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32)
“후져? 우리가? 하하하. 우리가 뭐가 후져?”
다리를 꼰 채,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담고 혀로 몇 차례 굴리다가 장혜란이 입을 열었다.
“오빠.”
장선동 회장은 대답 대신 커피 잔을 입술에 붙였다.
“선열이네 백화점. 그거 내가 받아서 우리 애들 나중에 형편껏 나눠 가질 수 있게 해 줄까 싶어요.”
장선동은 장혜란이 이곳까지 직접 찾아오겠단 연락을 넣었을 때부터 이 비슷한 내용이 나올 거라는 걸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입술에 붙이고 있던 커피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양 볼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내가 이래서 우리가 후지다는 거야. 애 혼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말 빙빙 돌려야겠어요?”
“안 돌리고 바로 한다고 해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은데?”
“따로 선열이한테 연락받은 적 있어요?”
“태영 쪽 관련된 기사 처음 나왔을 때, 내가 먼저 전화를 건 적이 있긴 하지.”
“뭐랍디까?”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더라고. 금방 조용해질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정도로만 말을 하던데, 나도 이제 늙었잖아. 너희가 애들도 아니고, 손 서방이 적당한 선에서 겁 좀 주고 말겠다 싶어서 더는 안 물어봤어.”
“그게 전부예요?”
“그러다 지난주에 다시 또 기사가 나왔을 땐, 어쩌면 손 서방이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기분이 들긴 했어.”
장혜란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커피 잔을 눈높이까지 올리며 말했다.
“음. 커피 향 괜찮네.”
그리고는 다시 테이블 위로 그 잔을 내려놓는 장혜란을 향해 장선동이 물었다.
“그런데 이런 내용으로 같이 올 거면 손 서방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태를 데리고 왔어야지 왜 정훈이를 데리고 왔어?”
“내가 데리고 왔다고 하기보다는 내가 여기까지 오게끔 만든 게 정훈이라고 보면 될 거예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애 앞에서 우리 후진 어른은 되지 말자고 나 혼자 먼저 들어온 거 아니겠어요?”
장선동은 몇 차례 눈을 깜빡거렸다.
“올 구정 때 나한테 그럽디다. 엄마. 엄마가 들고 있는 부경 계열사 지분들 그거 나 주면 안 돼요? 하고.”
계열사 지분이라는 소리 앞에 장선동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써 담담한 척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미소를 지었다.
“다 컸네.”
“그럼. 애 나이가 몇인데.”
“근데 벌써부터 그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건 좀 이른 거 아닌가? 손 서방이 뭐라고 안 했어?”
“없을 때 했지.”
“그래서?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이브닝 백에서 폰을 꺼내 무릎 위로 올려놓고 장혜란이 말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런 건가 보다… 하면서 귀담아듣지는 않았어. 그렇다고 딴에는 계산을 많이 해 보고 아버지 없을 때 용기 내서 엄마한테 그런 말을 꺼낸 걸 텐데 애 기죽게 무시를 할 수도 없겠는 거예요.”
“그래도 그런 말을, 그것도 먼저 하기엔 아직 좀 이르다.”
장혜란은 알고 있었다.
걱정을 하는 척 연기를 하고 있는 자신의 큰오빠가 현재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아마도 속으로는 자식 교육을 그렇게까지 시켜 놓지 못한 걸 비웃고 있겠지.
함께 미소를 지으며 장혜란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알았다. 지금 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회사들 말고 그게 갖고 싶다고 하면 주마. 그런데 그걸 내가 그냥 줄 수는 없다. 내가 널 믿고 그걸 너한테 줘도 되겠단 확신을 가질 수 있게 증명을 해 봐라, 그랬어요.”
“무슨 증명.”
“재경모직을 업계 1위로 올려놓아 보라고 했어요. 내가 한 말이긴 한데, 나도 까먹고 있었지. 그걸 이렇게 빨리 해낼 줄 낸들 알았겠수?”
이번엔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선동이 물었다.
“재경모직이 현재 업계 1위야?”
그 정도로 모직 관련 사업은 화학과 물산, 화재를 잡고 있는 장선동의 입장에선 관심 외 분야였다.
“아직은요. 그런데 아마 올해가 가기 전에 그렇게 될 거 같아요. 아니, 그렇게 될 거예요.”
“그걸… 정훈이가 한 거라고?”
“그러니까 애 들어오면 너무 애 취급하지 마시라고. 그래서 내가 혼자 먼저 들어온 거예요.”
장선동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을 여유 있게 받아 내며 장혜란이 다시 한번 말했다.
“오빠. 원래 돈 안 되는 사업이 손만 많이 가고 가는 손에 비해 표가 안 난다는 거 잘 알고 계시죠?”
“그래서 내가 자잘한 건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 아니냐.”
“1년도 안 걸렸수. 내가 그 약속해 준 지. 근데 그걸 해내더라니까?”
“…….”
“돈 좀 만들어 달라고 할 거요, 오빠한테. 그래도 오빠가 우리 애들 입장에선 양가 통틀어 최고 어른 아니요. 너무 애처럼만 보지 말고 진지하게 만나 줘요.”
“들어와 보라고 해.”
* * *
거래를 좀 해 볼까 해서요
장선동이.
내가 재경을 이끌던 시절 두어 번 정도 사돈 양반과 함께 홍명이를 데리고 밖에서 따로 자리를 가졌던 기억이 있다.
셈이 빠르고 처세에 능한 친구였다.
그런데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이 친구도 세월을 비껴가진 못했네.
얼굴에 쪼잔한 욕심 주름이 그렁그렁한 게, 요즘 젊은 친구들 표현대로 하자면 세월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젊었을 때 얼굴은 훤칠했던 기억이 있는데, 아마도 사돈 양반 돌아가시고 유산 상속을 받는 과정에서 뭔가가 자기 뜻대로 잘 안 됐던 모양이지.
화학에 통신까지 함께 잡았음 얼마나 좋았겠나.
그걸 바로 밑에 동생과 나눠야 했으니 속이 쓰렸을 만도 하다.
집안 궂은일은 혼자 다 맡았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내가 저 친구라도 아깝고 분해서 곱게는 못 늙었을 거다.
그러고 보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돌아가신 사돈 양반도 참 고약한 구석이 있다.
뭐 얼마나 자식들 모두 고루 만족시켜 주겠다고 이거 떼서 이놈 주고, 저거 떼서 저놈 주고… 그렇게 복잡하게 부경 그룹을 찢어 나눠 준 뒤 눈을 감으셨단 말인가.
그 덕에 지금 내가 부경을 압박할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거겠지만….
“외삼촌.”
“어, 그래. 들어와, 들어와.”
그리 가까운 관계는 아닐 것이다.
어느덧 정훈이로 1년 가까이 살고 있다.
부경가 둘째 집안 자식 결혼식 날 잠깐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이렇게 밝은 곳에서 말을 섞어 본 건 오늘이 처음.
그 결혼식 날 이후로 처음 보는 거니까, 특별히 집안 대소사가 있지 않은 다음에는 얼굴 볼 일이 크게 없는 관계였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우선 입구에서 적당한 깊이의 인사를 해 놓고 장혜란이 앉아 있는 소파 옆자리까지 반듯하게 걸어갔다.
“우리 정훈이가 언제 이렇게 의젓해졌어? 혼사 이야기 오가는 중이라고 하더니, 그래서 이렇게 부쩍 의젓해진 건가?”
장혜란이 이건 혼자 먼저 들어가서 분위기를 만들어 놓을 생각인가 했더니, 도대체 20분 넘게 이 안에서 뭘 했던 걸까?
어떻게 된 게 분위기를 내가 새로 만들어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장선동이가 인사차 던지는 우스갯소리에 가볍게 웃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 놓고 숨을 골랐다.
“그래, 네 엄마하고 이야기를 잠시 좀 나눠 봤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장혜란이 이 친구 이거.
답이 없는 사람일세.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나눴길래 돈을 만들러 온 사람을 돈을 꾸러 온 사람 취급을 받게 만드나?
아직도 재경과 부경 사이에 걸쳐서 방향을 못 잡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건가?
“돈이 필요한 건 맞는데, 빌리러 온 건 아니고요. 외삼촌만 여유가 된다고 하시면 거래를 좀 해 볼까 해서요.”
내 말에 장선동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부리는 재롱을 받아 주듯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냈다.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거래?”
“엄밀히 말하면 아직은 제가 직접 할 수 있는 거래는 아니고요, 어머니를 대신해서 제가 하는 거다… 하는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네 개인 장사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이 정도까지 분위기를 잡아 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면 최소한 응하는 성의 정도는 보여 줘야 할 텐데, 여전히 날 어린애 취급하고 있네?
이건 단순히 나만 어린애 취급하는 게 아니라, 재경이라는 이름 자체에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뜻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 같은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기분이 영 별로네.
난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장혜란을 한 번 쳐다봤다.
장혜란 역시 내 표정이 눈에 들어왔던지 장선동이의 태도에 불편한 내색을 하고 있었다.
동생의 표정 변화를 읽어서일까, 장선동이의 모습에서도 진지함이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래, 무슨 거래를 어떻게 하자는 건지 이야기나 한번 들어 보자.”
“저희 집에서 백화점 사업을 다시 가져올 계획을 하고 있는 중인 건… 혹시 알고 계세요?”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밖에서 기다리는데, 안에서 이야기가 길어지는 거 같더라고요. 같이 해도 될 이야기인데, 어머니가 먼저 하셨나 싶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장씨 집안 남매의 표정에서 더 이상은 웃음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 음… 정훈아.”
“네.”
장선동이 말했다.
“백화점이라는 게 말이다. 집 하나 사고파는 거랑은 그 개념이 많이 다르다. 더군다나 부경백화점은 네 막내 외삼촌이 회장으로 있는 부경유통의 지주사야. 그걸 내 앞에서 마치 동네 작은 건물 하나 사는 거처럼 가볍게 이야기를 해 버리면 내가 많이 당황스럽지 않겠니?”
“아….”
난 잠시 말을 끊어 놓고 장혜란을 다시 한번 쳐다본 뒤, 그 시선을 무겁게 장선동이 쪽으로 돌려 말했다.
“아직 오해를 하고 계시는 거 같습니다, 외삼촌.”
“무슨 오해?”
“부탁이 아니라 거래를 하러 온 거라고 조금 전에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부탁이 됐든, 거래가 됐든 중간에 가족이 끼어 있는데 그런 내용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해서야 쓰나.”
이쯤 되면 내가 아니라 재경 자체를 우습게 보고 있다는 걸로 이해를 해야 하겠네.
하긴, 고작 백화점을 지주사로 들고 있는 부경유통 쪽에서도 홍준이 놈을 그렇게 물티로 보고 있는데, 화학의 장선동이야 오죽할까.
“거래라는 건 합리적인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억지로 가족이라는 감정적 관계를 쑤셔 넣으시면 저희 재경은 다른 거래 상대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게 말한 다음 장혜란에게 여긴 괜찮은 거래 상대가 아니라는 뜻을 담아 인중에 바람을 넣은 채 고개를 짧게 저었다.
“꼭 네가 재경을 대표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저는 그렇게 나왔습니다. 저희 쪽 회장님도 지금 제가 어머니와 함께 여기에 와 있는 걸 알고 계시고, 비록 여기보다 더 중요한 자리가 있으셔서 함께 오시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이야기를 잘 끝내고 오라는 당부까지 하셨습니다.”
“여기보다 더 중요한 자리?”
“아마도 지금쯤 부경유통 회장님과 자리를 하고 계시겠네요. 저희 쪽에서 부경유통이 가지고 있는 백화점을 다시 가져와야겠단 말씀을 하고 계신 중일 겁니다.”
장선동은 실눈으로 장혜란을 쳐다봤고, 장혜란은 그저 한쪽 입꼬리만 크게 노골적이지 않게 말아 올리며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다시 떴다.
“거래라는 건 뭔가 가치가 비슷한 걸 주고받아야 하는 건데, 재경이 돈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난 재경이 가진 것들 중에 돈을 주고 가져올 만한 게 없어.”
“아뇨. 저희 재경에서도 외삼촌께 팔 만한 물건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거래야?”
“재경에는 없지만, 제 어머니에겐 있는 거.”
“……?”
“제 어머니보단 외삼촌이 더 많이 가지고 계시지만, 전부를 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제 어머니가 가지고 계신 게 항상 불안하고 신경이 쓰이시는 거.”
자세를 살짝 고쳐 잡고 앉아 말을 끝맺었다.
“부경화재의 지분 12퍼센트를 팔아 볼까 합니다.”
“……!”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은 느낌상 내가 입을 열지 않는 다음에야 쉽사리 깨어질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나와 장선동이의 입장이 바뀔 차례이니까.
“뭐를 팔겠다고?”
“제 어머니가 들고 계신 부경화재의 지분 12퍼센트를 준비해 왔습니다.”
장선동이가 가지고 있는 계열사 중 물산과 더불어 화재가 원래는 우리 재경의 것이었다.
시가 총액 11조 400억.
부경백화점 하나 다시 가져오는 데 물산 지분 12퍼센트까지 꺼낼 필요는 없고, 장선동이가 이걸 잡겠다고만 하면 내어 줄 생각이다.
어차피 부경 쪽으로 넘어간 원래 우리 재경의 계열사들을 한꺼번에 모두 다 가져올 순 없는 일.
하나하나, 차례대로, 먹기 쉬운 순서대로 가져오면 그만이다.
“푸훕.”
장선동이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혜란아.”
장혜란은 고개만 살짝 돌려 장선동을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설마 이거 지금 손 서방 계산이야? 손 서방 계산이라고 하기엔 색깔이 너무 다른데?”
“아까 뭐 들었어요? 내 말했잖수. 내가 데리고 온 게 아니라, 정훈이 얘가 날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든 거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