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69)
“정훈이?”
“응. 완전 파리 스타일이네.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는 게 딱 파리야.”
“잡는 쪽이 넌 거야?”
“매너 없이 상황을 그렇게 질질 끌고 가네, 그 인간이.”
“너네 집에선 별말 안 하고?”
“딱히.”
“넌?”
“나? 나 뭐?”
“너는 괜찮냐고.”
“완전 괜찮은데? 말했잖아. 손정훈도… 내가 보기엔 뭔가 우리 관계에 멈칫하게 되는 포인트가 분명 있긴 한 거 같은데, 자기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는 게 내 눈에 보여.”
“포인트? 무슨 포인트?”
“굳이 물어보고 싶지도 않고.”
“궁금한데 자존심상 못 물어보고 있는 건 아니고?”
“거기에 내 자존심까지 갖다 붙일 건 아닌 거 같고, 그냥 궁금은 한데 물어본다고 시원하게 답을 얻을 수 있을 거 같지가 않아서라고 해 두자.”
* * *
완벽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집.
마치 호텔 그랜드 스위트룸을 방불케 하는 청결함이었다.
거실 바로 옆으로 난 주방으로는 아일랜드 식탁 위로 와인 글라스 셀러가 설치되어 있었고, 욕실엔 새 타월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늘이와 기사님이 짐까지만 함께 올려 주고 떠난 그 집 거실에서 정엽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창문 커튼을 걷었다.
한강이 바로 눈앞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데미안.”
안나가 정엽이를 불렀다.
이 집에 올 때마다 지금처럼 거실 창 앞에서 한참 동안 사색에 빠져 있는 남편의 습관을 알기에 안나는 그의 사색을 도와주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응?”
“데이빗을 씻겨야 할 거 같아. 씻기면서 나도 같이 씻으려고. 욕조에 들어갈 건데, 당신은 씻으려면 거실 욕실에서 씻어.”
정엽은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인 후 손짓으로 데이빗을 불렀다.
“이쪽으로 와 봐.”
아들을 목말 태운 후, 창 쪽으로 몸을 돌린 정엽이는 데이빗의 두 손을 잡고서 저 멀리 한강 뒤로 올라가 있는 재경 그룹 본사 건물을 가리켰다.
“이 집 기억 나?”
“아니.”
“오늘 처음 온 거 아냐. 데이빗 1살 때 엄마랑, 아빠랑 같이 왔었어.”
“여기 우리 집이야?”
“우리 집이야. 그리고 저기 저거.”
“어떤 거?”
“저기 저거.”
“저거?”
“응. 저거.”
“저게 뭔데?”
데이빗은 아빠가 자기 손을 잡고 가리키고 있는 높은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의 할아버지가 만드신 진짜 큰 집.”
“우와.”
“멋지지?”
“멋져. 그런데 아빠는 할아버지 실제로 본 적 있어?”
“아빠? 아빠는 있지.”
“좋겠다. 나는 없잖아.”
“…그렇지. 데이빗은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
“아빠는 할아버지랑 많이 놀았어?”
“음… 아마도? 아빠도 너무 어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 그런데 할아버지랑 같이 밥 먹고, 손잡고 어딘가를 다녔던 기억은… 있어.”
“보고 싶어?”
“보고… 싶지? 왜? 데이빗도 할아버지 보고 싶어?”
“응.”
“두 밤만 더 자고 할아버지 계신 곳에 갈 거야. 할아버지도 무덤 속에서 우리 데이빗 많이 컸네… 하실 거고.”
데이빗을 목말 태운 남편의 뒷모습을 기다려 주다가, 안나는 천천히 곁으로 가서 데이빗을 넘겨받았다.
정엽이는 안나가 데이빗을 데리고 씻으러 들어간 사이, 진열장을 열어 위스키 한 병을 땄다.
냉장고 안에도 필요한 식자재들이 채워져 있었다.
생수 한 병과 온더록스 잔에 얼음 몇 알을 채워 다시 창 앞으로 선 정엽은 생수병만 협탁 위로 올려놓은 뒤 위스키 한 모금을 입에 담고 속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
* * *
나는 개인적으로 편승일이보다는 모범태 이 친구와 궁합이 더 잘 맞는 거 같다.
행동파다.
저마다의 장단점은 분명히 있는 것이고, 또 시기에 따라 필요한 역량이 다 다르기 때문에 누가 낫다, 누가 아쉽다… 하는 비교는 힘들지만, 지금 내가 재경식품을 이끌고 가려는 방향에서는 모 전무 같은 행동파 리더가 꼭 필요하다.
벌써 자기 발로 내 방을 찾아온 게 세 번이다.
그런데 또 찾아왔다.
누가 영업이사 출신 아니랄까 봐, 들이대는 게 아주 적극적이다.
편승일이하고는 아예 다른 상황.
편승일이는 내가 찾아오게 만들어야 했다.
간 보는 걸 좋아하는 친구였으니까.
반면에 모범태 이 친구는 귀찮을 정도로 내 방을 찾아와서 장시간 우리가 외식사업 부문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이유를 내게 납득시키려고 했다.
자기 스스로 “나 이런 사람입니다!”라는 식의 어필을 하는 스타일이랄까?
납득이라는 이름하에 예쁘게 포장된 그 이유 중엔 몇몇 실제 내가 염두에 두지 못했던 내용도 담겨 있었지만, 결국 자기 밥그릇, 자기 위치에 대한 염려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난 더 이 친구가 가지고 있는 외식사업 부문에 대한 진심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자기 밥그릇만 챙길 줄 아는 놈이 아니라 자기 밥그릇은 챙길 줄 아는 놈인 게 분명했고, 보통 자기 밥그릇은 챙길 줄 아는 놈이 남의 밥그릇도 존중을 해 주는 법이니까.
조 전무까지 데리고 왔으니까 편승일이만 잡으면 알아서 교통정리가 되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모범태 이 친구가 자기 주장을 고집할 줄 아는 친구였다.
결국 난 고성표 본부장과 강인성 차장을 풀어 모범태 전무의 현장 평판을 긁어모았다.
재경식품 원 맨이다.
그만큼 쌓여 있는 현장 평판은 사실의 누적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기에 사실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고.
여기저기에서 모여진 평판을 놓고 보면, 결국 지장이나 덕장보다는 용장에 가까운 리더라고 봐야 하는데 몇 번 독대를 해 보니까 그런 기질이 확실히 많이 보였다.
똑. 똑.
모범태였다.
“본부장님, 시간 좀 괜찮으십니까?”
지난주 목요일을 시작으로, 이번 주만 벌써 세 번.
그것도 한번 찾아와서 금방 나가 주는 것도 아니고 최소 한 시간 이상은 내 시간을 빼앗아 가고 있다.
사업과 자기 성과를 위해 찾아오는 건데 이걸 피할 수도 없고 식품 출근 2주 만에 벌써부터 징글징글한 놈을 만나게 됐다.
“네, 일단 들어오세요.”
역시나 오늘도 빈손.
내가 진행을 시키고자 하는 기획을 놓고 다시 또 토론을 하자는 거겠지.
할 때마다 지면서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래, 이번엔 또 무슨 공격력을 갖춰서 찾아왔는지 구경이나 한번 해 보자.
“뭐 보고 계셨습니까?”
이야….
정말 세상 많이 좋아졌다.
아무리 내가 직급상 자기 아래라지만, 회장 아들 방에 찾아와서 뭘 보고 있었는지를 물어본다?
내가 자기 눈에 어려 보여서 저러는 걸까, 아님 원래 스타일이 저런 걸까?
그런데 참 이상하지?
미워 보이지가 않는다.
자기만의 선이 확실히 있는데, 그 선을 특유의 목소리 온도나, 얼굴 표정, 자세, 행동 습관 등을 적절히 잘 섞어 효과적으로 지켜 낸다.
이런 게 결국은 재능이고, 모 전무 나이쯤 되면 실력이라고 봐 줘야 하지 않을까?
“현재 우리 외식사업부에서 정리가 필요해 보이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살펴보고 있었어요.”
“하아, 본부장님.”
“정리할 건 정리를 해야죠, 전무님.”
사실 내가 보고 있었던 건 조 전무를 통해 구한 항공 쪽의 미래 개편 조직도였다.
출근만 재경식품 본부장 딱지 달고 식품 본사로 하는 거지, 점심시간 이후부터는 특별한 경우가 없는 이상 항공과 모직, 스너프의 운영에 관한 정보를 받아 보고 있는 중이다.
모범태에게 정리가 필요해 보이는 브랜드를 살펴보고 있다고 한 이유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방을 찾아온 이유를 들어 보기 위해서다.
이 친구를 한 번 상대하고 나면 살짝 진이 빠지는 느낌이거든.
“힘들게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거름까지 다 먹여 놨습니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로 인해 실적이 저조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 곧 결실을 맺기 시작할 건데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겁니까?”
“전무님은 제가 안 어려우세요?”
“…….”
“다른 분들은 다들 어려워하잖아요.”
“어렵죠. 많이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손정태 사장님때보다 더 어렵습니다.”
“글쎄요? 전혀 안 어려워하시는 거 같은데요? 조금이라도 절 어려워하신다면, 지난주부터 제가 몇 번이나 똑같은 내용으로 함께 자리에 앉아 드렸는데, 이렇게까지 사람 진을 뺄 순 없는 거 아닐까요?”
“아직은 식품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하신 거 같으니까요.”
이놈 봐라?
진짜 재밌는 놈이네.
내게 지금 식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식품으로 넘어오신 지 이제 2주 되셨습니다. 물론 모직에서 만들어 내신 결과물에 대해선 저 역시 다 전해 들었고 대단하시단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흠….”
“하지만 오신 지 하루 만에 새로운 기획을 준비하시고, 지난 몇 년간 심혈을 기울여 론칭, 운영 중인 외식사업부의 한계점만 지적하시며 정리에 들어가겠다 말씀을 하시는 건 너무 성급하신 겁니다.”
“성급… 흠… 성급이라… 여기에서 제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그땐 대놓고 저한테 독선적이라는 표현까지 쓰시겠습니다?”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들켜 놓고, 이내 결심을 한 듯 모범태가 내게 말했다.
“저한테 석 달만 시간을 주실 순 없으시겠습니까?”
“석 달이요?”
“네, 그 안에 제가 코로나 기간 동안 주춤할 수밖에 없었던 외식사업부의 가능성을 매출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래서 물어봤다.
“만약에 증명을 못 하시면요?”
“…….”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유일하게 평등한 게 바로 시간이라는 거죠. 그런데 아무리 그 시간이라는 게 평등하게 흘러간다고 해도, 그 시간을 쓰는 사람의 역량이 다른데, 과연 모든 사람의 시간의 가치까지 평등할까요? 석 달? 제가 모직에서 석 달 안에 결과물을 뽑아낸 기획들이 몇 개나 될 거 같습니까?”
“…….”
“식품에선 석 달 안에 제가 뭘 만들어 낼 줄 알고, 그 석 달이 별거 아닌 거처럼 말씀을 하세요?”
”제 전무 자리를 걸겠습니다.”
“그걸 제가 받아서 어디에다가 씁니까? 전 쓸데가 없습니다. 전무 자리 비면 다른 사람이 와서 앉겠죠. 앉는 놈만 땡 잡은 거지, 석 달을 기다려야 되는 저한테 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 * *
돌아가신 분 산소까지 인질 잡냐?
“자신감인지 열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앉아 계신 전무 자리까지 걸어 가며 저한테 보여 주신 그것들이 타깃 설정을 잘못하고 있단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
“매출이야 오르겠죠. 저도 그 정도 그래프는 읽을 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 브랜드들이 그려 내고 있는 그래프의 천장이 너무 뚜렷하다는 거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이 친구가 이렇게 날 설득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표정, 자세 모든 것들이 너무 재밌다.
열정.
그런 게 느껴진달까?
“이 부분은 본부장님께서 약간 오해를 하고 계시는 거 같습니다.”
“무슨 오해요?”
“사장님한테 우리 브랜드 중 수출이 가능한 브랜드가 있느냐고 물으셨다 들었습니다.”
“네.”
“몇몇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사실 거의 모든 브랜드가 수출까지 염두에 두고 기획이 된 브랜드들입니다.”
하이고….
답이 없다, 답이 없어.
누구 하나 태산이처럼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는 놈이 없구나.
내가 진짜 꼭 수출시킬 브랜드를 이야기한 거였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