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2)
내가 없는 상황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국가 전체를 뒤흔들었다던 IMF라는 경제의 적을 만난 홍명이 놈.
그리고 그걸 기회로 만들어 낸 홍준이 놈.
과연 이런 결과에 난 홍준이 놈을 탓해야 하는 것일까, 아님 잘했다고 칭찬을 해 줘야 하는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그래, 이미 엎어진 물을 무슨 수로 주워 담겠나.”
난 아랫입술을 잘게 깨물며 다짐했다.
홍준아, 이놈아.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꼴을 보고도 재경을 지키고 있는 널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그런데 지금부터는 긴장을 좀 해야 할 거다.
이 아비가 네 아들놈 몸에서 좀 더 살아 보고 싶단 욕심이 생겨 버렸거든.
그리고 나는 네가 바꿔 놓은 나의 재경을 다시 내가 원하는 재경으로 되돌려 놓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구나.
지금부터 이 아비가 하나하나, 제대로 검사를 해 주마.
과연 네 형과 조카까지 내치면서 이끌어 온 너의 재경이 나로 하여금 이해를 받을 수 있을 만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를….
몸을 돌려 집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 대리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정 대리에게 물었다.
“신문은 어디에서 살 수 있습니까?”
“신문이요?”
“네, 세상 돌아가는 걸 좀 보려고 해도 신문을 살 곳이 전혀 없네요.”
정 대리는 눈알을 천장으로 돌려 곰곰이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저도 요즘엔… 신문을 파는 곳을 잘 못 본 거 같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신문을 아예 안 보는 겁니까?”
“아예 안 보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역시 스마트폰이 대체를 해 버렸죠.”
“이게요?”
“네, 죄다 스마트폰에 뜬 인기 뉴스들만 보지, 옛날처럼 종이 신문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신문을 좀 구독하고 싶은데, 정 대리가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런 거야 금방 하는 거니까요. 어떤 신문을 신청해 드릴까요?”
“기본적으로 현재 유명한 대표 신문사 서너 개 정도?”
“그렇게나 많이요?”
“신문사마다 성향이 다 다르니까요. 여러 개를 동시에 봐야 세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죠.”
* * *
정 대리와 함께 출근했다.
역시 내게 살가운 사람은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다.
부장, 차장 모두 형식적인 눈인사 정도만 먼저 보내올 뿐, 회장 둘째 아들에게 할 업무 지시 같은 건 아예 손을 놓고 있는 모습이었다.
“과장님.”
사무실 분위기를 확인하는 날 곁눈질로 지켜보던 정 대리가 조용히 말했다.
“네.”
“저는 오늘 봐야 하는 업무가 좀 많습니다. 실은 그래서 아침에 과장님 댁으로 갔던 겁니다. 출근을 하면 더는 어제처럼 따로 시간을 내어서 뭔가를 알려 드릴 수가 없을 거 같아서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 신경 쓰지 말고 봐야 한다는 업무부터 보세요.”
“네. 그래도 궁금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물어보십시오.”
“네, 그렇게 할게요.”
10시가 지났을까?
부하 직원들을 데리고 오전 회의를 마친 정 대리가 자리로 돌아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보아하니, 그동안 과장인 내가 해야 할 역할을 정 대리가 다 해 오고 있었던 거 같다.
과장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자리에 앉아만 있었는데, 부하 직원들을 데리고 오전 회의를 하며 업무를 나눠 주고 돌아오는 그 모습이 꽤 익숙해 보였다.
그런 사무실 분위기에 다른 팀 직원들 역시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하는 눈치였고.
“네, 오 과장님. 저 인사부 정현수 대립니다.”
난 마땅히 할 게 없었기에 전체적인 사무실 업무 분위기를 파악했고, 또 바로 옆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정 대리에게 집중을 하고 있었다.
“어제는 제가 중간에 잠시 외근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겨서, 제대로 못 챙겼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외근 다녀오니까 홍 주임이 준영 씨 사직서를 받아 놓고 절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아, 어제 말했던 그 친구 건이구나.
입사 3년 차에 영업2팀의 책임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고 이달의 우수 사원상도 벌써 두 번이나 받았다는 친구.
“준영 씨는 제가 따로 퇴사 상담을 할 건데, 그 전에 혹시 무슨 일로 퇴사를 희망하는 건지 과장님은 알고 계시는 게 있을까 해서요.”
정현수.
보면 볼수록 업무 처리 능력이 매끄럽다.
그렇지.
이럴 땐 해당 직원을 먼저 불러서 퇴사 사유를 물어볼 게 아니라, 같은 부서 동료 직원들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먼저 체크하는 게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동료들과 불화가 잦은 직원이라면 모르겠지만, 해당 직원은 부서장이 대리 승진을 조금이라도 빨리 시켜 주기 위해 이달의 우수 사원상 후보에 다시 올려줬을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는 직원.
그리고 요즘 말로 관계 부서와도 원만히 잘 지내고 있는 직원이라고 했다.
이럴 땐 주위 사람들을 통해 먼저 대략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 좋다.
“과장님도 모르신다고요? 아예 말을 안 하던가요? 흠… 그럼 준영 씨 퇴사 이유를 알 만한 다른 영업부 직원은 없을까요? 그렇군요. 어쩔 수 없죠. 제가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난 정 대리가 통화를 끊기만을 기다렸다가 물었다.
“왜요? 거기 과장이라는 사람도 어제 그 친구가 왜 퇴사를 하려고 하는지 이유를 모른답니까?”
“네, 그렇다네요. 확실히 팀원들 간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 거 같고… 이럴 땐 의심을 해 볼 만한 내용이 스카우트가 유일한데….”
“스카우트요?”
“네. 연차는 3년이지만, 아직 대리를 달기 전이니까 쉽게 잘 팔릴 조건이긴 하죠.”
“여기에서 인정받고 일 잘하고 있는 직원을 다른 회사에서 데리고 간다는 뜻입니까?”
“뭐, 요즘 세상에 그런 걸 문제 삼을 순 없으니까요.”
그런 걸 문제 삼을 수가 없다고?
“같은 업계인데도요?”
“…네, 조건 따라 회사 옮겨 다니는 이직은… 흔한 일이니까요.”
조건 따라 회사를 옮겨 다니는 이직이 흔한 일이다?
적응이 좀 될 만하면, 적응이 안 되는 소리가 들려오니 이거 원….
“그런데 확실한 내용도 아닌데, 넘겨짚을 필요는 없을 거 같고, 어차피 사직서는 받았지만, 상담은 안 했으니까 제가 불러서 상담을 한번 해 보면 알겠죠.”
30분 뒤에 차준영이라는 영업부 직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 손중길.
합당포의 작은 포목점에서 내 장사를 시작해, 그 작은 포목점을 눈을 감기 전까지 재경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재계 서열 6위까지 올려놓은 사람이다.
운도 내 편이었고, 기회, 시기도 좋았지만, 그 모든 걸 다 차치하더라도 나는 특히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이건 나 스스로도 자부를 하는 부분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정확한 눈과 반드시 나와 회사에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될 경우 어떻게든 내 사람으로 만들어 내고야 마는 집요함.
그게 전부였다.
인사가 만사.
차준영이라고 했나?
이미 사직서를 인사부에 냈다는 거 자체가 결심이 섰다는 뜻인데, 저런 상담을 한다고 바뀌는 게 뭐가 있을까?
그런데 관상이 참 좋아서 아까운 친구인 건 확실하다.
영업부라고 했지?
영업을 잘할 친구인 건 확실하다.
걸어 들어오는 걸음걸이만 봐도 알지.
보폭은 큰데, 결코 성급한 걸음은 아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알고 있으니, 저렇게 크게 걸을 수 있는 것이지.
정 대리가 차준영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난 재빨리 정 대리의 손목을 잡았다.
“왜… 요?”
“보통 회사 직원들이 사직서를 제출하면 모든 상담을 정 대리가 직접 합니까?”
“원래라면… 제가 아니라 과장님이 하셔야 하는 거죠.”
“그런데 그동안은 정 대리가 제 역할까지 다 해 왔던 거고?”
“…네.”
“차준영 씨는 저랑 같이합시다.”
“네?”
“정 대리 차준영 씨랑은 잘 아는 사이예요?”
“개인적으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회사 안에서는 서로 좋은 관계로 지내는 편이었죠.”
“잘됐네. 왜 그만두려고 하는지, 저랑 같이 들어 봅시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정 대리에게 싱긋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 어차피 지금 할 거 없잖아요. 나 그냥 평소 하던 대로 내 맘대로 나가서 놀다가 들어올까요?”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나가긴 또 어딜 나가겠단 말입니까? 제가 아침에 몇 시부터 일어나서 과장님 댁을 찾아간 거였는데.”
“그럼 같이 들어 봅시다. 나도 뭐라도 할 게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 * *
회사 조직도 좀 갖다주세요
태산이….
조금만 기다리게.
어제 자네와 통화를 해 보니, 아직 괄괄하더구먼.
내 지금 당장이라도 자네를 만나 우리의 재경이 정확히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내 손주 놈 정엽이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자네를 만날 게 아닌 거 같네.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게 좀 있겠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게.
금방 찾아갈 테니….
인사부 안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상담실 안에서 정 대리와 함께 차준영이라는 친구와 마주 보고 앉았다.
“제가 어제 외근을 나가 있는 동안 다녀가셨더라고요?”
정 대리가 상담을 시작했다.
차준영의 사직서를 탁상 위로 올려놓고 퇴사의 이유를 묻기 위해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좀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차준영의 얼굴과 자세, 그리고 표정을 천천히 읽어 봤다.
“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난처했습니다. 대리님은 자리에 안 계신다고 하지, 홍 주임도 대리님이 오셔야 퇴사 상담이 가능하다고 그러지… 힘들게 찾아왔던 거거든요.”
목소리도 좋다.
적당히 낮은 저음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성을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차준영의 말에 정 대리도 함께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겠죠. 저도 어제 외근 다녀와서 준영 씨 사직서가 접수된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바로 전화를 한번 해 볼까 하다가 시간이 너무 늦었더라고요. 뭐 때문에 그만두려고 하시는 거예요?”
차준영은 수차례 입맛만 다실 뿐, 바로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런 차준영을 정 대리는 말없이 기다려 주기만 했다.
“저희 과장님이 별말씀 없으셨나요?”
“아뇨, 실은 저도 아까 전화로 무슨 일인지 아느냐고 여쭤봤어요. 그런데 조금 예민한 부분일 수도 있을 거 같아서, 과장님이 말하는 건 좀 그렇고 그냥 준영 씨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다는 대답만 하시더라고요.”
다시 또 차준영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침묵이 진행되고 있었고, 그 침묵 속에서 난 차준영이라는 친구의 신중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선 당사자가 침묵을 못 견디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차준영은 자신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말 한마디에도 신중을 담고 있었다.
그런 게 내 눈에는 보였다.
“혹시 다른 회사에서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오퍼가 들어온 건가요?”
정 대리의 물음에 차준영은 짧게 고개를 흔들었는데, 그 반응의 속도가 빠른 걸로 봐서 거짓말은 아닌 거 같았다.
하긴, 조금 전 정 대리가 그러지 않았나.
요즘 세상은 좀 더 나은 조건을 약속받고 이직을 하는 일 따위는 흔한 일이라고.
회사를 그만두겠다 결심까지 한 마당에 인사부 상담 자리에서 그런 걸 숨길 이유가 어디에 있겠나.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 에요?”
“네, 아닙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문제도 아닐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준영 씨는 영업부뿐 아니라 관계 부서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잖아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음… 이유가 뭘까요? 정말 궁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