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29)
한결 좋아진 얼굴의 채서린을 보고 있자니, 하늘이의 마음 역시 함께 편해지고 있었다.
서로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관계.
그 불편한 관계의 중심엔 정훈이가 있었다.
비록 그 과거가 정훈이의 기억엔 없다지만, 채서린의 기억 속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정훈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빼앗길 줄 몰랐기에 하늘이에게 채서린은 크게 대수롭지 않은 상대였다.
그런데 정훈이에게 감정을 빼앗긴 지금도 이상하게 그의 과거인 채서린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묘한 감사함이, 불필요한 미안함이 느껴지는 상대였다.
“약속 시간 맞춰서 도착한다고 엄청 밟았는데, 그래도 제가 좀 늦었네요.”
“천천히 오시라니까요. 오늘 저희는 별다른 스케줄도 없었는데….”
“에이, 그래도 그럴 수 있나요. 제가 뵙자고 먼저 연락을 드린 건데.”
오늘 이 자리는 꼭 채서린의 소속사 대표를 중간에 끼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물론 개인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겠지만, 결국은 비즈니스를 위한 자리이니까.
“디엠티 프로덕션이랑은 같이 일 여러 번 해 보셨죠?”
“그럼요. 서린이 말고도 디엠티 쪽이랑은 작업을 여러 번 같이 해 봤죠.”
소속사 대표가 애를 쓰며 자리를 부드럽게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디엠티 프로덕션 쪽으로 시니어즈 광고 의뢰를 넣어 뒀어요. 당연히 그쪽에서 직접 컨택을 해야 하는 영역이긴 해도, 그쪽이 제안한 모델 중 서린 씨가 끼어 있다 보니 제가 직접 컨택을 하게 됐네요.”
미팅의 목적은 상대도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둘러 갈 이유는 없었다.
“혹시 중간에 오해가 생길까,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시니어즈뿐 아니라 재경모직 쪽 전 브랜드 광고물을 저희 쪽에서 위탁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채서린의 반응은 무척 침착하고 잠잠했다.
“저희 쪽에서도 어레인지 정도만 하는 거지, 실제 광고 영상물은 콘셉트에 맞는 프로덕션 쪽으로 의뢰를 하고 있습니다.”
“네. 일반적이죠.”
얼굴에 절실한 미소를 담고서 소속사 대표가 맞장구를 쳤다.
“저도 많이 의외였어요. 디엠티 프로덕션에서 광고주 쪽 사람과 채서린 씨 사이에 있었던 스캔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추천 모델로 채서린 씨 이름을 함께 넣어 놓은 거예요. 전화로 물어봤죠. 왜 서린 씨를 추천했는지.”
“…….”
“고민을 많이 안 해 봤다고 하는 거예요. 그냥 딱 시니어즈의 콘셉트를 공부하는 내내 그 콘셉트를 가장 잘 표현해 낼 모델 두 명이 떠올랐는데, 그중 한 명이 서린 씨였다고 해요. 그래서 다시 물어봤어요. 혹시 재경가 차남이랑 채서린 배우 사이에 있었던 스캔들을 모르냐고. 안다고 해요. 그러면서 ‘그게 왜?’라고 하네요. 그냥 스캔들일 뿐 아니냐고.”
“…….”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그게 왜? 그냥 그저 그런 스캔들일 뿐이잖아. 난 악녀검사 촬영 내내 서린 씨한테 시니어즈를 입힐 생각까지 하면서, 왜 메인 모델로 서린 씨를 섭외할 생각을 못 했을까요?”
채서린이 살짝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물었다.
“저야 아직은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가 아니죠. 그런데 광고주 입장에선 아직은 제가 다소 불편한 모델이지 않을까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그럼 감정들까지 이번에 서린 씨가 시니어즈 메인 모델을 받으면서 정리를 해 주길 개인적으로 바라고 있어요.”
“제가 어떤 의미로 방금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저는 계산이라는 건 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서린 씨는 당연할 거고, 대표님도 손정훈이라는 사람에게 고마운 감정 가지고 계시죠?”
소속사 대표가 얼른 대답했다.
“그걸 말로 해서 뭐 하겠습니까?”
하늘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감정을 숨기고 있는 채서린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그런 고마운 감정이 계속 유지가 될 필요가 있을 때가 있고, 어떨 땐 유지보다는 정리가 필요할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정리요?”
“계속 손정훈이라는 사람에 대한 고마운 감정이 유지가 된다면, 결국 감정이 아니라 사람이 남는 거잖아요.”
순간 채서린의 얼굴에 미세한 흔들림이 일어났지만, 하늘이는 못 본 체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중간에서 많이 피곤해질 거 같아요. 정리를 해 주세요. 그 정리가 어느 쪽에서건 완벽하게 끝이 나야, 제가 뭘 제대로 시작을 해 보더라도 시작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채서린이 말했다.
“미래기획이 투자한 드라마까지 끼어 있는 지금, 중간에서 가장 많은 계산과 생각을 하실 분은 누가 뭐래도 팀장님 아니겠어요? 그런 팀장님이 하신 계산이라면,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정답에 가까운 계산이라고 봐야겠죠.”
“개런티는 어느 선까지 맞춰 드려야 할까요? 아 참, 참고로 손정훈은 제값을 주라고 했어요. 저 역시 그 사람 성격을 이젠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나중에 혼날 짓을 굳이 하고 싶지는 않고요.”
채서린은 혼자서 작은 목소리로 ‘제값’이라는 표현을 읊조렸다.
그런 채서린에게 하늘이가 말했다.
“피카소 이야기를 하네요.”
“피카소요?”
“말년의 피카소는 그림 한 장 그려 내는 데 5분도 안 걸릴 때가 있었대요. 그런데도 엄청난 금액을 받고 그림을 그렸겠죠? 그런 경지에 오르기까지, 그 정도 명성을 얻기까지 그가 한 노력을 우린 알아주자는 거겠죠.”
채서린이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이거 영광이네. 감히 저 같은 사람이 피카소에 비교도 다 당해 보고. 그런데 그런 피카소도 때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돈을 안 받고도 그림을 그린 적이 분명 있었을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이요?”
“팀장님이요.”
“…….”
“저 팀장님 좋아해요.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절요?”
“네. 팀장님한테 받은 도움, 이게 과연 그림 한 장으로 퉁칠 수 있는 걸까요?”
“손정훈이 아니라 저요?”
“계산은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지금 손정훈이 아니라, 팀장님께 감사해야죠.”
채서린은 당당했다.
“저는 제가 손정훈에게 그 정도 도움은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첫 스캔들 터졌을 때, 제가 많은 부분을 안고 갔어요.”
당당하고 명쾌한 채서린의 입장에 하늘이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개런티는….”
이미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소속사 대표와 모두 정리가 끝난 듯, 채서린은 소속사 대표와 눈을 마주친 후 함께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그날 저랑 같이 움직일 제 매니저, 코디 차비 정도만 챙겨 주세요. 저희 쪽에선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아요.”
“그런 계약 조건이라면 제가 손정훈한테 혼이 날 거 같은데요?”
“혼이요? 왜요?”
“서린 씨를 재경모직 쪽으로 추천한 게 저니까요.”
“그 추천에 재경모직 쪽 반응은 어떻던가요?”
“부담스럽다는 입장이었으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같이 있을 이유도 없겠죠? 그리고 저 역시 우리 미래기획 자체 홍보가 아닌, 광고 대행을 하는 입장에서 모델료를 절충시킬 이유는 없어요. 돈 많은 광고주 쪽에서 제값을 주라고 하는데, 우리가 굳이 제값을 깎을 필요가 있을까요?”
“…….”
“서린 씨.”
하늘이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채서린을 불렀다.
채서린이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길 기다렸다가, 싱긋이 웃으며 하늘이가 말했다.
“우리 앞으로 같이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이번 작품만 같이 하고 치울 거예요?”
“…….”
“그럼 내 입장에선 완전 손해죠. 그 큰 리스크 다 떠안고 엎어진 작품에 재투자를 강행했는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돌아오는 게 이 작품이 끝이면 손해잖아요.”
그 말에 채서린이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앞으로 서린 씨와 더 좋은 작품들, 더 많이 같이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절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멍청한 투자자로 만들지 말아 주세요.”
하늘이는 이번엔 채서린이 아닌 그녀의 소속사 대표를 쳐다보며 물었다.
“서린 씨 모델료, 어느 정도 선이면 좋을까요?”
* * *
겉넘지 마라
채서린 측과의 미팅을 성공적으로 끝낸 하늘이.
그녀는 채서린과 그 소속사 대표를 엘리베이터 복도 입구까지 배웅해 준 뒤, 광고기획팀 팀장을 찾아갔다.
“어떻게 됐어요?”
광고기획팀장이 궁금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요? 웃으면서 나가는 거 봤잖아요. 잘됐어요.”
“계약하겠대요?”
하늘이가 애써 무심한 척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이자, 광고기획팀장은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 장난을 걸어왔다.
“이러다 조만간 팀장님이 제 자리까지 넘보시겠어요?”
“넘볼 거면 본부장님 자릴 넘봐야지, 제가 왜 팀장님 자릴 넘봐요?”
“들으실라….”
“헐… 계세요?”
“웃자고 한 소리예요, 웃자고.”
그제야 하늘이도 팀장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한 농담이었다는 걸 눈치채고 뚱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그런 하늘이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며 팀장이 말했다.
“나야 고맙지. 팀장님이 우리 쪽 일까지 직접 다 해결해 주시고, 거기에 건져 온 모델이 채서린이야. 설마 시니어즈 광고 성사금까지 영상팀에서 가져가겠다는 건 아니죠?”
이번엔 하늘가 팀장을 놀리겠다고 장난을 걸었다.
“확 그럴까 보다.”
하지만 수가 뻔한 하늘이의 장난에 넘어갈 팀장이 아니었다.
“그럼 나랑 싸움 나는 거고.”
“그러고 보니까, 우리 안 싸운 지 꽤 오래됐다, 그죠?”
“그럼 이참에 서로 몸 한번 풀어 봐요?”
“좋으실 대로? 그럼 나도 스텝 한번 밟아 봐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동료 팀장 연애사 지원해 주면서 내 밥그릇까지 빼앗기면 그건 호구잖아. 설마 우리팀 사무실에 와서 나 호구 만들 생각이에요?”
“연애사 같은 소리 하고 계신다, 또.”
재빨리 자신이 한 말을 수정하며, 팀장이 한층 더 강한 장난을 걸었다.
“맞네, 이건 연애사가 아니지. 가정사지. 그죠?”
“팀장님!”
“왜? 내가 어디 틀린 말 했어요? 재경 그룹. 그 안에서도 재경모직 관련된 내용은 팀장님 가정사라고 봐야지.”
다른 팀 동료들을 둘러보며 팀장이 자신의 편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디 내 말이 틀렸어?”
자신을 공개적으로 놀리고 있는 팀장과 그 팀장을 지지하고 있는 광고기획팀 직원들의 모습에 하늘이는 입을 꼭 다문 채 코로 뜨거운 숨을 내뿜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인정해야만 했다.
“네, 네. 좋으실 대로 생각들 하세요.”
이번엔 조금 진지해진 모습으로 팀장이 다가와 물었다.
“얼마 부르던가요?”
“3억 5천.”
“채서린이 계 탔네.”
하늘이와 팀장은 광고기획팀 복도를 지나쳐 영상팀 사무실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대화를 이어 갔다.
“기존 채서린 몸값 생각하면 그 정도는 당연히 불러야겠지만, 팀장님이 죽은 드라마도 하나 살려 줬고,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줬는데 너무 크게 부른 거 아니에요?”
“터무니없이 적게 줘서 나중에 후려치기 했단 소문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 갉아먹게 만드는 거 보단 낫죠.”
“설마 그쪽에서 3억 5천 불렀다고 거기에서 바로 오케이 본 거예요?”
어느새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하늘이는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책상 위로 올려놓고 팀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팀장님. ‘근자열 원자래’라는 말 알아요?”
“근자열 원자래? 뭐 고사성어 같은 거예요?”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서도 그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뜻이래요.”
“……?”
하늘이는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팀장의 모습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며칠 전 정훈이가 자신에게 해 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자 다시금 미소가 지어지는 하늘이었다.
“지금 악녀검사에 잡혀 있는 총제작비가 64억이에요. 중간에 터진 스캔들이 없었다면 채서린 기본 회당 개런티를 감안했을 때 못 잡아도 70억은 잡았어야 하는 작품이죠.”
“그건 그렇죠.”
“이유야 어찌 됐든 같이 작품을 하기로 한 이상, 우리 작품 주연 배우 기 정도는 살려 줘야 할 거 아니에요. 배우 기가 살아야 그 작품이 살죠. 그 기 살리는 데 우리 회사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재경모직 쪽에서 대겠다고 하는데 3억 5천이면 어떻고 5억이면 어때요?”
광고기획팀장은 그저 고개를 수차례 끄덕이는 것으로 더는 이 내용을 가지고 하늘이에게 장난을 쳐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우리가 대신 생색을 낼 수 있는 너무 좋은 기회인데,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잖아요.”
“맞아요. 이 바닥 좁죠. 우리 쪽에서 채서린 상대로 그 정도 호의를 베풀고 그 지원 덕에 채서린이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소문만 날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계약이긴 하네요.”
“그러니까. 어차피 채서린 밀어주기로 한 거 확실하게 밀어주고 작품이 안 남더라도 사람이라도 남을 수 있게, 그렇게 한번 만들어 보자고요.”
하늘이는 책상 가장 아래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던 서류 봉투를 팀장에게 건넸다.
“이건 뭔가요?”
“재경모직에서 이번에 새로 론칭한 퍼스펙티브 의뢰 건이에요. 한번 검토해 봐 주세요.”
“퍼스펙티브는 이미 받았잖아요. 프로덕션 쪽과 조율 중에 있어요.”
“아뇨, 이건 PPL 의뢰 건이에요.”
“PPL이요?”
팀장은 PPL 건을 왜 영상기획팀장인 하늘이가 직접 진행을 하지 않고 광고기획팀장인 자신에게 건네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봉투 속에 든 내용물을 꺼내 봤다.
“응? 이건 또 뭐래?”
“JBS에서 이번에 골프 예능 프로그램 편성 잡았잖아요.”
“홀인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