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190)
“정태가 지금 그걸….”
“사업이라는 건 꼭 누구 하나를 죽여야 내가 사는 전쟁처럼 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 같이 성장을 할 수 있는 경쟁처럼 해야 하는 거지요. 그게 내가 반평생을 몸담았던 재경의 기업 모토였고. 내가 장 회장 부친에게 섭섭하고 아쉬웠던 게 바로 그런 부분이었소. 사업을 너무 전쟁처럼 하셨거든. 그래서 너무 많은 사람이 다쳤고, 결국엔 그 원망을 자식 대로 물려주고 떠나셨어. 나는 다만 그게 안타까웠던 거요. 꼭 그렇게까지 하셨어야 했나… 그걸 말리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도.”
* * *
그 시간 스너프 본사 임원 회의실.
“다음 내용은요?”
“재경식품 조동희 전무의 요청 건이 있습니다.”
“말해 보세요.”
준비된 내용을 확인하는 류재현 전무의 얼굴에 어느덧 피로감이 올라오고 있었다.
부경통신 쪽에서 일방적으로 전달한 제휴 단절에 관한 내용으로 2시간 넘게 이어진 회의.
이제는 잠시 끊어서 가나 싶었는데, 곧바로 다른 안건을 물어 오는 손정태 사장이었다.
“재경식품에서 현재 프랜차이즈화를 기획 중인 브랜드에 관해, 매장 확보가 가능하겠냐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기획 중인 브랜드라면 어떤 브랜드를 말하는 거예요? 현재 식품이 운영 중인 브랜드 말고 아예 다른 브랜드가 있다는 말이에요?”
“네, 쁘띠 기뿔리라고 베이커리 브랜드가 빠른 시일 내로 준비될 거 같다고 합니다.”
“쁘띠 기뿔리….”
손정태 사장의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피로도가 넓게 퍼져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쌩쌩했다.
“당연히 확보를 해 줘야죠. 최대한 신경 써서 잡아 주세요.”
“매장 임대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조율이 가능할지도 한번 알아봐 달라고 하던데, 조 전무님이 물어보시니까 제가 바로 답을 못 드리고 확인을 해 보겠다 정도로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정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류재현 전무를 쳐다봤다.
“류 전무님.”
“네.”
“우리 스너프의 뿌리가 어디입니까?”
“당연히 재경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는 모든 사업도 결국은 재경의 사업인 거죠?”
“그렇습니다.”
“식품이라고 다릅니까? 식품에서 하는 모든 사업 역시 우리 재경 그룹의 사업입니다. 당연히 조율을 해 줘야 할 부분을 놓고, 왜 물어보는 사람 입 민망하게 기다리도록 만듭니까? 회의 끝나는 대로 조 전무님께 전화 넣어서 식품이 기대하는 수준을 확인하고, 최대한 맞춰 주는 쪽으로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른 건 다 알아서 잘하시는 분이 왜 그런 당연한 부분에서 조 전무님 입장 우스워지게 어색한 장면을 만드세요?”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다른 안건으로 회의가 넘어가려고 할 때였다.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정태의 스마트폰이 진동음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다른 전화였다면 통화를 거절시켜 놓고 회의를 이어 나갔겠지만, 상대가 부경통신의 장선길 회장이었다.
“죄송합니다. 우리 한 10분… 아니, 20분만 브레이크 가졌다가 다시 이어서 합시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선 정태는 전화를 받으며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정태는 폰을 귀에 붙인 채, 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네, 외삼촌.”
―어, 정태야. 바쁜데 삼촌이 전화한 거 아니야?
“네, 뭐… 괜찮습니다. 회의 중이었는데, 삼촌 전화라 잠시 끊었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빨리해야겠구나.
“아니에요,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생각을 해 보니까, 두 시간 넘게 회의를 잡아 놓고 중간에 브레이크도 안 줬네요, 제가. 하하.”
―그래, 그래. 다른 게 아니라, 오전에 우리 쪽에서 보낸 메일 확인했지?
“네, 확인했습니다. 그 건으로 회의를 했던거고요.”
―보내 놓고 생각을 해보니까, 그게 이제… 어… 그…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괜찮습니다, 삼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저희 쪽에서도 법무팀 불러다가 제휴 약관부터 시작해서 다 확인을 했는데, 몇 가지 위배되는 내용이 있긴 해도 그냥 넘어가기로 그렇게 이야기 끝냈습니다.”
―그냥 넘어간다는 게, 뭘 그냥 넘어간다는 거야?
“우선 제휴 해지 요청이 들어왔으니까 기간을 확인해 봐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남도 아니고, 가족끼리 사업을 하면서 이런 작은 부분까지 문제로 삼을 수는 없겠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온라인 플랫폼만 오늘 자정을 기점으로 결제 시스템에서 부경통신을 지우기로 했습니다. 그건 금방 하는 거니까요. 복잡한 쪽은 아무래도 오프라인으로 잡히는 백화점, 아웃렛, 면세점인데 전 매장 쪽으로 내일부터는 부경통신 관련 할인 종목과 포인트 적립 혜택이 더 이상 없다는 걸 구두로 손님들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임시 조치를 시키기로 했습니다.”
―…….
“이걸 시스템화시키는 건 전산으로 지점 하나하나 다 바꿔 줘야 하는 부분이라 일주일 정도는 걸린다고 하네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정리를 해서 마무리되는 대로 오늘 저희 쪽으로 메일 보낸 담당자 편에 피드백 보내 놓겠습니다.”
―아니, 정태야, 잠깐만. 이게… 그걸 그렇게까지 빨리 처리를 안 해도 되는 건데… 일단 우리가 보낸 건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된다, 해 달라 하는 강제가 아니라, 너희 쪽의 의견을 묻는 거였어.
“그럴 리가요. 만약에 삼촌이 그런 의도로 지시를 내린 거였음 제휴 해지 요청을 보낸 담당자가 너무 큰 사고를 친 건데요? 혹시 저희 쪽으로 보낸 메일 확인 안 해 보셨어요?”
―…….
“의견을 묻는 게 아니었어요. 통보였지. 그동안 우리 재경항공을 상대로 종종 해 오셨던 것처럼. 삼촌.”
―어, 그래, 정태야.
“계속 이런 관계로 가다 보면, 관계 자체가 아예 틀어질 거 같아요. 이쯤에서 저희가 먼저 손을 놓겠습니다. 회장님 승인까지 다 떨어진 내용입니다. 회의 중간에 끊고 나온 거라, 바로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으니까, 제가 이거 정리 다 되는 대로 한번 연락드릴게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정태는 통화할 때 걸었던 미소를 삽시간에 거둬 놓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X발 새끼가, 삼촌, 삼촌 해 주니까 끝까지 우릴 아래로 보지?”
* * *
맏며느리 역할 제대로 할게요
어느 봄의 화요일.
부경호텔 소공동점의 대연회장.
경영권 교체에 관한 의결을 위해 지난주 있었던 긴급 이사회에조차 일부러 참석을 하지 않았던 장혜란.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건, 그게 그녀가 자신의 언니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으로 손정엽을 부경호텔의 새로운 경영자로 지지하는 것과, 자신의 언니를 호텔 대표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벌써 가시게요?”
작은 클러치 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는 장혜란을 향해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남성이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자신의 언니와 그 반대쪽에 앉아 있는 정엽이의 모습을 차례대로 쳐다봤다.
“다 봤잖아요. 주저리주저리… 내가 새 대표의 부임 소감까지 다 듣고 앉아 있을 필요가 있겠어요?”
“…….”
“끝나면 정엽이한테 축하한다고 말만 좀 전해 줘요.”
“…네.”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이런 노년을 기대하며 살아온 인생이 아니었다.
제 손으로 동생의 것을 빼앗고, 이젠 언니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것마저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게 도왔다.
장혜란이 희망했던 자신의 노년은 거창할 게 없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이미 다 경험을 해 봤고, 그것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성가신 것들인지도 이젠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저 자신의 가족들, 남편의 건강과 자식들이 서로를 위하며 함께 재경이라는 그늘 아래에서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가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조금만 더 욕심을 낸다면, 자신의 형제들과 아무 고민 없이 가깝게 지내며 함께 아름답게 늙어 가는 것.
그것 말고 바라는 게 뭐가 더 있었나.
그런데 그게 욕심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그녀의 두 아들은 재경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고, 그 눈치 싸움 끝에 본가를 향하는 발길마저 뜸해졌다.
그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부추기고 있는 남편 역시 언제부턴가 처가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장혜란 그녀가 직접 손정엽의 손을 들어 준 이 결정으로… 그녀는 자신의 언니까지 잃었다.
혼자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
주위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
이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아직까지 쥐고 있는 부경물산과 부경건설의 계열 지분뿐이라는 생각.
갑자기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다.
차창에 날아와 부딪힌 빗방울이 꽤 굵게 방울지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한 장혜란은 차고 안에 세워져 있는 며느리, 원수경의 차량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얘는 온다는 말도 없이 어쩐 일이야?’
현관물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승현이가 집안일을 도와주는 도우미와 함께 거실을 휘젓고 다니는 중이었다.
“사모님, 오셨어요.”
“애들 언제 왔어요?”
가사 도우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주방 쪽에서 앞치마에 물 묻는 손을 닦아 내며 원수경이 나왔다.
“일찍 오셨네요, 어머니?”
“넌 언제 왔어?”
“저희는 한 시간 정도? 조금 더 됐나?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거기 호텔 주총 10시 아니었어요?”
“온다는 말도 없이….”
“어머니 심란하실 거 같아서요.”
“뭐?”
어느새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며느리가 함께 무거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냥요. 제가 감히 오늘 같은 날 어머님 심정을 다 이해한다는 건 말이 안 되겠지만, 제가 만약 어머니 입장이었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슨 호들갑이냐는 듯 피식하고 웃어 보였지만, 장혜란은 며느리가 마음을 쓰는 게 예쁘게만 보였다.
“그나마 친정 형제분들 중에선 이모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셨잖아요. 오늘 자리 많이 불편하셨을 텐데 고생 많으셨어요, 어머니.”
무뚝뚝한 아들놈들과는 이번 후계자 경쟁으로 거리가 멀어진 것 같지만, 그나마 살가운 며느리는 변하지 않고 자신의 옆을 지켜 주고 있다는 생각에, 장혜란은 괜히 그 관심이 고맙고 기특하게 느껴졌다.
얼른 손자를 들어 안은 장혜란은 말없이 주방 쪽으로 향했다.
“무슨 냄새야? 뭐 하고 있었어?”
“고구마 맛탕 좋아하시잖아요. 오늘 같은 날은 적당히 단 걸 먹어 주는 것도 좋으실 거 같고.”
“번거롭게 그걸 또 집에서 한다고… 됐어, 하지 마.”
“거의 다 했어요.”
“아줌마들 시켜. 아줌마들 시키고, 너는 나랑 같이 커피나 한잔하자.”
“그럴까요?”
“아 참, 밖에 비 온다.”
“그러니까요. 저 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승현이를 안고 다시 거실로 나온 장혜란은 거실 전체창을 통해 비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원수경에게 평소엔 절대 하지 않을 제안을 하나 했다.
“우리 점심에 밥 먹지 말고, 아줌마들한테 부침개 부치라고 해서 커피 말고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씩 할까?”
“막걸리 생각 나세요?”
“비가 오잖아.”
“그래요, 그럼. 마음 편하게 어머니랑 막걸리 마시려면, 저는 지금부터 승현이를 재워야겠어요.”
“그렇게 해라. 비도 오고, 노곤하게 잠 잘 올 거다.”
* * *
남편을 재경의 차기 주인 자리에 앉히기 위해, 그리고 그 자리를 승현이가 물려받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원수경이 하지 못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자신의 친정이 미래금융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집안이지만, 원수경은 그 부족함을 채울 만한 근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재경가에 들어와 지난 5년을 어떻게 지내 왔던가.
철저하게 시어머니의 사람으로 살아왔다.
재경이라는 큰 집안을 이끌고 계시는 시아버지에게는 일부러 거리를 두는 치밀함까지 철저히 지켜 내며 자신의 욕망을 숨겨 왔던 원수경이 아니었던가.
“하늘이하고는 가끔씩 연락을 하고 지내?”
“하늘 씨요?”
“하늘 씨가 뭐니? 나이도 한참 아래고, 어쨌거나 곧 네가 손위 동서 되는 사람인데.”
“따로 가까워질 기회가 없어서요.”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기회가 찾아온다니? 어색해도 밖에서 따로 만나고, 이야기도 자주 하고… 그렇게 해야지.”
“하늘 씨가 저처럼 한가한 사람인가요, 어디. 미래금융 후계자로 이젠 본사 생활 시작한다고 하는 거 같던데. 곧 서로 편해지고 나면 호칭 정리 하도록 할게요. 호칭 정리 전에 도련님 장가가 먼저예요, 어머니.”
장혜란과 원수경은 2층 거실에서 분위기를 내겠다고 낮은 상을 펼쳐 놓고, 그 위에서 막걸리 술상을 받았다.
그 거실 한쪽엔 이동용 유아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승현이를 재워 놓고 낮은 수면 음악을 틀어 놓았다.
“너는….”
장혜란은 며느리를 불러 놓고 한참 동안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시어머니의 모습에 얼른 원수경이 대답했다.
“네.”
“하늘이 말이야. 어떤 거 같아?”
“하늘 씨요? 예쁘죠. 너무 부러워요. 관리가 따로 필요 없는 나이 아니에요. 하늘 씨만 보고 있으면 딱 그 나이 때의 제 모습도 생각나고….”
“시어머니 앞에 앉혀 놓고 못 하는 말이 없네.”
“히히. 그냥요. 너무 예쁘다고요.”
“예뻐?”
“예쁘죠. 생긴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거고, 똑똑해, 자신감 넘쳐, 거기다 싹싹하기까지 해. 저는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 같아요.”
“왜?”
“자상하신 시아버지에, 뭐 하나 예쁜 구석도 없을 텐데 친딸처럼 챙겨 주시는 따뜻한 시어머니, 거기에 다정한 남편, 사랑스러운 아들. 그런데 이미 이렇게 완벽한 집안에 새로 들어오는 새 식구가 하늘 씨처럼 너무 예쁜 사람이에요. 도대체 몇 번을 다시 태어나야 지금 저처럼 이런 완벽한 집안의 일원으로 다시 살아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