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68)
“…….”
“그동안 우리가 외식사업 부문으로 쏟아부은 시간과 정성이 얼마고, 운영되고 있는 업장이 몇 갠데 그걸 식품의 식 자도 모르는, 고작 모직 생활 2년이 전부인 사람이 넘어와서 혁신을 해 보겠다? 이게 어떻게 혁신입니까? 억지고, 막무가내죠.”
“…….”
“아, 무슨 말을 좀 해 보세요, 사장님. 진짜 이거 이대로 브레이크 한번 안 걸어 보고 손정태 사장 때처럼 저한테 맨땅에 헤딩하자고 할 겁니까?”
* * *
저녁 8시.
여느 날과 다름없이 손홍준 회장은 저녁을 먹고 서재에서 계열사별로 올라온 사업 현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루의 마지막 일과.
재경의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이후부터 지금까지, 손 회장은 아버지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아침에 눈을 떠서는 대표 신문사들의 기사를 통해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구상하는 것으로 시작을 해, 침대로 올라가기 전엔 다음 날 출근과 동시에 결재를 해 줄 사업 현황들을 확인하는 삶을 강박적으로 지켜 가며 살아왔다.
서재 안은 온통 뿌연 담배 연기로 잠겨 있었다.
항공 쪽에서 들어온 사업 현황을 확인하려고 파일철을 열었을 때였다.
웅… 웅… 웅….
사무 책상 위로 올려놓은 폰이 묵직한 진동음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국제 전화라고만 뜨는 발신자 번호.
습관처럼 사무 책상 위로 올려진 그 상태로 폰을 열어 통화를 연결시켜 놓고 천천히 그 폰을 귀에 갖다 댔다.
“네, 손홍준입니다.”
―작은아버지.
상대 쪽에서는 곧바로 그다음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손 회장이 느끼기에 그 틈이 엄청 길게 느껴졌다.
예상을 하지 못했던 전화.
그랬기에 대비 자체가 불가능했던 목소리.
그래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도록 만드는 상대였다.
―저 정엽입니다.
“어….”
실제 손 회장은 조카의 연락을 어떻게 받아 줘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그래, 정엽이.”
―혹시 바쁘신데 제가 전화를 드린 건 아닙니까?
“아냐, 괜찮아.”
손 회장의 손은 자신이 의식도 하지 못한 사이 담뱃갑 뚜껑을 열고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 사이 상대가 말했다.
―제가 너무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죠?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너는 어때? 잘 지내고 있지?”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불붙인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빠는 동안 손 회장의 머릿속으로는 그의 형수, 정엽이의 어미라는 존재의 젊은 시절 얼굴이 떠올랐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얼굴.
그 염치없는 처가 쪽 인간들보다 더 자신을 괴롭게 만들고 궁지로 내몰았던 존재.
그녀의 존재 자체가 손 회장에겐 모멸 그 자체였다.
재경을 위해, 이 집안을 위해 손 회장 자신이 인내하고 버텨 냈던 모든 것을 한낱 욕심으로 만들어 버렸던 그 존재를 손 회장은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한때 건강이 좀 많이 안 좋으셨어요. 다행히 지금은 요양을 잘하고 계시고요.
그정도 내용은 남 사장을 통해 가끔씩 전해 들었던 손 회장이었다.
잠시간 이어진 침묵.
그 침묵을 깨뜨리는 정엽이의 목소리에 손 회장은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작은아버지, 혹시 저 결혼한 거 알고 있으세요?”
―그래, 가끔씩 네 고모부 통해서 네 소식 듣고 있다.
그 말을 해 놓고 보니 괜히 민망해졌다.
이런 전화를 받기 전엔 느껴 볼 이유가 없었던 민망함.
이젠 집안의 최고 어른이 되어 있는 자신이 형님이 남기신 유일한 혈족의 결혼조차 모르는 척, 담을 쌓고 살았던 게 못내 민망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더 작은 사람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제가 사는 게 바빴습니다. 결혼한다고 연락드릴 심적 여유가 없었어요.
“아니다. 애 아빠 됐다는 소리를 듣고도 아직 연락 한 통 못 넣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결혼을 해서 내 가정 꾸려 애 아빠가 되어 보니까,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는 거 같아요.
“그럴 수 있다.”
―제가 그동안 사는 게 바빴다는 이유로 제가 해야 할 도리를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작은아버지.
“열심히만 살기도 버거운 게 사람 인생이다. 그거 좀 못 했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다. 다들 못 하고 사는 게 도리니까.”
―다음 주에 가족들 데리고 한국에 잠시 들어갈까 합니다.
“다음 주에?”
―달력을 보다 보니까 다음 주가 할머니 기일이더라고요.
다시 또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손 회장이었다.
―실은 작은아버지한테 전화 드리기 전에 정훈이하고 먼저 통화를 했어요.
“정훈이하고?”
―제 와이프하고 아들 데리고 할머니 기일에 맞춰서 한국에 들어갈 테니까 작은아버지하고 숙모한테 말 좀 전해 달라고 제가 부탁을 했거든요.
정훈이 이놈이 그런 연락을 정엽이하고 주고받았다면 미리 이야기를 해 주던가 안 하고….
―그랬더니 저더러 작은아버지한테 직접 전화를 드려 보라고 하네요.
그 말을 듣고서야 손 회장은 둘째 아들의 생각이 깊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걸 자기 통해서 말을 전하게 하는 것도 우스운 거 아니냐고. 못 갈 곳을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조심하고 생각을 많이 하냐면서.
“그래, 잘했다. 이렇게 하면 되지.”
―네. 진작에 제가 이렇게 해야 했는데, 막상 하니까 별거 아닌 이 일이 용기를 내기 전까지는 무척 하기 힘든 일이었네요.
“와서 지낼 곳은 있고?”
―항상 한국 들어가면 태산이 할아버지가 다 준비를 해 주시니까요.
“네 할머니가 많이 반가워하시겠다. 그래, 그럼 그날 보는 걸로 하자.”
―네. 그럼 작은아버지하고 숙모님께 인사는 그날 정식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카와의 통화를 끝낸 손 회장은 둘째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정엽이와 무슨 통화를 했는지 물어볼까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은 이 역시 집안일인데, 아내를 시켜 정태와 정훈이에게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들어가도록 하는 게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을 것이다.
손 회장은 폰으로 통화 버튼을 눌러 놓고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한 번의 신호음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네, 회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밤늦게 미안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깜빡할 거 같아서 생각난 김에 전화한 거야.”
―네, 편하게 말씀 주십시오.
“내일쯤 사람 시켜서 형님 산소 정리 한번 하지.”
―큰 회장님, 큰 사모님 산소도 같이 정리를 시킬까요?
“그래, 하는 김에 같이 손 좀 봐. 형님 산소는 각별히 신경을 좀 쓰고. 다음 주에 정엽이가 온다네.”
―…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 * *
전무 자리를 걸겠습니다
재경 손씨 집안의 장손 손정엽의 한국 방문 사실로 모두의 한 주가 급하게 지나갔다.
누군가의 기대와 또다른 누군가의 불편함이 시간을 빨리 달리도록 재촉을 하고 있었다.
“오빠!”
입국 게이트가 열리기가 무섭게 정엽의 가족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큰 슈트 케이스 두 개가 포개어진 카트를 끌고 나오는 정엽이와 데이빗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 안나.
그들 가족 곁으로 가장 먼저 달려가 데이빗을 들어 안은 건 바로 하늘이었다.
하늘이는 자신을 낯설어하는 데이빗의 모습에 짐짓 섭섭하단 표정을 지어 보인 후, 재빨리 환하게 웃으며 보드라운 아이 얼굴 볼에 자신의 볼을 비벼 댔다.
“비행기 타기 전에 통화할 땐 회사 일 때문에 바빠서 사람만 보내고 넌 못 나올 것처럼 말하더니.”
“어떻게 하다 보니까 중간에 시간이 잠깐 빠졌어. 우리 데이빗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도저히 못 참겠는 거야.”
“그럼 다시 일 보러 가야 하는 거야?”
“오빠 집 주차장에 차 대 놓고 오는 길이야. 집까지만 같이 갔다가 나는 다시 회사 들어가 봐야 돼.”
“뭐 하러 번거롭게 그래? 어차피 너희 집에서 같이 저녁 먹기로 해 놓고.”
“원래라면 번거로워야 정상인 일이 상대에 따라 즐거운 일이 될 때도 있는 법이랍니다. 그지, 데이빗?”
데이빗을 내려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다시 한번 아이의 볼에 자신의 볼을 비벼 대며 이번엔 데이빗의 겨드랑이를 손으로 간지럽히는 하늘이었다.
잠시 낯을 가리던 데이빗도 금세 하늘이를 기억해 낸 듯 짧은 팔로 하늘이의 목을 감싸 안기기 시작했다.
주차장에 세워진 9인승 카니발 앞까지 도착한 일행은 기사의 도움으로 짐을 싣고 차에 올랐다.
아기 좌석이 가장 뒷자리에 붙어 있어 안나가 그 옆으로 앉고, 정엽이와 하늘이는 중간 자리로 나란히 앉아 집으로 향했다.
차창을 살짝 내려 한국의 냄새를 깊게 들이마신 후 정엽이 말했다.
“하아, 좋네. 역시 이 냄새야. 꼬박 2년 반 만이야.”
“그러니까. 데이빗 이만할 때 데리고 오고 이번이 처음이야.”
“진짜 시간 빠르다.”
“오빠 흰머리 있네? 뭐야? 제법 있는데?”
“이거 나기 시작한 지 꽤 됐어.”
“신경 쓸 일이 많았나 보다.”
“너도 부모 돼 봐라.”
“뭐만 하면 데이빗 핑계지?”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 그래.”
하늘이는 팔걸이를 내려놓고 뒤로 팔을 뻗어 아기 좌석에 앉아 있는 데이빗의 다리를 한번 주물거린 다음 정엽이에게 물었다.
“이번엔 일정이 길어지는 거지? 그래서 오픈 티켓으로 끊어 온 거고.”
“상황 봐서. 이야기가 잘 풀리면 길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하루라도 빨리 들어가서 준비를 더 해야 되고.”
“자, 이거.”
정엽이는 하늘이가 내미는 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혹시 몰라서 준비했어. 지금까지야 오빠 한국에 들어오면 우리 가족들 말고는 오빠한테 따로 연락을 할 사람이 없었지만, 이번엔 한국 번호가 필요할 거 같아서. 파리에서 걸려 오는 전화도 제법 될 텐데, 유심을 교체할 순 없을 거 아냐.”
“디테일이 점점 수준급으로 발전한다?”
“보고 배운 게 이런 거뿐이라.”
“고맙다, 잘 쓸게. 혹시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정훈이도 오나?”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마 안 올 거 같아.”
“무슨 그런 대답이 있어? 세상 시끄럽게 결혼 발표까지 한 사이치고는 너무 남 말 하듯 말한다?”
그 말에 하늘이는 피식하고 웃었는데, 그 웃음이 정엽이의 눈엔 어딘가 모르고 씁쓸해 보였다.
“싸웠어?”
“누구? 나랑 정훈이 오빠?”
“어.”
“아니? 우리가 왜 싸워?”
“뭐지, 이건?”
“뭐가 또?”
“이게 요즘 말하는 MZ세대 연애 스타일인가? 상당히 러프한데?”
“연애는 무슨. 우리가 어디 감정 잡고 만나는 사이야?”
“아니야?”
최소한 상대는 아닐 거다.
“아니야. 뭘 다 알면서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물어?”
“아직도 아니냐고.”
“…….”
“야, 그럼 좀 문제 있는 거 아니냐? 채서린이 관련 스캔들 터지고,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이야? 시작은 그게 아니었을지 몰라도 결혼 생활을 해 나가야 할 사람들이 지금부터라도 서로 노력을 해야지.”
“하고 있어.”
“하고 있는 게 이래?”
“나도 관계가 지금처럼 어정쩡하게 오래 이어질 줄은 처음엔 몰랐지. 그래서 좀 당황스러웠는데….”
잠시 정훈이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던 하늘이는 이내 시원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그렇고 손정훈도 그렇고 각자 방식대로 노력을 하고 있는 게 맞는 거 같아.”
“오기는 우리가 파리에서 왔는데, 연애 스타일은 너네가 파리 스타일인 거 같다?”
“그러니까. 그 인간이 그렇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