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52)
난 그런 정엽이를 강하게 쏘아봤고, 한참 동안 눈싸움이 펼쳐졌다.
물러서 줄 생각 따윈 없었다.
지난 녀석의 세월에 측은지심을 느끼고, 가엽게 봐 줄 마음 따윈 더더욱 없었다.
지금 녀석이 하고 있을 어리석은 생각을 처참하게 깨부수어 놓아야, 녀석이 한 발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역시나 홍명이 놈의 아들, 나 손중길이의 손자란 말이지?
자기 역시 물러설 마음이 없다는 듯, 꽤 한참 동안 날 쏘아보는 정엽이었다.
여전히 녀석의 사연 많은 두 눈을 쏘아보며, 커피 컵을 입술에 붙였다.
그러자 녀석도 크게 심호흡을 하며 눈에서 힘을 풀었다.
“다른 조건 또 있어?”
“세 번째. 그 5년 안에 손정엽이의 호텔을 대한민국 1등 호텔 브랜드로 키워 내. 만약 그게 안 되면, 난 5년 뒤에도 호텔 지분을 던지지 않을 거고, 그때부터는 호텔 경영에 직접 참여를 할 거야.”
“너 설마 지금 날 가르치겠다는 거야?”
“배울 게 있다면, 그리고 그 배움이 내게 반드시 필요한 거라면 원수라고 스승으로 못 삼을까.”
“아주 닳고 닳았네.”
“내 자리에서 정의롭고 순수하단 소릴 듣는 것만큼 굴욕적인 소리가 어디에 있겠어? 뭐가 정의롭고 뭐가 순수한 건지 구분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거야. 그 구분을 못 하는 게 문제인 거지.”
“조건은 그게 끝이야?”
“아니, 하나 더 있어.”
“말해 봐.”
“할아버지 기일은 몰라도… 앞으로 할머니 기일엔 꼭 참석을 해.”
정엽이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는 처음으로 내 눈을 피했다.
“집안 장손이라고, 그 약한 몸으로 직접 업어 키웠다…고 들었어.”
“…….”
“할머니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런데 왜 얼굴을 안 보여 줘? 왜 엄한 상대한테 화풀이를 하냐고.”
“화풀이? 너 지금 내가 돌아가신 할머니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라고 한 거야?”
“그런 게 아니라면 1년 365일 중에 하루, 그것도 하루 종일도 아니고 잠시 한두 시간 불편한 걸 못 참아?”
“내가 불편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진짜 불편할 사람이 따로 있다면, 그 사람이 불편해하면 되는 거지. 호텔 지분 12퍼센트 지원받는 거치고는 아주 쉬운 조건 아니야? 매일 참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딱 하루, 그것도 한두 시간만 눈 딱 감고 참으면 되는 건데.”
가늘게 뜬 눈으로 날 한참 동안 쳐다본 뒤 정엽이가 물었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나는 손정엽이라는 남자가 불편한 걸 못 참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 줄 아는 남자이길 바라.”
“뭐?”
“그 정도는 되는 남자여야, 호텔 지분 12퍼센트를 믿고 맡길 수 있지 않겠냐고.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투자인데, 불편한 거 하나 못 참고, 실리가 아닌 감정에 이끌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베팅을 할 수가 없는 거잖아. 베팅을 해 보기로 결정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내게 증명해 줘. 우리 가족을 불편하게 만들어 봐. 만약 할 수 있다면 우리 가족을 상대로 인정이라는 걸 받아 내면 더 좋고.”
“아주 재밌는 놈이네? 주제를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막 넘어. 네가 지금 날 테스트해 보겠다, 그런 거야? 그간 내가 이곳 파리에서 지난 20년 넘는 세월을 무슨 각오로 버티며, 살아왔는지 그걸 알기나 해?”
몰라도 알 거 같다.
그래서 이 할애비는 네가 안쓰럽기보단 대견해 보이기만 한다.
미안한 건…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거고.
“나는… 뭔가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사람이 인정으로 보답을 받는 순간만큼 아름다운 순간을 본 적이 없어.”
“…….”
“지난 20년 넘는 세월, 손정엽이라는 사람이 한국을 떠나 이곳에서 무슨 각오로 버티며 살아왔는지 난 알 방법이 없지. 하지만 쉽지 않았을 거라는 거, 그리고 드모어, 마뉴엘 엠흐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부경백화점의 지분을 11퍼센트나 긁어낸 이유와 그걸로 하고자 하는 목표는 충분히 알 거 같아. 난 그 20년 넘는 세월과 그 세월 동안 해 왔던 손정엽이라는 남자의 노력이… 우리 가족한테도 인정을 받길 바라는 거야.”
“나는 너희 집 사람들의 인정 따윈 필요 없어. 네가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 같다.”
비웃음을 입가에 달고 정엽이가 말했다.
“내가 너희 집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 주겠다고 지금까지 미친 듯 살아온 거 같아?”
“착각은 내가 하고 있는 게 아닌 거 같은데?”
“뭐?”
“손정엽이라는 사람이 어디에서 얼마만큼 미친 듯이 열심히 살아왔다는 거… 그걸 우리 가족들이 궁금해할 거 같아?”
“……!”
“그게 왜 궁금해? 아무리 미친 듯이 열심히 살았어도, 결국은 지난 20년간 해낸 게 고작 부경백화점 지분 11퍼센트를 긁어낸 게 전부인데. 애썼네… 하는 정도가 고작이지, 그 호텔 지분 11퍼센트가 대세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거 같아? 딱 거기까지인 거야, 재경이 없는 손정엽의 혼자 힘은.”
그래, 그렇게 악을 품어라.
그렇게 못 견딜 정도로 분함을 느껴라.
지금 네 위치를 정확하게 보고, 인정해라.
나머지는 이 할애비가 옆에서 도와주마.
“그러니 우리 집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보라고. 미안함, 죄책감이라는 것도 상대가 눈에 보여야 생기는 거야. 눈에 안 보이면… 잊혀지는 거야. 손정엽. 재경가의 장손이라는 존재. 잊혀지지 말고, 계속 유지하라고. 그래야 내가 손정엽을 믿고 투자할 명분이 생기는 거야. 나도 명분이라는 게 필요하거든. 아직은 재경이 내 것이 아니잖아.”
“아직은?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는 말 같다?”
“그러니까 호텔에 재경의 이름은 쓰지 말라고.”
“…….”
“손정엽의 왕국을 만들어. 손정엽만의 왕국을 만들어. 누군가와 왕좌를 놓고 싸워야 하는 왕국이 아니라, 아무도 쉽게 넘볼 수 없고, 아무도 감히 토를 달지 못하는 손정엽만의 왕국. 지금의 재경보다 더 크고, 완벽한 왕국. 더 이상은 이미 놓친 거에 미련한 미련을 두지 말고.”
뜬금없이 정엽이 놈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
“이제야 좀 알 거 같네.”
“뭘?”
“태산이 할아버지가 어째서 나한테 너랑 만나 보라고 하셨는지.”
후련하게 한바탕 웃어 놓고 정엽이가 말했다.
“말이 안 되는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그 말이 안 되는 짓들을 거짓말처럼 말이 되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하시더라.”
“날 좀 좋게 보고 계셔.”
“내가 널 믿어도 되는 거야?”
“보통은 이런 질문에 요즘엔 이런 대답이 트렌드라고 하지?”
“……?”
“사람을 믿지 말고 돈을 믿으라고.”
“네가 들고 있는 호텔 지분을 믿으란 소리야?”
“아니, 난 트렌드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트렌드를 따른다는 게 결국은 대세의 눈치를 본다는 뜻이잖아. 내가 눈치 보는 걸 별로 안 좋아해. 취향이 좀 올드해서.”
“…….”
“믿어. 날 믿어. 우리… 가족이잖아. 내가 직접 다치면 다쳤지, 두 번 다시 내 가족이 다치게는 안 해.”
정엽이 다시 물었다.
“네가 내 왕국까지 생각을 하고 있는 이유는?”
“동맹.”
“…….”
“멋질 거 같지 않아? 난… 아주 재미가 있을 거 같은데?”
“부럽네. 그런 상상에 재미를 느낄 여유도 다 있고.”
“내가 꿈을 좀 크게 꾸는 편이거든. 그래서 작은 것들은 눈에 잘 안 보여. 그런데도 계속 손정엽이라는 존재가 눈앞에 보인다는 건… 아마, 내게 손정엽의 존재는 절대 작은 존재가 아니란 뜻일 거야.”
“…….”
“그러니까 믿어. 내가 말한 그 조건들만 지켜 주면, 나도 약속 지켜.”
* * *
왜 갑자기 나한테 친절해?
―하늘쓰.
결혼이라는 정략적, 혹은 전략적 관계로 발전이 되어 가고 있던 두 사람.
하지만 아직 두 사람 사이에 뚜렷한 감정선이 발전되어 가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늘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관계는 자신의 감정만 일방적으로 흐르고 있는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그러던 차에 파리 출장을 떠난 정훈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전화를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너 내일 저녁에 약속 있어?
“내일 저녁?”
크게 중요한 약속 같은 건 없었다.
사무실 사람들끼리 가볍게 팀 회식을 하자는 이야기가 오고 가긴 했지만, 그 역시 얼마든지 오늘, 혹은 이틀 뒤로 조정을 할 수 있는 내용이었고.
“글쎄? 지금 당장 기억나는 스케줄은 없는 거 같은데?
―잘됐네. 공항 떨어지는 시간 4시 반. 짐 찾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6시 조금 넘어서 회사 앞까지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그때 할아버지 드셔 보라고 마카롱 사 갔던 거 기억나지?
“또 무슨 마카롱 타령이야?”
―아, 기억나잖아.
“기억이야 나지.”
―너 그거 안 먹어 봤댔지?
사실 먹어 봤다.
먹어 봤는데, 단 걸 싫어해서 안 먹어 봤다고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
“근데 왜?”
―내가 지금 막 그 집에다가 마카롱하고 티라미수를 예약해 놓고 오는 길이야.
“예약까지 해야 하는 집이야?”
―아니, 원래는 아닌데, 이번에는 티라미수도 한국에 가져가 보고 싶다고 했더니, 특수 포장을 해 주겠다네. 기가 막혀. 마카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집 티라미수도 예술이다? 티라미수는 가급적 24시간 안에 먹어 주는 게 좋대. 그도 그럴 게, 거기에 럼이 들어가.
“뭔 소릴 하는 거야, 도대체?”
―내일 공항 가기 바로 전에 픽업해서 어떻게든 온도 맞춰서 가지고 가 볼 테니까, 네가 내일 맛 좀 봐라.
“지금 거기 티라미수,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티라미수 맛보라고 내일 저녁 시간을 비워 두란 말이야?”
―설마 내가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는 티라미수를 들고 가겠어? 안 그래도 짐도 많은데. 달라. 네가 그간 티라미수라고 알고 먹었던 건 그냥 크림 덩어리였다고만 생각하고 있어. 이 집 건 아예 달라.
하늘이는 웃고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방법은 비록 서툴고 촌스러웠지만, 다행히도 정훈이가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어쩌면 마음은 진작부터 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태양이를 집으로 초대해, 복학을 하게끔 만들었을 때부터 하늘이는 그런 확신 비슷한 걸 가지고 있었다.
마카롱과 티라미수.
그 명분이 촌스럽고 너무 성의가 없어 보이긴 해도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감정적 애를 쓰는 정훈이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유치하거나 미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하늘이는 자신이 정훈이라는 사람에 대해 여전히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걸 바로 알게 됐다.
정훈이는 정말 자신에게 마카롱과 티라미수를 먹여 보기 위해 한국에 떨어짐과 동시에 자신을 만나러 왔던 거였다.
회사 앞 커피숍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하늘이는 스티로폼 아이스 박스를 들고 안으로 등장하는 정훈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지구 반대편까지 다녀온 출장길이라는 걸 자랑이라도 하듯 정훈이의 턱 주변은 까슬하게 난 수염으로 거뭇거리고 있었다.
“이거 상태가 괜찮아야 될 건데….”
마치 자랑이 고픈 어린아이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자기 집에 놀러온 친구에게 자기 집에 있는 장난감들을 자랑하며, 한번 가지고 놀아 보라고 선심을 쓰는 어린아이.
그런 모습과 표정으로 아이스박스를 열고 있는 정훈이를 보고 있자니, 자존심 상하게도 하늘이는 자기보다 두 살이나 나이가 많은 정훈이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시작했다.
자신의 감정을 애써 숨기며 하늘이가 물었다.
“이런 게 기내에 반입이 돼? 모양이 이렇게 유지가 된 걸로 봐선 수하물로 붙인 건 아닐 테고, 이런 건 기내 반입이 안 되지 않나?”
“우리 회사 항공기 타고 다녀온 출장, 내가 반입 못 시킬 게 뭐가 있겠냐.”
자신이 뭐라고 하건, 정훈이는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티라미수 한 조각을 꺼냈다.
조각이라고 하기보다는 한 컵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작은 투명 플라스틱 컵에 담겨 있는 티라미수.
이건 포크로 잘라 먹는 게 아닌, 티스푼으로 퍼먹어야 하는 게 틀림없다.
정훈이는 티라미수가 담긴 플라스틱 컵 하나를 하늘이 앞으로 꺼내 놓고, 남은 티라미수 모두를 커피숍 종업원에게 전달하며 맛을 보라고 했다.
그 모든 모습이 하늘이의 눈엔 정상적이지 못했다.
정훈이가 커피숍 종업원들에게 티라미수를 박스째 전달하고 오는 동안에도 하늘이는 맛을 보기는커녕 정훈이가 하고 있는 이상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왜 안 먹어? 얼른 맛 좀 보라니까?”
“뭐 하는 거야, 지금?”
티라미수.
자신을 만나기 위해 만들어 낸 핑계가 아니라, 진짜 이걸 가장 맛있을 때 먹여 보는 게 목적이었던 걸까.
하지만 하늘이는 기분이 가라앉을 겨를도 없었다.
궁금했다.
도대체 이게 뭐길래, 처음 보는 커피숍 종업원들에게까지 파리에서 힘들게 가져온 걸 맛보게 하며 평가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결국, 하늘이는 생수 한 모금으로 입안에 번져 있는 커피 맛을 최대한 헹궈 낸 후 정훈이가 얻어 온 티스푼으로 티라미수를 살짝 떠먹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