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51)
“지금 생각을 해 보니까, 그때도 정훈이 때문에 모직에 계속 남겠다고 하셨던 거 같네요. 저는 그런 거 같은데 사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저기 사장님….
“왜에에에!”
정태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나쁜 놈으로 만들지?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하아, 악해지게 만들까요, 사람들이… 사장님.”
―…네.
“혹시 제가 멍청해 보입니까?”
―그, 그럴 리가요.
“제가 좀 쉬워 보이고, 만만해 보이고 그런 건 아니죠?”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아니죠?”
―아닙니다, 사장님. 왜 그런 소릴 하십니까?
“그런데 저는 지금 이 순간 왜 제가 그동안 다른 사람들 눈에 쉬워 보이고, 만만하게 보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요? 기분 탓인가? 사장님.”
―…네
“제가 갑자기 기분이 많이 안 좋네요. 많이 언짢아요.”
―…….
“요 근래 그룹 본사에서 하는 걸 보면, 뭔가 확정이 나기 전까지는 저한테도 입을 다물고 있을 가능성이 크고… 사장님이 한번 알아보세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그리고 제가 사장님께는 이런 부탁을 따로 안 드리려고 했는데… 앞으로 식품에서 정훈이 관련 특이 상항이 생기면 저한테 바로바로 전달을 좀 해 주세요.”
―…네,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말씀을 안 하셨어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게 당연한 건 아닌데, 당연하게 생각을 하도록 상황이 절 그렇게 만드네요.”
편승일 재경식품 사장과의 통화를 끝낸 손정태.
그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바닥을 향해 있는 힘껏 집어 던지려다, 이내 이성을 되찾고 침착해지려 애를 썼다.
“후….”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해 놓고,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다시 한번 정돈했다.
그렇게 천천히 이성을 되찾은 정태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허, 허허… 하, X발… 이거 진짜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 설마… 나랑 제대로 한번 놀아 보자는 건가?”
* * *
정엽이를 만났다.
작년에 만났을 때와 비교해, 오히려 힘이 덜 들어간 모습이었다.
작년에 녀석이 제 처와 아들 데이빗을 함께 데리고 나왔을 땐, 내게 뭔가를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부경호텔의 지분 11퍼센트를 확보하고 있는 프랑스 투자 회사 ‘드모어’의 가려진 실질적 지주라는 내용, 그리고 그 드모어가 프랑스 로컬 호텔 브랜드 ‘드 누락’을 지주사로 두고 있는 약간은 특이한 구조의 투자 회사라는 내용 따위를 내게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자리에 하고 나온 행색은 다소 초라했지만,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고, 날 상대하는 눈빛과 말투에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번 자리에선 달랐다.
이미 내가 ‘마뉴엘 엠흐’라는 자신의 장인어른을 바지로 앉힌 드모어의 실체를 알고 있다는 내용을 태산이나 하늘이를 통해 다 이야기 들었겠지.
타이가 빠진 정장 위로 고급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고 자리에 나왔는데, 이제야 몸에 딱 맞는 제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슨 옷을 어떻게 입고 나왔든 난 그저 제 애비를 그대로 빼다 박은 녀석을 이렇게라도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을 뿐이었다.
“이게 다 뭐야? 설마 이것들 다 한국에서 가져온 거야?”
“별거 아냐. 데이빗 생각나서 몇 개 좀 사 봤어.”
“뭔데?”
정엽이는 내가 들고 온 쇼핑백 두 개를 차례대로 열어 보며 경악을 했다.
딱히 경악할 정도로 특이한 건 없는데, 놀라는 척이 퍽 과장스러웠다.
“그때 보니까 한국말을 아예 못 하는 거 같더라. 집에서 한국말은 안 가르쳐?”
“조금씩 해. 그런데 억지로 가르치거나 하진 않아.”
한글로 되어 있는 그림책을 몇 권 사 왔다.
버튼 같은 게 달려 있어서, 그걸 누르면 그림을 설명해 주는 짤막한 설명이 나오는 동화책.
3, 4세용이긴 한데, 작년에 데이빗을 보니까 3, 4세용도 어쩌면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건 또 뭐야?”
“이건 하늘이가 같이 가서 고르는 거 도와준 거야.”
그리고 데이빗의 옷도 몇 벌 챙겨서 왔다.
“야, 이런 건 여기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들이잖아.”
“직접… 사 주고 싶었어.”
그 시절엔 다 그랬다… 하면서 혼자 넘겨 버릴 수도 있는 일.
하지만 이렇게 외국에 떨어져 나와 살고 있는 정엽이 놈을 생각하면, 부족했던 부모로서의 역할에 가슴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홍명이 놈, 홍준이 놈, 그리고 여정이까지….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녀석들의 옷을 골라 준 적이 없었다.
안사람이 그런 걸 참 잘하는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내게는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안 했겠지.
그런데 이번 파리 일정을 준비하면서, 이상하게 정엽이 놈의 아들, 데이빗의 옷을 몇 벌 내 손으로 직접 골라서 가져와 보고 싶었다.
“아무튼, 고맙다. 가져가서 삼촌이 사 줬다고 꼭 말해 줄게.”
“삼촌이라고 하면 난 줄 아나?”
“직접 본 삼촌은 아직은 네가 유일하니까.”
내가 챙겨 온 데이빗의 선물들을 정엽이가 잠시 옆으로 치워 놓는 동안, 난 아무리 봐도 홍명이 놈을 그대로 빼다 박아 놓은 녀석의 모습에 다시 한번 가슴이 아려 왔다.
내가 그놈을, 내 자식 놈들을… 내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했었구나.
쇼핑백을 대충 한 곳으로 치워 놓고, 정엽이 놈이 물잔을 들려고 할 때 물어봤다.
“한국엔 언제 들어올 생각인데?”
“한국? 글쎄… 태산이 할아버지도 뵐 겸 한번 들어가긴 들어가 봐야 되는데, 시간이 잘 안 나네.”
“아니, 언제쯤 결심을 할 거냐고.”
“결심? 무슨 결심?”
“뭘 모르는 사람처럼 물어?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면서. 부경호텔 지분 11퍼센트. 그거 언제 쓸 건데?”
“…….”
“몇 푼 되지도 않는 배당금이나 타 먹자고 그 큰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싱겁게 웃어 버리며, 대답을 피하는 정엽이었다.
“이번에 우리 재경에서 부경의 백화점, 면세점, 아웃렛 다시 가져오는 거 봤지?”
“정확하게는 재경이 한 게 아니라 네가 한 거지.”
“호텔까지 내가 가져오게 만들 거야?”
“……!”
“직접 해, 호텔 정도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방금 내가 한 말에 어려운 내용이 있었나? 직접 하라고, 호텔을 가져오는 건. 손정엽이 직접 부경이 가져간 우리 재경의 호텔 사업권을 가져오라고.”
“…….”
“안 그럼 내가 할 수밖에 없어. 그럼 그땐 아예 기회가 없는 거야. 난 내 손에 들어온 건 그게 누구라도 절대 안 나누거든. 그러니까 너무 계산 많이 하지 말고 내가 도와주겠다고 할 때 한국 들어와서 부경호텔 가져가.”
“푸하, 하하하… 도와줘? 네가? 네가 어떻게 날 도울 건데?”
“아까부터 뭘 다 알면서 떠보듯 물어, 묻긴. 유통 쪽 쪼갠다고 화재 지분은 넘겼지만, 아직 물산과 건설, 호텔 쪽으로 각각 12퍼센트씩 지분을 가지고 있어.”
“그게 네 지분이야? 네 엄마 지분이지.”
“무슨 소리야? 원래 우리 재경 거였어. 고작 지분 말고, 그 사업들 전부가. 거기에 내 엄마라는 사람의 지분은 존재할 수 없어.”
다소 놀랍다는 듯 정엽이의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다.
“엄마라는 사람?”
“잠시 지분 명의가 그렇게 돌아가 있는 거뿐이지, 결국은 우리 재경 거야. 그중에 하나 정도는… 가져가란 말이야, 내 말은.”
“너 지금 이 말… 진심이야?”
“진심이라고 하면 믿기는 할 거고?”
“……?”
“그게 중요해? 내가 지금 12퍼센트 지분으로 지원을 해 주겠다고 하잖아. 부경을 상대로 한번 싸워 보라고. 내가 먼저 싸워봤잖아. 별거 없어, 맹물들이야.”
“진심이냐고.”
“질문은 그게 진심이냐가 아니라, 지원의 대가로 뭘 원하느냐가 되어야 맞는 거 아니야? 질문이 그런 식으로 들어와야 거래가 되지.”
* * *
그러니까 믿어
정엽이가 물었다.
“거래? 지금 나랑 거래를 하자고?”
“우리 관계에서 지금 당장 진심으로 할 수 있을 만한 게 그리 많지가 않더라고. 거래부터 시작하면서 천천히 관계를 쌓아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어.”
시간이 필요하겠지.
시간이 충분하더라도, 녀석이 불편하다면 강요를 하고 싶지는 않고.
정엽이의 인생이다.
녀석의 감정이고.
내가 녀석에게 주고 싶었던 것, 남기고 싶었던 것을 지금부터 해 주겠다고, 녀석의 지난 인생과 고민, 삶 전체를 내 마음대로 변화시킬 마음은 없었다.
난 그저….
내가 해 주고 싶은 것만 해 주면 된다.
선택은 녀석의 몫.
“거래로 관계를 형성하자?”
“한번 해 보고 괜찮다 싶으면 친해져 보는 것도 해 보면 좋을 거 같고.”
“너 이러는 거 작은아버지는 알고 계셔?”
홍준이에 대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이야기는 해야겠지. 그래야 내가 호텔 지분을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아직은 모르신다는 말이네. 허, 네 아버지가 잘도 날 지원하라고 그 지분을 내어놓으시겠다.”
“어, 내어놓을 거야.”
“…뭐?”
“그건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거기까지 사서 걱정을 할 필요는 없고, 해야 할 것만 생각해. 그것만 해도 할 게 많지 않나?”
“…….”
“언제까지 준비만 할 건데? 언제까지 생각만 할 거야? 나는 부경유통을 찢어 놔야겠다 결심하고 반년 만에 백화점을 다시 가져왔어. 그간의 이자로 면세점, 아웃렛까지 업어서. 그때 내 손에 있었던 건 부경유통 지분 12퍼센트, 그리고 화재 지분 팔아서 만든 현금이 전부였어. 부경호텔 지분 11퍼센트 가지고 있잖아. 거기에 내가 12퍼센트를 태워 주겠다고 하고 있고. 20년 넘게 손톱을 숨기고 준비를 했으면서, 이런 기회 앞에서까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건 다시 가져올 마음이 없다고 내가 봐야 하는 건가?”
놀랍다.
어쩜 이렇게 생각이 깊어진 얼굴 표정까지 제 애비를 쏙 빼닮았을까.
“거래? 나쁘지 않네. 그래, 그런 관계라면 내가 이 기회를 안 잡을 이유도 없고. 조건이나 한번 들어 보자.”
“조건이 좀 많아. 그런데… 딱히 어려운 내용은 없을 거야.”
“말해 봐.”
“첫 번째. 5년간 지분 비율은 그대로 유지를 한다. 11퍼센트, 12퍼센트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말이 아니야.”
“알아. 지분 비율이라고 했잖아. 앞으로 5년 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지분이 너희 쪽 지분을 앞질러선 안 될 거란 소리 아냐?”
“맞아.”
“5년 뒤엔 앞질러도 된단 말이고.”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뭐?”
“내가 말한 조건을 다 만족시킨다면 5년 뒤엔 그 지분을 다 던질 거니까.”
“던진다면….”
“공시 가격에 맞춰서 던질 테니까, 능력껏 주워 담아.”
앞으로 5년은 이런 식으로라도 데리고 있으면서 바람막이 역할을 해 줘야 하지 않겠나.
“상당히 비논리적인데, 지금은 내가 네 말을 믿는 수밖에 없겠지? 좋아, 다른 조건은?”
“호텔 사업에 재경의 이름은 쓰지 않는 걸로.”
“…….”
“재경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다 같이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는 뜻이야. 할아버지, 큰아버지, 지금의 회장님, 그리고 부경의 역사는 아예 다 지워 내고 손정엽의 호텔로 만들어.”
정엽이 놈의 눈매가 매섭게 가늘어졌다.
“손정태는 스너프에서 손정태의 왕국을 만들어 나가고 있어. 나도 그럴 거고. 그러니 손정엽도 호텔을 기반으로 손정엽의 왕국을 만들어 가란 뜻이야. 괜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재경의 과거에 혼자 발목 잡혀 있지 말고.”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게 되겠어?”
“그 정도도 못 해낼 상대라면, 나는 다른 상대를 찾아야지. 아님 내가 직접 하든.”
“…….”
“감정 섞인 비즈니스만큼 질척거리는 게 없어. 비즈니스 판엔 돈 말고는 따로 심판이라는 게 없거든.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고… 그런 걸 가리는 건 돈이 안 되잖아. 나라고 지금 이 자리가 편할까. 손홍준 회장이라고 손정엽이의 존재가 편할까. 그럼에도 우린 비즈니스를 하겠다는 사람들이니까, 감정보다는 실리를 먼저 따져 봐야 하는 거 아니겠냐고. 그게 비즈니스니까.”
“…….”
“정 과거 일에 억울한 게 안 없어질 거 같음, 손정엽이의 왕국을 손정태, 손정훈, 그리고 재경, 부경의 왕국보다 더 크게 만들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압도적으로 키워 내. 그럼 그때엔 선택권이 많아져. 삼킬 수도 있고, 밟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거야.”
“너….”
“나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하는 건 미련한 거야. 고만고만한 상대하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것만큼 수준 낮은 비즈니스가 없어. 진짜 비즈니스를 해, 지금부터는. 비즈니스에 그간 감정을 섞어 왔기 때문에 20년이란 세월 동안 계속 칼만 갈아 왔던 거야. 언제까지 칼만 갈 건데? 갈 만큼 갈았음 잘 드는지 확인을 해 봐야 할 거 아냐.”
테이블 위로 올려진 정엽이 놈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