 회장님의 찐팬입니다.”
“찐팬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진짜 팬이라고요. 제가 재경모직을 선택했던 이유도 결국은 손중길 회장님에 대한 팬심이 어느 정도는 작용을 했을 겁니다.”
“……?”
“제가 이래 보여도 취업할 당시에 재경모직뿐 아니라 선경, 우성, 계림… 그렇게 국내 대기업 네 군데에 동시 합격을 했던 사람입니다. 물론 재경모직에 합격을 못 했더라면 다른 세 군데 중 한 곳을 선택했겠죠. 하지만 운이 좋게도 재경모직에 합격을 했고, 동시에 네 군데 합격을 한 상태였기에 아무 고민 없이, 계산 없이 바로 재경모직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손중길 회장님 때문이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영향은 있었을 거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지금이야 재경이 예전만 못한 상태이지만, 그래도 재경 그룹은 IMF가 터지기 전에는 재계 순위 6위까지 올라갔던 저력이 있는 기업입니다. 그리고 재경모직은 누가 뭐래도 그런 재경 그룹의 모태 기업이고요. 직원 대우가 크게 차이가 나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다들 고만고만하고, 또 모직 쪽에선 재경의 대우가 좋으니까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흠….”
“이 책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나는 그때까지도 도대체 정 대리가 왜 정 회장님의 자서전을 가지고 와서 이걸 내게 건네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제 할아버지의 자서전도 아니고, 남의 회사 창업주의 자서전을 제가 읽어서 뭐 하겠습니까?”
읽을 이유야 많지.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정 회장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굳이 이런 걸 읽을 이유가 있을까.
“이 책에 우리 재경 그룹과 손중길 회장님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들어 있습니다.”
“정 회장님의 자서전에요?”
“네. 제가 몇 군데 접어 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부분들이 다 재경 그룹과 손중길 회장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도대체 정 회장님이 왜 자기 자서전에 내 이야기를 담았단 말인가?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지금 제 앞에 계시는 과장님의 모습이 진짜 과장님의 모습이길 바랍니다.”
이 친구, 이거 지금 진심이다.
“어쨌거나 제 바로 위 상사이시고, 언제까지 같이 지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지내는 동안에는 제가 과장님께 도움이 되는 부하 직원이길 바랍니다. 저 역시 그게 저의 진짜 모습이길 바랍니다.”
“…….”
“제가 그 책에 접어 놓은 부분을 읽어 보시면… 만약 과장님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신다고 해도 조금이나마 좋은 쪽으로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서 가져와 봤습니다. 읽으시기에 불편한 내용도 분명 있을 겁니다. 가령 현재 회장님에 관한 내용이라든지, 그런 부분들은요. 하지만 그런 거 상관없이 정주형 회장님이 손중길 회장님과 우리 재경 그룹에 관해 언급을 조금이라도 한 부분은 다 접어 놓은 거니까, 그런 거 크게 신경 쓰지 말고 한번 읽어 보십시오.”
그 자리에서 바로 접혀 있는 부분을 펼쳐 봤다.
왕자의 난.
해당 부분의 내용을 요약하는 의미심장한 소제목이 눈에 띄었는데, 그 소제목이 바로 왕자의 난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가 눈을 감은 이후, 재경 그룹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인들 모두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야 할 것이다.
아주 의미심장한 문구로 시작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나와 있는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러했다.
당시 정 회장님의 눈에 비추어진 재경 그룹은 IMF를 효과적으로 극복해 낼 수 있었다.
재경이 가지고 있던 사업군 대부분이 건설과 식품을 필두로 한 몇몇 계열을 제외하고는 수입보다는 수출 위주의 사업군이었기에, 단단한 리더가 중심만 잡고 있었다면 오히려 그 위기를 기회로 잡았을 것이라는 게 정 회장님의 생각이었다.
―실제 그 당시 부도 신청을 했던 국내 기업들을 살펴보면 원자재를 수입해서 상품을 만들어 그걸 수출로 연결시키는 기업들보다, 건설이나 식품과 같은 원자재를 수입해서 국내 자체 소비를 일으키는 사업군들 위주로 줄도산이 일어났다.
정 회장님의 자서전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아까운 기업을 재경이라고 손에 꼽지 않을 수가 없다. 재경은 항공과 건설에 관한 애정이 남다른 기업이었지만, 실제 기업의 시작은 포목점, 원단 사업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재경의 시작은 모직이라고 봐야 한다. 중국과의 수교가 이뤄지고, 아직은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던 당시, 국내 모직 사업에서 IMF는 분명 위기가 아닌 기회였다.
그렇지.
모든 위기라는 게 결국은 기회의 반대쪽 얼굴이다.
그리고 그때의 외환 위기는 수출 위주의 재경모직에겐 기회가 분명했을 것이다.
―아직은 한국의 모직 사업이 세계적인 반열에 오르지 못했던 당시, 외환 위기는 최소한 모직에 있어서만큼은 한국을 제조의 심장으로 만들 수 있는 특수 분야였다. 값싼 의류, 신발 등을 수출하기 시작한 많은 국내의 모직 기업들이 어느덧 한국을 넘어, 아시아, 글로벌한 모직 기업으로 성장을 해 있는 지금의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경은 그 기회를 살릴 수 있는 인프라가 어느 기업보다 완벽하게 갖춰진 기업이었다. 그럼에도 손중길 회장의 타계 이후, 두 형제간의 그룹 운영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은 막대한 외화를 확보할 기회를 스스로 놓친 꼴이 되어 버렸다.
내가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날 불안하게 만들었던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둘째 홍준이 놈과는 달리, 첫째 홍명이 놈에겐 내가 죽은 이후 비빌 언덕이 없다는 것.
―만약 손중길 회장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래서 IMF 시절의 재경 중심에 고 손홍명 회장이 아닌 반도체 사업과 정보 통신 사업의 중요성을 항상 입에 달고 살았던 고 손중길 회장이 있었더라면 아마도 대한민국 경제는 지금보다 최소 30년은 더 앞에서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난 그 내용을 끝으로 정 회장님의 자서전을 덮었다.
그리고 커피 잔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정 대리는 그런 날 따라오지 않았다.
“…….”
생각이 다시 또 많아진다.
홍준이 놈은 워낙에 수가 많고 계산이 빠른 놈이었다.
그래서 배우자감을 고를 때에도 내가 연결을 시켜 준, 화학을 필두로 한 부경 그룹의 차녀와 군말 없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다.
반면에 맏이, 홍명이 놈은 크게 고집이 센 놈도 아닌데 배우자감 선택에 있어서만큼은 내 말을 좀처럼 듣지를 않았다.
교제 중인 아가씨가 있다며, 아무런 집안 배경이 없는 교직 공무원의 딸을 집으로 데리고 왔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비로서 홍명이 놈에게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 상대가 비록 나일지언정,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꼭 갖고자 하는 걸 가질 수 있게끔….
이 아비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를 보고 싶었다.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고집할 수 있는 소신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홍명이 놈은 결국 날 실망시키지 않고, 그런 모습을 내게 보여 주었다.
졌지만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졌지만, 패배가 아닌 승리를 한 기분이었다.
지나치게 기우는 결혼은 분명했지만, 사업 쪽으로 우리 재경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집안이었지만 난 홍명이 놈을 믿기로 했다.
내 뜻을 꺾었다면, 어느 누구와 붙어도 꺾이지 않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반면에 둘째 홍준이의 처가는 분명 여러모로 홍준이에게 큰 언덕이 되어 줄 수 있는 집안이었다.
재경 그룹은 손대지 못하고 있었던 화학을 필두로 정보 통신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고, 정계 쪽 인맥이 무척 단단한 부경 그룹의 차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