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50)
“따르으시오, 따아르으시이오…”.
아내와 함께 가벼운 짠을 한 다음, 단번에 반컵을 비워 버린 고 부장.
아내는 쥐포를 뜯으며 남편을 빤히 쳐다봤다.
“혹시 뭐 오늘 회장 아들내미 의전하면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런데 왜 생전 집에선 잘 찾지도 않던 소주를 찾아?”
함께 쥐포를 뜯으며 고 부장은 망설였다.
이야기를 해, 말아?
결국 고 부장은 둘러서 아내의 생각을 물어봤다.
“나영이는 요즘 학교에서 좀 어떻대? 이젠 수업 잘 따라가지?”
“즐겁게 잘하고 있어. 이번 주말에 같은 반 애 집에서 파티를 한다고, 거기에서 자고 와도 되냐고 묻길래 일단 내 선에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내일 아침쯤 당신이 못 이긴 척 그러라고 해 줘.”
“이런 거 보면 당신도 참 얄궂어. 왜 보내 줄 거면서 애 애간장을 태워?”
“이런 걸로 너무 쉽게 부모가 허락해 주는 버릇해 버리면, 나중에 한국 들어가서 애 적응 안 돼. 여긴 여기고, 한국은 한국이야. 부모가 적당한 선을 알려 줘야지.”
“당신은? 당신은 어때?”
“나?”
“당신이 제일 고생하고 있잖아. 나야 일하러 회사에 가면 결국 한국에서 하던 거랑 별반 없는 하루 일과. 나영이도 학교 가면 고만고만한 친구들이 있고. 당신 혼자 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할 거 아냐.”
맥주 한 모금을 마신 후, 고 부장의 아내가 물었다.
“왜? 이번에도 임원 승진은… 잘 안 될 거 같아?”
그에 고 부장은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못했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고 부장의 아내는 편하게 미소 지었다.
“내 생각은 그래. 원래 우리 계획대로 여기 생활 2년 정도 한 뒤에 당신이 임원 승진을 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겠지만, 아직까지 회사에서 아무런 말이 없다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해석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해.”
“…….”
“차라리 잘됐어. 여보. 당신 스트레스 받지 마. 애쓴다고 될 일도 아니고, 당신은 이미 애를 쓸 만큼 충분히 다 썼어. 임원 그거 달면 뭐 해? 말이 임원이지 결국은 재계약 못 하면 끝인 계약직인 거잖아.”
고 부장은 이런 아내가 항상 고마웠다.
“나는 우리 가족, 여기에서 2년 정도 더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진심이야?”
“당연하지. 우리가 지금 돈을 얼마나 많이 벌고 있어?”
“우리가?”
“그럼. 우리 살던 집 지금 월세 놓고 들어왔잖아. 거기에서 매달 들어오는 월세. 결국은 없던 수입이 잡히고 있는 거잖아.”
“그것도 곧 계약 기간 2년 다 되어 가네.”
“재계약하면 되지. 딴 데로 가겠다고 하면 다른 세입자 찾으면 되는 거고. 그리고 나영이 이제 영어 엄청 많이 늘었어. 불어도 곧잘 하고. 애가 당신 닮아서 언어 머리가 있어. 지금 나영이 상태로는 한국 학교 과정을 따라가게 만드는 거보다, 만약 우리가 2년 정도 더 여기 생활을 한다는 가정하에 언어 쪽으로 대학 수시를 준비하는 게 더 유리할지도 몰라. 아니면 아예 여기에서 대학을 들어가게 만들어도 되고. 어차피 대학 등록금은 당신 회사에서 자녀 학비 지원 쪽으로 받을 수 있는 내용이잖아. 그거 외국 대학교도 다 받을 수 있는 거지?”
“어.”
“스트레스 받지 말고 해, 여보. 지금 우리 나이에 진짜 돈을 버는 건 어디 안 아픈 거야. 이제 우리 나이가 그렇게 됐어. 이만큼 살면 됐지, 우리가 뭐가 아쉬워? 나도 나영이 방학 때마다 애 데리고 한 번씩 한국 들어갔다 나오는 걸로 충분히 여기 생활 2년 정도는 더 버틸 자신이 있으니까 당신만 괜찮다면 나도, 나영이도… 우리 다 괜찮아. 마음 편하게 먹어.”
* * *
새벽 1시.
고성표 부장은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한국의 출근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선 아내가 얕은 숨을 몰아쉬며 자고 있었고, 기다렸던 시간이 되자 고 부장은 조심히 침대를 내려왔다.
아내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히 양말을 찾아 꺼내 신고 외투를 챙겨 입을 때였다.
“어디 가?”
예민한 아내가 협탁 위 스탠드 불을 켜며 뒤척였다.
“자.”
“어디 가는데?”
“밖에 담배 한 대 피우러.”
“밖에 추워. 그냥 베란다에서 피워. 왜 안 하던 짓을 해?”
“한국에 전화할 일이 좀 있어.”
“……”
“자. 금방 들어올 거야.”
“두껍게 입고 가.”
고 부장은 외투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 넣어 그 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그는 그나마 이 시간에 불을 켜 놓고 있는 단지 내 공원 벤치로 향했다.
그곳에서 차가운 나무 벤치에 앉아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어렵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고 부장.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수화기 너머에서 조동희 전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무 아침 일찍 전화를 드리는 건 아닐까 했던 걱정도 잠시, 조 전무의 음성은 밝았다.
“출근하셨습니까, 전무님.”
―어, 이제 막 출근해서 커피 한잔하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거기 지금 몇 시야? 지금까지 안 자고 뭐 해?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잠시 통화 가능하시겠습니까?”
―그럼. 괜찮아.
“저기 전무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 부장은 용기를 냈다.
“다름이 아니라… 아직 본사에 제가 마땅히 갈 만한 자리가 없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잠시가 고 부장에겐 한참이었다.
―왜?
“아니, 그냥… 지금쯤 뭔가 이야기가 나올 만도 한데, 아직 아무런 말이 없어서요. 하하.”
―오늘 손정훈 과장 만난 거 아니었나?
“네, 만났습니다. 제가 직접 의전을 했고, 저녁도 지사장하고 다 같이 했습니다.”
―손정훈 과장이 별말 없었어?
그것 때문에 생각이 많아진 건데….
“그게….”
―이야기가 잘 안 된 거야?
“제가 아직 답을 못 했습니다. 식품 쪽으로는 제가 생각을 해 본 적이 전혀 없어서, 그 자리에선 많이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까….”
―왜? 괜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거 같고, 그래?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싱긋이 미소를 짓고 있을 조 전무의 얼굴 표정이 그려지는 고 부장이었다.
“그간 제가 재경에 입사를 해서 지금까지 해 온 게 인사인데, 식품 쪽에는 아는 사람도 거의 없지 않습니까.”
―인사만큼 소속 이동이 용이한 분야가 어디에 있나. 결국은 사람을 만지는 게 인사의 일이고, 지금까지 해 온 자네 경력이라면 어딜 가서든 그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건데.
“그것도 제가 어느 정도는 식품으로 넘어가서 비빌 구석이 있는 상태여야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모직이 아닌 식품으로 넘어간다면 저 하나 바로 설까 말까인데, 거기에서 제가 손 과장한테 힘까지 되어 준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저 혼자서 그걸 해낸다는 게… 저는 말이 안 되는 거 같습니다.”
―왜 혼자야? 누가 그래? 자네 혼자 간다고?
“강인성 과장이 손 과장과 함께하기로 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하고 강 과장은 입장이 크게 다르죠.”
―나도 간다.
“네, 그러니까요. 전무님도 같이 간다는….”
―…….
“네? 여보세요? 누… 누가 간다고요? 전무님도 식품으로 같이 가신다고요?”
―손 과장이 그 말은 안 하던가?
고 부장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땐 아예 기회가 없는 거야
아침부터 걸려 온 재경식품 편승일 사장의 전화.
정태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의아했다.
불과 며칠 전 편 사장과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정훈이가 식품 쪽으로 옮겨 간다고 하니까 잘 좀 부탁한다는, 형으로서의 형식치레를 했던 정태였다.
습관처럼 전화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정태.
통화를 시작한 후로 내내 사무실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네, 사장님.”
통화가 이어질수록 정태의 머릿속으로는 물음표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누구요? 조 전무님이요?”
순간 정태는 자신이 뭘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님 편 사장이 뭘 잘못 이해했거나.
―네, 평소 안 그러시던 분이 어제 먼저 전화를 주셨어요. 언제 시간 되면 같이 공이나 치러 가자고 하면서요. 사장이야 제가 먼저 달았지만, 어쨌거나 한때엔 제가 바로 옆에서 모셨던 분 아닙니까.
“네, 그렇죠.”
―저한테 갑자기 만약에 자기가 손정훈 과장과 함께 식품으로 옮겨 가게 되면 불편하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냐, 혹시 식품으로 오시는 거냐… 그렇게 물어보니까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서로 불편한 게 없었으면 좋겠다고만 말을 하고, 그 뒤로는 또 말을 흘리지 뭡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아무리 말을 흘리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음 구체적으로 무슨 말씀이신지 여쭤보지 그러셨습니까?”
―물어봤죠. 물어봤는데 조만간 같이 공이나 치자고,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가서 하자는 식으로 얼버무리시는 거예요. 잘 아시잖아요, 조 전무님 스타일.
정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 전무가 편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도 이해가 잘 안 됐고, 스너프 쪽으로 모셔 오려고 그렇게나 공을 들였음에도 고사를 했던 양반이 정훈이가 식품으로 넘어가는 게 확정이 된 이후, 같이 넘어갈 듯한 뉘앙스를 직접 풍기고 다닌다?
―혹시 사장님이 조 전무님을 따로 만나서 부탁을 넣으셨던 내용인가 싶어서요.
“제가요?”
―각별한 사이시잖아요, 두 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아무리 각별해도… 만약 그럴 거였음 제가 사장님도 함께 모시고 그런 이야기를 드렸겠죠.”
―네, 저도 그게 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룹 본사에서 따로 이야기가 내려온 것도 없는데, 꼭 우리 식품 쪽으로 오실 것처럼 말씀을 하셔서요. 사장님 말씀이 따로 있었다면 모를까, 제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헷갈리는 거예요.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지는 정태였다.
편 사장의 이야기만 듣고 뭔가를 판단할 순 없다.
하지만 조동희 전무는 결코 경솔한 인물이 아니다.
뭔가 아무런 의도가 없는 상태에서 편 사장에게 그런 연락을 넣었을 리가 없다.
편승일 사장의 재경식품 사장 자리 연임에 가장 큰 힘을 실었던 게 정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조 전무님이 저희 식품 쪽으로 진짜 온다고 하시면, 저나 모범태 전무 입장이 많이 난처해질 것 같습니다.
“난처해질 게 뭐가 있습니까?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시면 되는 거죠.”
―그래도 조 전무님은 그룹 안에서….
“저는 따로 들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몰랐던 내용이에요. 그리고 만약 실제 그렇게 인사이동이 이뤄진다면, 그룹 본사의 결정일 텐데 따르셔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네, 그럼요. 당연하죠. 저는 혹시라도 사장님 생각이신지, 그게 궁금해서 연락을 드려 본 겁니다.
“아뇨. 아마도 제가 아니라, 정훈이 생각일 듯싶네요.”
―손정훈 과장이요?
정태는 스마트폰을 귀에 붙인 채 창 앞으로 섰다.
창밖을 내다보며 정태가 말했다.
“조 전무님은 회장님께서 직접 그룹 본사 인물로 생각하고, 일부러 계열사 사장 자리에 앉히지 않고 계신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회장님 생각 역시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아….
“저도 아니고, 회장님이 그런 생각을 하실 이유는 더 없고, 그렇다고 조 전무님이 직접 그런 이동을 자발적으로 원하신 건 더더욱 아닐 거 아닙니까.”
―…….
“그럼 남은 건 정훈이밖에 더 있겠습니까? 남 사장이야 모직이 갑자기 커졌는데, 어떻게든 조 전무님을 곁에 두고 임원들 다지기를 들어가고 싶지, 딴 데로 빼앗기고 싶지는 않을 거고요.”
―네, 그건 그렇습니다. 지금 모직만큼 내부적으로 확장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 곳이 없는데, 지금과 같은 모직 상황이라면 남 사장 입장에서는 손정훈 과장의 이동이 확정된 이상 조 전무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일 텐데….
“며칠 기다려 보고, 따로 다른 연락이 없으면 사장님이 조 전무님한테 먼저 전화를 넣어 보세요. 공 치러 가자고 했다면서요?”
―빈말이 입에 달려 있는 분 아닙니까.
“그러니까요, 누가 진짜 같이 공을 치러 가랍니까? 그 핑계로 먼저 전화를 넣어서, 그때 말씀하셨던 게 무슨 뜻이었냐고 요령껏 떠보시라고요.”
―아, 네.
“제가 직접 물어보자니, 그렇게 하면 너무 자존심이 상할 거 같네요.”
―그게 무슨….
“저도 한번 모셨잖아요, 스너프로. 그때는 거절하시더니, 이번엔 움직이시네요? 와, 이런 건 생각도 안 해 봤는데, 이러면 갑자기 재밌어지는 건데?”
―…….
정태의 한쪽 입꼬리가 괴기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왜 안 그러시던 분이 착한 사람 뒤통수를 치시는 거지?”
―사장님 아직 확실한 내용도 아니고, 제가 좀 더 정확하게 알아보기 전까지는….
“제가 모셨거든요. 그것도 아주 정성스럽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