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268)
“네, 아버지.”
“지금 사람 시켜서 여기에 누가 먼저 예약을 한 사람은 있는지, 없으면 두 자리를 뺄 수 있는지 한번 알아봐라.”
하늘이는 할아버지가 하고 있는 모습이 못마땅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고만 있었다.
당신이 죽어 묻힐 자리를 직접 찾아와 확인을 하고 계시는 할아버지.
그런 장태산 회장을 쳐다보는 가족들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정작 장태산 회장 본인은 더없이 가볍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네들 엄마도 이쪽으로 이장을 해서 나하고 같이 있을 수 있게끔, 그렇게 해라.”
“…네.”
전날 바람을 쐬고 싶다고 하셨다.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고 싶은데, 가족들 다 같이 모여서 소풍처럼 나가자고 하셨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그러자고, 작은아버지 집으로 직접 연락을 넣었던 하늘이었다.
당신이 묻히시게 될 장지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는 말씀 같은 건 없으셨다.
수목장지를 가족들 다 같이 한 바퀴 둘러보고 있을 때였는데, 조금 전 장태산 회장이 지목했던 자리를 예약 여부를 확인한 수행 기사가 관리 사무소를 다녀와 장영석 회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버지.”
“어.”
“아까 보셨던 자리 있잖아요.”
“어, 그래.”
“빈자리라고 합니다.”
“잘됐네. 암만 둘러봐도 아까 거기만 한 자리가 눈에 잘 안 들어와. 다리가 아파서 더는 못 올라갈 거 같고, 온 김에 아까 그 자리로 예약을 좀 하고 그렇게 내려가자.”
장영석 회장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할까요? 마음에 드세요?”라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네들 편한 게 중요하지, 뭐가 더 중요하겠어? 찾아오기도 수월하고, 공기 좋고, 보기에도 좋고… 그러면 된 거다. 하늘아.”
“…왜요, 또.”
“이놈 이거. 할애비가 부르는데, 왜요, 또?”
“아, 왜 평소 안 하던 청승을 자식들 다 불러 놓고 떠시냐고. 어련히 자식들이 최고 좋은 명당에 할머니랑 함께하실 수 있게 안 만들어 드릴까.”
빽! 하고 날 선 소릴 내뱉은 장손녀를 장태산 회장은 싱긋이 웃으며 쳐다봤다.
“내가 너희들 안목을 믿을성싶으냐. 뭐 하나 내 손이 안 닿은 게 없다.”
“그렇게 못 미더울 거 같으면 그냥 자식들 신경 안 써도 되게 오래 살면 되겠네.”
“딱 하나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그거 아니냐. 관리 사무소 내려가서 김 비서가 확인하고 온 자리, 예약하고 와.”
“뭘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급하게 처리를 해요? 좀 더 둘러보고, 다른 곳도 가 보고 그렇게 해도 되는 거지.”
“어제는 내가 너도 못 알아봤다며?”
“…….”
“아까는 차 안에서 내가 오자고 한 여길 오는데도, 내가 왜 차에 타고 있는지를 순간 모르겠더라.”
여전히 장태산 회장은 웃고 있었다.
“얼른 내려갔다 와. 조금이라도 온 정신이 더 길 때 내 손으로 하나하나 직접 정리를 해야겠어.”
“그럼 예약도 할아버지가 직접 해요!”
온 가족이 놀랐다.
할아버지에게 지금 무슨 말버릇이냐고, 어디 감히 어른들 다 있는 앞에서 할아버지한테 그런 돼먹지 못한 소릴 하는 거냐고 혼을 낼 정신도 없을 정도로, 온 가족이 하늘이가 보인 뜻밖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네 명의 손주가 있지만, 그 네 명의 손주 중에서도 유독 장손주 하늘이를 아꼈던 장태산 회장이었다.
그에 장태양은 물론이고 장영우 대표의 자식들인 나머지 두 손주들은 아무런 불만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만큼 할아버지가 장손녀를 편애하는 만큼,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하늘이의 마음이 자기들보다 압도적으로 크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기에.
할아버지와 같이 살겠다고 독립도 하지 않고 있는 하늘이었다.
개인 생활보다 할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늘이었다.
그런 하늘이었기에 다른 가족들 모두는 하늘이가 지금 보이고 있는 신경질적인 반응에 잠시 놀라기만 했을 뿐, 이내 그 마음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는 더는 이 자리에 함께 있고 싶지 않다며 먼저 수목장지를 벗어났다.
자신이 타고 온 차로 향하는 동안, 우는 뒷모습까지도 가족들에게 보여 주지 않기 위해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미친. 그런 걸 왜 나한테 시키고 난리야! 노망, 노망…. 말로만 들어 봤지, 이제야 뭐가 노망인지 확실히 알겠네. 무슨 청승을 이딴 식으로 떨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가며 하늘이는 끝까지 울음으로 들썩이는 어깨를 단단하게 참아 내며 차에 올랐다.
그냥 가야겠다.
혼자 가야겠다.
가족들이야 알아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잘 돌아가겠지.
차에 시동을 건 하늘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수목장지를 빠져나왔다.
수목원장 입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밀려드는 후회와 짜증.
그냥 할아버지가 시키시는 대로 직접 예약을 할 걸 그랬나?
그냥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예약을 할 걸 그랬나?
그런 후회가 밀려오는 와중에도 다시 조금 전 그 상황, 몇 분 전 그 상황이 자신에게 찾아온다면 똑같이 신경질을 부리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거라는 생각에 짜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턱 끝이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결국 하늘이는 수목장지를 빠져나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차를 한 곳에 세워 놓고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 * *
270화 남의 편
하늘이는 개를 무척 좋아하지만,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직접 키우지를 못하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13살짜리 진돗개 흑구가 노화로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걸 보고 난 뒤로, 이별이라는 감정을 경험했고 그 감정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다는 걸 알아 버렸기에 더는 개를 키울 수가 없었다.
강아지뿐 아니라 새, 거북이, 심지어 관상용 잉어까지도 하늘이는 자신보다 먼저 죽을 수 있는 애완동물은 집에 들이지를 못했다.
같이 있으면 너무 즐겁다.
같이 있는 순간은 너무 행복하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떠나는 게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건 하늘이에게 너무 큰 아픔이고 또 스트레스였다.
그게 하늘이가 사람까지도 쉽게 사귀지 못하는 이유였다.
스스로에 대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줘 버리는 게 바로 하늘이었다.
그래서 상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한 번 마음을 줘 버린 사람이라면 상처를 받을 걸 알면서도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다 줘야만 하는 사람.
그게 장하늘이었다.
속 시원하게 울음을 터뜨리고 나니 이제야 조금 후련해지는 기분이다.
백미러를 통해 번져 버린 화장을 보고 있자니 팬더 곰이 따로 없다.
얼른 파우치에서 화장 솜을 꺼내 휴대용 스킨으로 번진 화장을 지워 내고 얼굴에 미스트를 뿌렸다.
산뜻한 라벤더 향이 서러웠던 감정을 조금은 누그러뜨려 주는 기분이다.
11시.
이 상태로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거고, 그렇다고 집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씨… 쉬는 날 아침부터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스마트폰을 열어 연락처 스크롤을 내려 보지만 이 시간에 마땅히 연락을 해서 보자고 할 사람이 없었다.
정훈이의 연락처가 잠시 눈에 들어왔지만, 이 기분에 만날 만큼 편한 상대가 아닌 건 분명했다.
그걸 이제 알았다.
결혼 이야기가 몇 년째 오고 가는 중이지만, 이럴 때 생각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지도 못할 정도로 아직 하늘이에게 정훈이는 어렵고 거리가 있는 존재였다.
“나 도대체 그동안 어떻게 산 거야아…. 어떻게 된 게 연락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히이잉… 흐아아앙….”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조수석 시트에 툭 하고 던져 놓고 하늘이는 다시 한번 억지로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울어야만 시원할 수 있는 기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일부러, 억지로 울음을 크게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창을 살짝 열어 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인지 왜 평소엔 알지 못했을까.
차가운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와 열기를 조금 식혀 주니, 그나마 숨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작은아버지가 다 계신 자리에서 굳이 자신에게 묫자리를 예약하고 오라고 한 할아버지의 생각이 조금은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고 있었다.
백미러 속에 담겨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못생겨 보였다.
“개못생겼어, 씨이….”
조수석 시트에 널브러져 있는 폰을 다시 들어 하늘이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놀러 갈 거야.”
―알아서 해라?
“나 거기 다시 안 간다고. 나 기다리지 말라고.”
―알아. 아무도 너 안 기다리고 있어.
“엄마까지 나한테 그러지 마라, 좀.”
―점심은 알아서 할 거고, 저녁도 먹고 들어와라. 지금 막 양평에 있는 오리백숙집으로 가기로 했어. 아마 거기서 점심, 저녁 다 먹고 들어갈 거 같아.
“…백숙? 통나무집?”
―어.
“단호박 백숙?”
―어. 네 작은아버지가 예약을 다 해 놓은 모양이야.
“씨이… 뛰쳐나오기 전에 미리 좀 말을 해 주지….”
―올 거면 오고. 어딘지 알잖아.
“안 가. 안 갈 거야. 나도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 오늘은 무조건 늦게 들어갈 거야. 기다리지 마.”
―안 기다려. 걱정하지 말고 놀아.
“우와, 씨….”
다시 돌아오라고 할 줄 알았다.
그랬음 못 이긴 척, 다시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었다.
결국 하늘이는 다시 스마트폰 연락처 스크롤을 내리며, 자신의 연락이 불편하지 않을 상대를 찾기 시작했다.
ㅅ, ㅇ, ㅈ….
스크롤은 계속해서 끝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이 시간에 연락을 해서 만남을 만들어 볼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ㅊ’까지 스크롤이 내려갔을 때….
채서린.
채서린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도 용기를 내어야만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상대였다.
―언니!
“서린아.”
―응응, 쉬는 주말에 무슨 일이야?
“너도 쉬어?”
―응?
“너 스케줄 없냐고.”
―오늘은 없어. 나도 하루는 쉬어야지. 내일 새벽에 인터뷰 하나, 아침에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 대본 리딩이 주말 스케줄 끝.
“무슨 대본 리딩을 일요일 아침에 해?”
―그거 언니네 회사가 투자한 기획 미니시리즈거든?
“그럼 해야지.”
―푸흡. 그런데 진짜 어쩐 일이야, 쉬는 주말에? 목소리는 또 왜 그래?
“서린아.”
―왜요. 왜? 뭔데? 무슨 일 있어요?
“나 지금 수목장지에서 도망쳐 나오는 길이다?”
―수목장지? 그게 뭔데?
“수목장. 봉분 말고, 나무 심는 거.”
―아….
“할아버지가 수목장으로 해 달래. 그러면서 나한테 자리 예약을 하라고 하시잖아.”
―언니가 장손주잖아. 후계자이기도 하고.
“아는데… 그 말 듣는 순간 미칠 거 같은 거야. 그래서… 그냥 뛰쳐나왔어.”
―하여간 이럴 때 보면 진짜 아기라니까, 아기. 일 할 땐 세상 똑똑한 척, 똑 부러지는 척 다 하면서… 언니랑 안 친한 사람들은 언니 실제 모습이 이렇다는 거 말해 주면 웃지도 않을 거야. 나도 처음엔 이 언니가 날 앞에 앉혀 놓고 연기자 앞에서 연기를 하는 건가 싶었다니까? 그래서 지금 혼자 있는 거예요?
“집이야?”
―집이지.
“놀러 가도 돼?”
―그러겠다고 전화한 거 아냐? 와. 와요. 점심은? 아직 전이지?
“어.”
―잘됐네. 안 그래도 점심으로 뭘 먹어야 할지 그거 고민 중이었는데.
“뭐 먹을 건데? 내 거도 같이 시켜. 술은 내가 가져갈게.”
* * *
하늘이 번호로 뜬 채서린의 전화를 받은 건 오후 5시가 다 되어 갈 때쯤이었다.
사업 관련해서 생각거리도 많고 해서 오랜만에 붓을 손에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