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49)
대신 객실 문을 열어 주며 강 과장이 말했다.
“잠시만 쉬고 계세요. 금방 가방만 넣어 놓고 오겠습니다.”
* * *
지사장이 무척 만족스러운 레스토랑을 소개해 주었다.
무거운 푸아그라가 식전 음식으로 나오는 프렌치 스타일의 스테이크 전문점이었다.
도톰한 푸아그라가 올려진 앞접시가 들어왔고, 적당히 말랑한 그것을 버터 나이프로 덜어 딱딱한 바게뜨 빵에 발라 먹는 게 끝이 날 즈음 메인 요리가 올라왔다.
사각의 흰 접시 위로 적당한 두께로 썰어진 스테이크용 생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총 여덟 덩어리였는데, 말이 적당한 두께라는 거지 스테이크용 고기치고는 얇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게 생고기라는 게 함정이었고.
일반적인 스톤 스테이크도 아니고, 아무런 온도도 없는 그저 흰 사기 접시 위로 생고기가 올려져 식탁 위로 올라왔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조리를 해 주겠다는 건가….
색다른 요리 앞에 상상력을 만들어 내기도 전에 뜨겁게 달궈진 냄비를 들고 주방장이 직접 우리 테이블로 찾아왔다.
생고기가 올려진 접시 위로 붓기 시작하는 게 뜨겁게 녹인 버터라고 했다.
그 버터를 고기 위로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 한 번에 모든 고기가 다 잠길 정도로 부어 버린 주방장은 집게로 고기를 뒤집어 가며 어느 정도 자기가 만족하는 선까지 고기가 다 익었다고 판단을 했던지 빈 접시에 익은 고기들을 덜어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능숙하게 핑크 솔트를 뿌렸다.
그걸 딱 한 입 입에 넣어 씹기 시작하는데….
이야, 무조건 오늘 저녁은 내가 사야겠다 싶었다.
지사장의 안내로 오긴 왔는데, 음식의 수준을 보아하니 분명이 어느 정도 가격이 나가는 집이 틀림없었다.
이런 고급 식사 계산을 지사 법인 카드로 하게 만들 순 없는 일 아닌가.
내가 계산을 해야겠단 결심이 서는 순간, 와인도 좀 수준이 맞는 걸로 새로 한 병 다시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한 와인 리스트가 들어왔고, 내게 오려는 와인 리스트를 지사장이 가로채려 할 때, 그걸 내가 다시 뿌리치는 순간 이 자리의 식사 계산은 내가 하는 것으로 암묵적 합의가 이뤄진 거였다.
새로 도착한 와인으로 입을 헹궈 내며, 지사장과 고 부장에게 부탁했다.
“리안 그 양반이 몇 명이나 받아 주겠다고 할지 모르겠네요. 한국에서 제가 레시피를 받을 사람을 보내면, 그 사람들 비자를 방돔 지사에서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체류를 시키면서 레시피를 배우게 할 계획이신데요?”
지사장의 물음에 난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다가 대답했다.
“제가 그 집 마카롱을 한국에 가져가 봐야겠다고 결심을 한 게, 작년 추석이었어요.”
“작년 추석이었으면….”
“네, 처음 제가 생뚜앙 지사를 방문해서 그집 마카롱 맛을 봤을 때였죠. 그동안 계속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쨌거나 제 소속은 모직이니까요. 그렇게 오래 기다린 만큼, 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맛을 그대로 가져와야 하는 거기 때문에, 급하게 서두를 생각은 없습니다. 레시피를 전수받을 사람들이 충분히 숙련이 될 때까지 기다려 줄 계획이에요.”
역시나 지사장도 강인성 과장과 비슷한 염려를 내게 표했다.
“그런데 아직은 모직에 계시는 거잖아요.”
“그렇죠.”
“식품 쪽 분들이랑은 이야기가 다 끝난 내용입니까?”
내 생각을 먼저 들은 강 과장은 그저 말없이 식사에만 집중을 했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요령껏 조율하면 되는 부분이니까. 제가 한국에서 사람을 뽑아서 보내면, 비자부터 주거 부분, 그리고 필요에 따라 통역 부분까지 준비를 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제가 본사에 계신 사장님께 승인을 받고, 준비해 드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여기 고 부장 시켜서 협조를 하겠습니다.”
난 그 내용을 고 부장이 책임을 지고 진행을 하는 것보다는 다른 인물이 맡을 수 있게 준비를 해 달라고 지사장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고 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아무리 식품의 직원들이 오는 거라도, 비자 관련된 내용이나, 주거 부분은 제가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장님은 이제 한국 들어올 준비 하셔야죠.”
“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처음부터 2년 이야기하고 와 계시는 거 아닙니까.”
“그야….”
“방돔 지사 이전 건부터 시작해서 주재원 티오 확대까지, 큰일은 이미 다 해 놓으셨잖아요. 이제 들어오셔야죠.”
그 부분에 있어선 고 부장 본인도 궁금한 게 많다며 조심히 운을 띄웠다.
“저도 집사람이랑 딸애 데리고 올 때 2년을 이야기하고 들어온 게 맞긴 하는데, 아직 본사 쪽에서 별다른 말이 없네요. 지금쯤이면 어떤 자리가 비어 있다는 식으로 살짝 귀띔 정도는 해 줄 만도 한데, 아직 제가 본사 통해서 따로 들은 내용이 없습니다.”
지사장 역시 따로 들은 내용이 없다며, 고 부장이 느끼고 있을 갑갑함에 힘을 보태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온 거 아닙니까, 그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겠다고.”
“네?”
“제가 그때 말씀드렸잖아요, 처음 지사 생활하러 가실 때.”
“……?”
“지사장님이 지사 규모를 더 키울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시고, 인사적인 부분에서 지사를 지사답게 세팅을 해 놓고 복귀를 하실 땐 제가 정말 귀하게 다시 모시겠다고요.”
여전히 내가 무슨 제안을 할지 감을 못 잡겠다는 표정으로 고 부장은 나와 지사장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그게 무슨…”
“저랑 같이 식품 생활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어, 어디요?”
“재경식품이요.”
“식품이요? 제가요?”
“네. 앞으로 부장님과 식품에서 함께해 보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모직에서와는 달리 식품 쪽에선 부장님 정도 포지션의 제 사람이 한 분 정도는 꼭 필요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조동희 전무님과는 이미 이야기를 다 끝냈습니다. 조 전무님이 임원 자리 하나 만들어서 다시 본사로 불러 주기로 하셨다지요?”
“…….”
“그 자리 식품에서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 * *
나도 간다
자리가 많이 길어졌다.
손정훈 과장 일행을 호텔까지 모셔다드린 뒤, 천천히 걸어서 집에 도착한 고성표 부장.
엘리베이터에 올라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7년째 차고 있는 시계다.
몽블랑.
부장 승진이 확정되고, 첫 부장 출근 날부터 차기 시작했던 시계.
아내는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다고, 이참에 10년도 더 넘은 고물차를 팔아 버리고 차를 새로 한 대 뽑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었다.
짠순이 아내의 입에서 나올 만한 제안은 결코 아니었다.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고 부장은 앞으로 10년은 더 거뜬히 탈 수 있는 차를 왜 바꾸냐며, 5년 안에 임원 승진을 해내고 회사가 제공하는 차를 탈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아내가 던져 준 유혹을 뿌리쳤다.
대신 300만 원이 살짝 넘어가는 기계식 시계를 하나 샀다.
그렇게라도 스스로에게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부장이 롤렉스를 찬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고 부장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마음은 당연히 롤렉스를 사고 싶었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다음으로 욕심이 나는 브랜드가 오메가였다.
하지만 큰마음 먹고, 이 정도는 충분히 하나 구입할 수 있다는 연출을 해내며 오메가 숍으로 아내와 함께 들어갔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저 브랜드와 디자인이 너무 올드하다는 핑계로 그 옆에 있던 몽블랑 숍을 들어갔다.
클래식하면서도 심플한 디자인.
모델에 따라 이 정도면 충분히 질러 볼 수 있겠다 싶은 가격대.
대기업 인사부 부장으로 승진씩이나 했지만, 여전히 고 부장에게 시계 하나에 300만 원은 큰 사치였다.
그 시계를 벌써 7년째 차고 있다.
그리고 이 시계 이후로 아직까지 고 부장은 자기 스스로에게 아무런 선물을 못 해 주고 있었다.
“후우….”
분명 잘살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선방을 해내고 있는 삶이다.
더 이상 손에 꼽히는 간판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재경이라고 하면 한때는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걸출한 대기업 아닌가.
그런 재경의 모직 사업부에서 인사부장을 거쳐, 지금은 해외 지사로 가족들을 다 데리고 넘어와 딸아이는 국제 학교를 다니게 만들었고, 짠순이 아내는 이곳 한인 커뮤니티 안에서 사모님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할까.
왜 이렇게 지난 세월 열심히 살아온 노력에 비해 손에 거머쥔 게 없는 거 같은 걸까….
입사 동기 중 임원 승진을 가장 먼저 해낸 영업 이사 이명철은 시니어즈의 급성장과 퍼스펙티브의 성공적인 론칭, 거기에 따라온 기대 이상의 매출. 그리고 방돔 지사에서 섭외해 낸 많은 수입 명품 브랜드의 컨트롤 매출로 올 한 해 성과급으로만 4억 이상을 가져갔다고 한다.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왜 이렇게 계속해서 줄을 잘 못 서는 걸까….
“아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딸 나영이의 방문이 열리며 눈이 반쯤 감긴 딸아이가 반겼다.
“어, 벌써 잘려고?”
“10시 넘었어.”
“알았어. 들어가, 들어가 자.”
“수고했어, 아빠. 아빠도 얼른 씻고 주무세요.”
“그래. 들어가, 들어가.”
딸아이가 방으로 들어갔고, 침대 소파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던 아내가 현관까지 나왔다.
“많이 늦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끝났나 보네?”
“뭐, 그냥….”
“술 많이 마셨어?”
“아니, 네 명이서 와인 두 병.”
“아까 그 시간부터?”
“어.”
“피곤하겠다. 얼른 씻어.”
“그 혹시 집에….”
뭔가가 살짝 아쉬운 기분이 도는 고 부장이었다.
“응?”
“소주 남은 거 있나?”
“소주?”
“왜 그때 먹다가 반 병 정도 남겼잖아.”
“이틀 전에 갈비찜 하면서 거기에 넣었는데? 왜? 한잔 더 하시게?”
“아니, 그냥… 뭔가 조금 아쉽네.”
“맥주는 있는데, 맥주 한잔할래?”
“맥주?”
“아, 맞다! 이번에 선동이네 한국 들어갔다 오면서 사다 준 쥐포도 집에 있다. 내가 쥐포 구울 테니까 같이 맥주 한잔할까? 나도 입이 살짝 심심하던 참이었어.”
고 부장의 아내는 남편의 재킷을 받아 주며, 기분을 맞췄다.
“그럴까?”
“내가 술상 차리고 있을 테니까, 얼른 씻고 나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로 오늘 하루 바깥에서 얼어 있던 몸을 녹여 내며 고 부장은 생각했다.
과연 이게 기회인가, 아님 절대 잡지 말아야 할 썩은 동아줄인가….
손정훈 과장이 식품으로 옮겨 간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아쉬운 감정이 컸다.
그가 조금만 더 모직 생활을 한다면, 그래서 고 부장 자신도 지사 생활을 끝내고 본사로 돌아갔을 때 그와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그의 사람이 되어 아무런 경험도 없는 식품으로 넘어가는 건 불안했다.
모직을 제외한 항공과 식품, 그룹 본사까지… 핵심 자리에 앉아 있는 주요 인사들은 하나같이 손정태 사장의 사람들이다.
이건 자칫 재경에서의 생명 줄이 걸린 결정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버텼는데….
고 부장은 가장이었다.
근거 없는 기대보다는 조금이라도 선명한 확신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한 집안의 가장.
그럼에도 고 부장의 가슴엔 알 수 없는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상하게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
가늘고 길게 가는 게 직장 생활의 목표였던 고성표 부장이었지만, 이상하게 이번만큼은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이 도전을 한번 해 보고 싶었다.
샤워를 끝내고 거실로 나오자, 아내는 벌써 꽤 그럴듯한 술상을 받아 놓고 있었다.
고추장과 마요네즈가 함께 담긴 작은 양념 종지.
노릇하게 구워진 쥐포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져 있었고, 요즘 한국에선 비싸서 잘 사 먹지도 못하는 튼실한 딸기가 꼭지가 따진 채 접시에 담겨있었다.
작은 접시에 조미김을 옮겨 담는 것으로 술상 차림을 끝낸 아내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받으으시오, 바아드으시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