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8)
“이거요?”
“네.”
“네, 맞습니다. 다 접수된 사직서입니다.”
“처리가 된 것도 같이 있는 겁니까, 아니면 처리를 해야 하는 것들만 있는 겁니까?”
“같이 보관하면 안 되죠. 다 처리를 하는 것들입니다.”
“그 말은 거진 한 달 사이에 들어온 사직서만 그만큼이 된다는 말이에요?”
“좀 많죠? 하하하….”
“이건… 웃을 일이 아닌 거 같은데요?”
내가 심각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자, 정 대리도 애써 짓고 있던 쓴웃음을 감추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절대 웃을 일이 아니죠.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현실이 이런걸.”
“혹시 회사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못 잡아도 최소 열 장 이상은 되어 보였다.
“이게 꼭 우리 회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힘들게 뽑아 놓으면 나가고, 힘들게 일을 가르쳐 놓으면 나가고… 본인들 입장에서도 힘들게 취업 준비를 해서 어렵게 입사한 회사를 이렇게 빨리 그만두고 싶겠습니까만, 요즘은 조기 퇴사의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조기 퇴사라면 그때 정 대리가 말했던 그 1318세대? 그런 걸 말하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정 대리가 말했다.
“비슷하죠. 그런 거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퇴사를 신청하는 직원들의 60퍼센트 정도가 입사 2년 미만의 직원들입니다. 그리고 그 2년 미만의 직원들 중 80퍼센트 이상이 입사 1년 미만의 직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추세가 꼭 재경모직만의 문제는 아니다?”
“절대 아니죠. 우린 그나마 다른 회사에 비하면 양호한 편입니다. 어쨌거나 업계 안에서는 직원 대우가 좋은 편이니까요. 이건 어느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보셔야 할 겁니다.”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정 대리에게 자료를 부탁했다.
“지금 그 파일철에 모아 놓은 사직서들 있지 않습니까?”
“네.”
“그 사직서를 제출한 직원들이 입사할 때 회사에 제출한 이력서를 가지고 있습니까?”
“있죠. 공채 기수별로 다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걸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사직서들도 좀 봤으면 싶은데.”
“당연하죠. 결국엔 이거 제가 과장님께 컨펌을 받아서 처리를 해야 하는 겁니다.”
“하긴, 그렇겠네요. 아무튼 지금 제가 부탁한 거 좀 챙겨 주세요.”
알겠다고 대답을 한 정 대리가 잠시 후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내게 물었다.
“아 참, 근데 사장님은 뭐 때문에 아침부터 호출을 하셨다고 하던가요?”
“그냥 어제 그 일 때문에요. 차준영 씨.”
“아… 별말씀은 없으셨고요?”
“네, 그냥 좋게 좋게 잘 끝났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러고 있을 때였다.
인사부 사무실 문이 열렸다.
영업2팀 차준영이 안으로 들어왔는데, 한결 편해진 얼굴로 손에는 어제 내가 건넸던 해외 지사 파견 근무 신청서로 보이는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옆에서는 정 대리가 눈치껏 파일철을 하나 꺼내 그 안에서 차준영이 제출했던 퇴사 신청서를 뽑아 내게 전달했다.
난 차준영의 퇴사 신청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 표정이 하루 사이에 많이 좋아졌네요?”
“네,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가 되니까, 머리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편하네요.”
“상담실에 들어가서 이야기 나눌까요?”
“네.”
* * *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파견 근무를 안 가겠다고요?”
차준영이 탁상 위로 올려놓은 파견 근무 지원서.
그곳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네. 신경 써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결국 퇴사를 해야겠다는 뜻인가요?”
“아뇨, 아닙니다.”
서둘러 손을 흔든 뒤, 내가 들고 있는 자신의 사직서를 쳐다보며 차준영이 말했다.
“그거 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앞으로 밀어 줬더니 차준영은 그걸 반으로 접고, 접힌 상태에서 다시 반으로 접어 자기 재킷 안주머니 속으로 챙겨 넣었다.
“회사… 그냥 계속 다니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차준영은 스스로의 결정이 민망한 듯 파견 근무 지원서만 만지작거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제 과장님과 상담을 하고 혼자 생각을 많이 해 봤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도망을 치려고 했던 게 맞았던 거 같더라고요. 제 삶을 바꿔 보려고 용기를 내어 선택을 한 게 아니라, 그 용기를 내는 게 두려워서 도망을 치려고 했던 게 맞았습니다.”
“…….”
“그렇더라고요. 제가 잘못한 게 없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도망을 치는 건 아닌 거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웃음이 나왔다.
알이 깨어졌구나.
그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다.
그래, 그 알은 힘들어도 네가 직접 깨고 나오는 수밖에 없다.
네가 직접 깨지 않고 남이 깨 주면 넌 결국 계란프라이밖에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진짜 용기를 내어서 제 삶을 제가 직접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독립을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가족들이 제게 배신감을 느끼더라도 솔직하게 말할 생각입니다. 지금부터 나는 내 인생을 살겠다고요. 나도 하고 싶지만, 지금 내겐 가족들에게 얽매여 있을 여유가 없다고요.”
“그러니까요. 이거 좋은 기회 아니에요? 주재원으로 가면 회사가 거기에서 준영 씨가 지낼 집을 지원해 줘요. 그리고 기본적인 현지 생활비 정도도 따로 나오고. 준영 씨 월급은 오로지 한국에서 다 모을 수가 있다고.”
“해외 지사 파견 근무가 조건이 좋은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조건은 분명 좋지만, 제가 거기에서 꼭 필요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지금 제가 있는 영업2팀이 절 훨씬 더 필요로 하고 있고요.”
“역시 사람은 참 쉽게 안 변해요. 그죠?”
내 말에 차준영이 보고 있던 파견 근무 지원서를 반으로 접어 놓고 날 쳐다봤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있는데, 이 좋은 기회 앞에서도 준영 씨는 준영 씨 본인을 위한 선택이 아닌, 준영 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택을 하네요.”
“…….”
“결국은 준영 씨가 아니라 남 좋은 일을 시키는 거 아니냔 말이에요.”
“아닙니다.”
두 눈에 미소가 담기기 시작했다.
아주 확신에 찬 눈으로 날 쳐다보며 차준영이 말했다.
“남 좋은 일을 시키겠다고, 영업2팀에 계속 남겠다는 게 아니라 절 위해서 영업2팀에 계속 남겠다는 겁니다.”
“준영 씨를 위해서요?”
“네. 절 위해서요.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곳 재경모직, 그리고 영업2팀 안에서만큼 인정을 받고,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드디어 알을 깨고 나왔다.
“어쩌면 그런 인정과 관심을 받는 거에 중독이 되어서 더 일을 열심히 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어제와는 달라진 차준영의 확신에 찬 모습에 응원을 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위로는 형에게, 밑으로는 동생에게… 제 것을 양보하고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거든요. 회사에서 인정과 관심을 받으면서 일하는 게 어쩌면 제가 집에서 해야 했던 양보와 희생의 보상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 보상을 그동안 영업2팀이 차준영 씨한테 해 줬던 거군요.”
“네, 아직은 조금 더 제가 익숙한 곳에서 인정과 관심을 받으며 일을 하고 싶습니다. 좋은 기회 제안해 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하고, 또 힘들게 마련해 주신 자리인데 안 가겠다고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처럼 하면 됩니다.”
“네?”
“지금 나한테 한 것처럼 하면 된다고요. 파견 근무 자리 제안한 내가 준영 씨한테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단 생각 안 해 봤어요?”
“결국, 이렇게 될 거 괜히 사직서까지 제출하면서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단 후회는 하고 있습니다.”
“나 준영 씨 파견 근무 티오 자리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설레발치다가 오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사장실에 불려 간 거 알아요?”
차준영은 놀란 나머지 입을 반쯤 벌려놓고 날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사장실에 불려 간 거… 그거 따지고 보면 준영 씨 잘못 아니잖아요. 내가 준영 씨 한번 잡아 보겠다고, 준영 씨가 그렇게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혼자 준비하다가 그렇게 된 거 아니에요?”
“하지만… 죄송합니다, 과장님.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손을 들어 차준영을 말린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당장 준영 씨가 꼭 해야겠다는 게 생기니까, 다른 건 안 보이고 딱 준영 씨가 원하는 것만 보이죠?”
“…네,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러면 되는 거라고요.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는 거, 다른 사람들이 준영 씨한테 배신감 느끼는 거… 그런 걸 감당하고서라도 준영 씨가 꼭 해야겠다는 게 생긴 거 그게 중요한 거예요. 어제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게 버겁다고 했잖아요?”
“네.”
“물을 길어다가 채우려고만 하니까 버거운 겁니다. 그 독에 물을 가득 채우고 싶으면, 그냥 그 독을 그동안 준영 씨가 물을 길었던 우물 속에 빠뜨려 버리세요. 그럼 빠진 그 사이로 알아서 물이 들어가 독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
“그러기 위해선 준영 씨가 그 우물의 주인이 되어야겠죠? 지금부터는 밑 빠진 독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준영 씨가 준영 씨 삶의 주인이 되게 만들어 보세요. 그럼 준영 씨의 부모님도, 형제들도 자연스럽게 준영 씨 곁으로 다시 돌아갈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때문에 입장이 난처해지신 거 같은데, 어떻게 합니까?”
“난처해질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보내려고 했던 사람이 안 가겠다고 한다, 미안하다, 그러면 끝인 거지. 내가 뭐 나라를 팔아먹었어요, 그렇다고 사람을 죽였어요? 준영 씨 같은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를 잡아 보겠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건데, 그걸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못 잡은 것도 아니고, 이렇게 제대로 잡았는데 고만한 일로 뭐라고 하는 놈이 있으면 그놈이 그릇이 작은 거지.”
면담을 끝내고 차준영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준영 씨, 이건 내 개인적인 건데, 내가 뭐 하나만 좀 물어봅시다.”
“개인적인 거요? 네, 물어보십시오.”
“둘째의 삶이… 정말 그렇게까지 숨이 막히는 겁니까?”
어쩌면 나는 어제부터 차준영을 통해 홍준이 놈의 인생을 이해해 보려고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둘째.
인정하건대, 나 역시 그러했던 거 같다.
홍명이는 맏이라서 엄하게 키우면서도 항상 내 곁에 있게 만들었고, 여정이는 회사 일을 가르칠 마음이 애초에 없었기에 금지옥엽 사랑으로만 키웠다.
그런데 홍준이 놈을 생각하면… 아비의 역할을 했다는 기억만 있지, 정확히 어떤 마음으로 녀석을 대했는지는 나 역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둘째의 삶이요?”
“네.”
“안 좋은 점만 있는 건 분명 아닙니다.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 부모님이 조금만 더 공평한 분들이셨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면서 살았던 건 사실입니다.”
“공평이요?”
“네, 공평이요. 형은 첫째니까, 동생은 막내니까… 그런 말을 저한테 참 많이 하셨거든요. 뭔가 제게 불공평한 상황들이 벌어질 때마다요. 그럴 때마다 저한테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넌 혼자서도 잘하니까, 넌 누가 안 도와줘도 알아서 잘하니까… 그리고 명절 때 친척들이 다 모이면 제 칭찬을 빠짐없이 해 줍니다. 어른스럽다, 집안일을 잘 돕는다, 학원 같은 걸 안 보내는데도 성적을 곧잘 받아 온다… 결국은 그런 칭찬들은 진짜 칭찬이 아니라 제게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일종의 부탁이셨던 거죠.”
“…….”
“세상에 처음부터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가 안 도와줘도 알아서 잘하는 아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혼자서만 하게 만드니까, 도와주는 게 없으니까 결국은 혼자서 하게 되고, 도움 없이 하게 되는 거죠. 혼자서, 아무 도움 없이 뭔가를 해내기 위해 제가 겪어야 했던, 힘들었던 상황들은 저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게 숨이 막히는 거죠.”
나는 과연 홍준이 놈에게 어떤 부모였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겐 언제나 재경 그룹이 내 인생 우선순위 가장 위에 있었기에, 부모로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 * *
“쟤 왜 일해?”
“네?”
흡연실.
정현수 대리를 따로 부른 김원호 차장이 혹여나 자신들의 대화를 다른 부서 사람들이 듣기라도 할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망 과장 말이야. 쟤 지금 일하고 있는 거 아냐?”
“아마도요?”
“왜 저러냐고. 왜 안 하던 짓을 해?”
정 대리는 대답 없이 그저 담배만 한 모금 빨아 연기를 김원호 차장이 서 있는 반대쪽으로 내뿜었다.
“이건 또 무슨 신종 꼬장이야? 쟤 혹시 약 같은 거 먹었어? 아니면 먹어야 하는 약을 안 먹은 건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어제 부장님 앞에서 박 과장이랑 붙은 것도 그렇고, 차준영이 일도 그렇고….”
“어쨌든 준영 씨 일은 잘된 거 아닙니까?”
하지만 김원호 차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잘되긴 뭐가 잘돼? 여기저기 다 쑤셔 놓고 결국은 또 부장님이 생뚜앙 지사장한테 직접 연락해서 없던 일로 해 달라고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똥 싸는 놈 따로 있고, 그 똥 치우는 놈 따로 있고. 정말 인생 불공평하다.”
“저는 이번 건은 과장님이 잘하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너 설마 지금 망 과장 편드는 거야?”
“누구 편을 드는 게 아니라, 회사 입장에서는 어쨌거나 일 잘하는 직원을 잡은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점점 더 최근 입사자들의 퇴사율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러는 와중에 준영 씨처럼 일 잘하고 성실한 직원을 세이브해 낸 건 과장님이 잘한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어디 망 과장 실력이야?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지.”
정 대리는 속으로만 웃으며 “그럴까요?”라고 물었다.
“당연하지. 회장 아들이 자리 하나 만들어 보라고 하는데, 어느 간 큰 지사장이 안 된다고 하겠어? 그리고 어느 직원이 회사 월급은 월급대로 고스란히 모으고, 또 해외 생활 경험도 만들 수 있는 그 자리를 못 본 척할 수 있겠냐고.”
“준영 씨는 못 본 척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거라고. 이건 망 과장 실력이 아니라, 망 과장이 가지고 있는 배경의 힘인 거야.”
“그렇더라도 어쨌거나 결과는 좋은 거 아닙니까?”
“뭐지?”
“뭐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