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62)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이끌려 가야 할 관계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걸 편 사장은 직감하고 있었다.
잠시 후 사장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고, 문을 열고 강인성 차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심각한 사장실 안의 분위기에 내색은 못 했지만, 이 세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 배치에 강인성 차장은 속으로 놀랐다.
손정훈 본부장이 상석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편승일 사장은 그런 손정훈 본부장 앞에서 고개를 못 들고 있었다.
“여기….”
평상시의 본부장이 아니었다.
자료를 건네받으면서도 가볍게나마 고맙다는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강 차장이 나간 후 “후….” 하고 숨을 길게 뽑아낸 뒤 손 본부장이 물었다.
“사장님.”
“네.”
“당연히… 하, 이걸 내가 당연하다고 인정해 주는 것도 참 말이 안 되는 건데… 어쨌든 당연히 식품에서 외식사업 부문은 가공 부문에 비해 순이익 기여도가 크게 떨어지다 보니까, 가공 쪽으로 더 많은 집중과 관심을 쏟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제가 이해를 할게요.”
“…….”
“그런데 사장님. 우리 재경식품의 요식 브랜드 중에 개인적으로 자주 이용하는 식당은 있습니까?”
강 차장이 가져온 자료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는 손 본부장의 얼굴에선 더 이상 화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화가 가라앉은 게 아니라, 화를 유지할 가치를 못 느끼고 있는 표정이었다.
“저는 지난 1년 반 동안이요, 저녁에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주로 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습니다. 우리 식품이 가지고 있는 요식 브랜드에서도 시켜 먹어 보고, 경쟁사 브랜드에서도 시켜 먹어 보고, 우리한테 없는 메뉴도 시켜 먹어 보고. 식품으로 오기 전, 모직에 있을 때부터요.”
테이블 위로 올려놓은 자료를 만지작거린 후, 결국 그걸 편승일 사장 앞으로 밀어 놓고 말을 이었다.
“가끔은 혼자 우리 브랜드 매장에 찾아가서 혼밥을 하기도 했습니다. 뜨거운 탕 종류는 아무래도 배달보다는 직접 매장에 가서 먹어야 경쟁력을 객관적으로 느껴 볼 수 있는 거니까요. 그렇게 1년 반 정도를 해 보니까, 제 눈에는 그런 게 보이더군요. 이런 요식 사업은 우리 재경식품 같은 대기업이 할 만한 분야는 아니겠다… 하는 게요. 만들 수 있는 돈에 비해 재경이라는 그룹 브랜드 이미지에 긍정적인 효과는 없는 거 같아요. 결국, 기업은 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돈은 기업의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여기 관련된 이야기는 오늘 이 자리에선 더 이상 안 할게요. 대신 이거 한번 보세요. 우리 재경식품의 요식 브랜드 매장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편 사장은 자료를 자기 앞으로 더 당겨 와 두 손으로 무릎에 올렸다.
“같이 고 이사 방에 가 보시겠습니까?”
“고성표 본부장이요?”
“네.”
“고성표 본부장은 다음 주부터 출근 아닙니까?”
“제가 언제 고성표 이사를 보러 가자고 했습니까? 그 방에 같이 가 보자고요.”
손 본부장이 먼저 사장실을 나섰고, 그 뒤로 조 전무와 편 사장이 따랐다.
고성표 본부장실 앞.
대기를 하고 있던 강인성 차장이 그 방의 문을 열었다.
열린 그 사무실 바깥에서 손 본부장이 물었다.
“빈 사무실이 여기 이 방 말고는 없습니까? 제가 귀하게 모시기로 한 분입니다. 그런 분한테 화장실 바로 앞에 있는 사무실을 쓰게 할 자신이 없네요, 저는.”
재빨리 편 사장이 데스크 쪽을 향해 손짓을 했고, 해당 담당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 방 말고 다른 빈 사무실은 없어?”
“있습니다.”
“어디?”
“서정옥 이사님이 쓰셨던 방이랑, 그 맞은편 추재영 이사님이 쓰셨던 방이 아직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방으로 배정을 했어?”
손정훈이 재빨리 막았다.
“있으면 됐습니다. 안으로 같이 한번 들어가 보시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들, 가구의 흠집, 낡은 구석들을 볼 때마다 편승일 사장은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기분이었다.
조 전무까지 잠시 밖으로 나가 있게 만든 손 본부장.
그는 편 사장과 함께 있는 그 사무실 문을 조심히 닫았다.
“사장님.”
“네.”
“저 간 보지 마세요. 저 그거 딱 질색입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차분해진 음성이었다.
“저 같은 사람은 2년 만에 혹은 그 전에도 얼마든지 원하기만 한다면 개인 사무실을 쓸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은 20년 넘는 세월 동안 한 직장에 모든 젊음을 다 바쳐 충성해 겨우겨우 자기 개인 사무실을 쓰게 되는 거죠. 그것도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얼마나 회사로부터 존중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
“이런 걸로는 장난을 치면 안 되는 거겠죠? 이런 건 잔인하다고 표현을 해야 맞는 걸 겁니다. 그리고 한심한 거죠. 전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사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중간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결국은 미리 사람을 시켜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제 책임이고요.”
“하, 바로 조금 전에 저 간 보지 마시라니까… 참 신기하죠. 이런 장난을 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 간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희한할 정도로 하나같이 다 똑같습니다. 인정할 기회를 줘도 그 기회를 변명으로 날려 버립니다.”
“……!”
“기회를 드렸는데, 그 기회를 조금 전 사장님이 사장님 손으로 직접 날리셨단 말을 하는 중입니다. 진짜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기회 한 번 더 드립니까?”
“…….”
“이런 걸로는 장난을 치면 안 되는 거겠죠?”
꿀꺽.
편 사장의 침 삼키는 소리가 사무실을 떠다니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손정태 사장 사람인 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이 정도로 끝내는 겁니다. 지금 제가 드린 기회, 소중히 지키셔야 할 겁니다.”
* * *
내 사람인 줄 뻔히 다 알면서?
오후 3시.
강 차장과 앞으로의 일정을 맞춰 보고 있었다.
“라면 생산 라인하고 커피 생산 라인, 그리고 음료 생산 라인 모두 고 본부장 넘어오면 한 번에 다 같이 둘러볼 수 있게 일정을 한번 잡아 봐요.”
“다음 주 안에 다 소화하실 계획이십니까?”
“길게 끌 거 뭐 있어요. 나는 생산 라인 환경만 확인하면 되는 건데. 나보다는 고 본부장한테 더 필요한 내용일 거예요. 그래서 같이 방문을 해 보려고 하는 거니까, 그렇게 준비해 주면 좋을 거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 본부장님 지낼 곳은 내가 따로 신경 안 써도 되는 거죠?”
“네. 우선 호메르스 레지던스로 이주일 예약해 놨고요, 그 안에 리모델링 공사 다 끝날 거 같습니다. 추가 내용은 고 본부장님 한국 들어오신 후에 제가 계속해서 여쭤보고 지내시기에 불편함 없이 준비를 해 드리는 걸로 하면 될 거 같습니다.”
“각별히 신경을 써 주세요. 우리 쪽 스케줄에 맞춘다고 가족들만 파리에 두고 급하게 먼저 넘어오시는 거잖아요.”
“네, 그 부분은 제가 책임지고 케어를 하겠습니다.”
그러고 있을 때였다.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는데, 발신자 번호를 확인도 하기 전에 묘한 기시감 같은 게 들었다.
그냥 느낌상 정태 놈 전화일 거 같았다.
사실 내가 먼저 전화를 한 통 해 보려고 했었거든.
녀석이 그래도 동생이 첫 출근을 했다고 사무실에 미리 화분까지 보내 놓을 정도로 관심을 보여 줬는데,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 줘야 할 거 같기도 했다.
강 차장에게 통화 후에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가자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다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식품으로 첫 출근 소감이 어때? 모직이랑은 많이 다르지?
“안 그래도 내가 전화를 하려고 했었어. 화분 이건 또 뭐야?”
―네 형수가 골랐다. 돈은 내 폰에서 빠져나갔지만. 나중에 시간 되면 네 형수한테 화분 잘 받았다고 톡이라도 하나 보내 줘.
“고마워. 다른 화분은 다 뺐는데, 이 화분만 남겨 놨어. 잘 한번 키워 볼게.”
―그거까지 뺀 거 아냐?
“그럼 언제 한번 와. 와서 보면 되지.”
―마치고 오랜만에 둘이 한잔할까?
“오늘?”
―혹시 하늘이하고 따로 약속 있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럴 거 같더라, 생각 없는 놈. 아무리 당연한 거라도, 인마. 어쨌거나 임원 승진을 했는데 조용하게나마 축하 파티는 해야지. 하늘이하고는 내일쯤이나 다른 날 하는 걸로 하고, 오늘은 형이랑 같이 한잔하자. 할 말도 조금 있고.
지금 내 입장에선 정태 이놈이 가장 엑스맨이다.
태산이, 홍준이 놈, 장혜란이, 정엽이, 하늘이, 남 사장….
다들 어느 쪽으로 튀고 싶어 하는지 그 방향이 내 눈에는 보인다.
그런데 유독 정태 이놈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잘 안 보인다.
틀림없이 편 사장에게 뭔가 보고받은 내용이 있겠지.
그런데 이놈이 조금이라도 똑똑한 놈이라면, 그런 보고를 받았다고 바로 이렇게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만나자고 할 수는 없는 거거든.
멍청한 놈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정태 이놈은 멍청한 놈이 아니다.
오히려 이번에 오프라인 유통판을 스너프가 흡수해 간 다음, 그 빠른 시일 안에 스크린 골프장 사업을 거기에 접목시켜 보겠다는 기획을 촘촘하게 만들어 낸 것만 봐도 사업 센스는 제 애비보다 한 수 위다.
그런 놈이 고작 기간제 사장 하나 때문에 성급하게 움직일 리가 없다.
“술? 좋지.”
“그럼 내가 주소 하나 찍어 줄게. 마치고 거기에서 보자.”
“술 종목이 뭔데?”
“괜찮게 하는 일식당이 한 군데 있어. 속닥하게 이야기 나누기에 분위기도 괜찮고.”
통화를 끝내고 강 차장의 표정을 살펴봤다.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식겁을 했다.
“오늘은 퇴근이 늦어지겠어요?”
“손 사장님 전화입니까?”
“같이 술을 한잔하자네요. 이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을 거예요.”
“자주 있어도 괜찮습니다.”
* * *
제법 그럴싸하게 흉내를 내고 있는 일식 전문점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나와 강인성 차장을 맞이하는 직원의 수준만 봐도 사장이 직접 주방을 보거나, 아님 이런 요식업에 경험이 많은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약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정태라는 이름을 강 차장이 꺼내려고 할 때였는데, 안에서 낯이 익은 남자 하나가 서둘러 다가왔다.
“본부장님.”
정태의 수행 비서 일을 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가 앞으로 나서자, 종업원은 요령껏 뒤로 빠졌고 그 친구가 직접 나와 강 차장을 안내했다.
“식사는요?”
정태가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가는 동안 강 차장을 부탁도 할 겸 물어봤다.
“시켜 놨습니다. 식사하시는 동안 홀에서 할 생각입니다.”
“그럼 두 분이서 같이하면 되겠네.”
“네, 그렇게 하죠. 괜찮으시겠죠?”
상대의 물음에 강 차장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절제된 모습을 보였다.
“네.”
방 앞에 도착을 했다.
정태 놈의 구두 한 짝이 바로 신을 수 있도록 아주 반듯하게 놓여져 있었다.
마치 자를 대고 그은 듯, 눈에 보이지 않는 선에 다른 방 손님들의 신발들도 각 방의 앞으로 반듯이 놓여져 있었다.
“식사들 하고 계세요.”
두 사람을 보낸 뒤 한 계단 올라 방문을 열었다.
벽을 제외한 삼면이 창호지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바닥은 좌식을 해야 하는 다다미였고.
미리 기본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정태는 혼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왔어?”
“일찍 왔네? 내가 먼저 도착할 줄 알았더니.”
“차가 막힐 줄 알았는데, 이런 날은 또 희한하게 뚫려요.”
여전히 스마트폰에 집중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한 정태는, 이내 볼 걸 다 봤다는 듯 폰을 테이블 위로 덮어서 내려놓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정태 놈 자리는 세팅이 하나만 되어 있는데, 내가 앉을 자리엔 옆으로 한 사람분의 세팅이 더 되어 있었다.
“혼자 왔어?”
“누구랑 같이 왔어야 되는 거야?”
“아니, 강 차장이라고 했나? 같이 안 왔어?”
“아, 여기 자리 끝나는 동안 홀에서 식사하고 있으라고 했어.”
“너도 참 너다. 앞으로는 한 몸처럼 같이 지낼 사람인데, 내가 괜히 이런 자리 만들었겠어? 잠시 들어와 보라고 해.”
어쭈?
이제 다 컸다 이건가?
제법 어른 흉내를 낼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