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269)
먹을 직접 가는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기 때문에.
먹을 갈고 화선지 한 편에 적당한 농도의 먹물을 찍어 봤다.
몽글하게 뭉친 먹물이 화선지 속으로 제법 멋스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게 하늘이의 전화라서 속으로 참 눈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딴 거 할 땐 가만히 있다가, 이제 좀 집중을 해 볼까 하던 차에 걸려 온 전화이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들고 있던 붓을 벼루 속에 담가 놓고 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그런데 하늘이 목소리가 아닌 거다.
발신자 번호는 분명 하늘이의 이름으로 떴는데, 목소리는 전혀 다른 목소리.
그런데 날 오빠라고 하네?
“누구세요?”
―나야, 서린이.
채서린?
―다행이야. 내가 오빠 번호를 지우긴 했는데, 그래도 오빠 번호 뒷자리는 아직 기억을 하고 있네. 이상한 이름으로 저장이 되어 있어서 오빠 뒷자리 몰랐음 번호도 못 찾을 뻔했어.
“무슨 소리야? 그리고 하늘이 전화로 왜 네가 전화를 해?”
―하늘이 언니 지금 완전 뻗었어.
“뻗어? 뭐 술 마셨어?”
―어.
“언제부터 뭘 얼마나 마셨길래, 아직 5시도 안 됐는데 술에 뻗었다는 말이 나와?”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라도 와서 언니를 좀 데리고 가 줘야 돼. 내일 스케줄만 없으면 그냥 우리 집에서 재우겠는데, 내가 내일 새벽부터 스케줄이 있어. 아무리 혼자 사는 집이지만, 내가 없을 때 내 집에 누군가가 있는 건 하늘이 언니라도 아직은 불편하고. 그리고 내일 대본 리딩이 있어서 자기 전에 그거 준비를 좀 해야 돼. 오빠가 좀 와서 하늘이 언니 데리고 가.
“집이 어딘데? 어딘지를 알아야 데리러 갈 거 아냐.”
―언니 톡으로 주소 찍어 줄게.
참 가지가지 한다, 진짜….
사내놈이었음 그냥 차에 태워서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주라고 하거나, 아님 미래금융 쪽 수행원 일 하는 사람한테 전화를 걸어 보라고 했을 텐데, 그러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결국 먹만 갈아 놓고, 그 먹물은 써 보지도 못한 채 집을 나서서 차에 올라야 했다.
“…….”
어떻게, 어떻게 찍어 준 주소를 내비에 옮겨 채서린의 집에 도착했다.
현관을 들어서서 거실 쪽으로 몸을 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거실 소파에 대자로 누워 곯아떨어진 하늘이.
채서린이 가진 힘으로 하늘이를 침대로 옮길 수 있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나마 이불을 덮어 줬던 거 같은데 그 이불마저 소파 아래 바닥에 뱀 허물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도대체 술을 어떻게 마시면 사람이 저렇게 곰처럼 퍼져 있을 수가 있지?”
그것보다 분명 같이 마셨을 건데 어떻게 하늘이는 인사불성이 되어 있고, 채서린만 술 한 잔 안 마신 사람처럼 멀쩡할 수 있는 건지, 그게 더 궁금했다.
그냥 안 취한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술 한 방울 입에도 안 댄 사람처럼 채서린은 멀쩡했다.
“넌 안 마시고, 하늘이 혼자 저렇게 마신 거야?”
“말했잖아. 난 내일 새벽부터 스케줄 있다고. 그냥 같이 잔만 받아 놓고 이야기 들어 주는 역할만 했어. 술은 언니 혼자 다 마셨어.”
“얼마나 마셨는데?”
“와인 한 병 조금 더 마셨어.”
“와인 한 병 조금 더 마시고 저렇게 된다고?”
“설마 술이 다일까. 그동안 회사 일로 얼마나 피곤했을 거야? 그럴 때 있잖아. 주량 상관없이 체력적으로 취하는 날. 취기에 좀 더 취해 보고 싶은 날. 딱 그런 날이었던 거 같아.”
“아무튼, 술 상대 해 준다고 네가 수고가 많았다. 뭐 안 좋은 일 있었대? 왜 저렇게 마신 거야? 그것도 대낮부터.”
채서린을 통해 오늘 태산이가 자식들을 다 데리고 자신이 평생 잠들 장소를 직접 보러 갔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하늘이가 어째서 대낮부터 맛도 제대로 모르는 와인에 저렇게까지 절여지게 되었는지도.
명색이 대한민국 금융업계의 선두에 있는 미래금융을 짊어지고 나갈 놈이 고작 그런 걸로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이나 보이고….
저렇게 약해 빠진 놈을 어디에다 쓸까, 한심하단 생각과 함께 그래도 태산이 놈이 시꺼먼 사내놈이 아닌 하늘이같이 감정 표현이 다양한 장손녀를 항시 곁에 두고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부럽기도 했다.
“내가 내일 스케줄만 아니었음 오빠한테 전화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괜히 미안하네.”
“아냐, 잠은 집에서 자야지. 잘했어.”
“전화번호를 다 이상하게 저장을 해 놨어, 이 언니가.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못 알아볼 거야. 항상 같이 다니는 이 비서님 있잖아.”
“어.”
“그분 번호를 아무리 찾아봐도, 어떻게 저장을 해 놨는지 알 방법이 있어야지. 나는 뭐라고 저장을 해 놨는지 알아?”
“뭐라고 해 놨던데?”
“최애캐지아.”
“최애캐지아?”
“푸훕. 미래기획이랑 처음 같이했던 작품이 프레지아 꽃향기였거든. 거기에서 내가 맡았던 역할이 지아라는 캐릭터였고. 그걸로 저장을 해 놨더라. 진짜 엉뚱해.”
엉뚱이고 나발이고, 내가 지금 저 생물체를 업어서 이 집을 나서야 한다는 소리잖아.
간만에 무거운 운동 하게 생겼네.
“오빠는 뭐라고 저장을 해 놨는지 알아?”
“나쁜 놈이라고만 안 되어 있음 다행이겠다.”
“남의 편.”
“남의 편?”
“차마 벌써부터 남편이라고는 저장을 못 하겠던 모양이지.”
“전혀 다른 의미 아닌가?”
“어쨌든 남편을 다들 남의 편이라고들 하니까. 오늘이 처음이야.”
“뭐가?”
식탁 위로 올려져 있던 하늘이의 가방을 챙겨서 내게 건네며 채서린이 말했다.
“나랑 술 마시면서 오빠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안 꺼낸 게.”
“…….”
“그렇잖아. 이 언니가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할 이유가 어디에 있어? 오빠라는 이유 말고는 없다고 봐야지. 일 때문에 보자고 하든, 아님 내 생일이라 선물을 주겠다고 만나자고 하든… 만나는 이유는 그때그때 다 달랐지만, 항상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국은 다 오빠 이야기로 끝이 나. 기승전 손정훈. 그런데 오늘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느라, 오빠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안 물어보네.”
“나에 대해 물어봐?”
“항상 물어보지. 오빠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빠의 연애사, 오빠 연애 취향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언니 주위엔 없을 테니까.”
“…….”
“나 이거 선 씨게 넘고 있다는 거 아는데, 언니한테 좀 잘 해 줘. 내가 요즘 언니가 나한테 물어보는 오빠에 관한 이야기 때문에 다시 오빠가 나한테 얼마나 따뜻했던 사람이었는지, 보기하고 달리, 소문하고 달리 괜찮았던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돼.”
“…….”
“어쨌든 내 입장에선 언니랑 친해진 건 참 좋지만, 언니한테 내 지난 연애를 꺼내 보여 줘야 하는 건 불편하거든. 언니는 괜찮다고 하지만, 나는 괜찮지가 않아. 괜히 잘못한 것도 없이 언니한테 미안하고, 또 내가 왜 이런 거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야. 다른 거 다 잘하고,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 왜 자기 좋아해 주는 여자 마음 하나 제대로 몰라줘? 언니가 오빠 많이 좋아해. 그러니까 좀 잘해 줘.”
난 하늘이의 가방을 다시 채서린에게 건네 놓고 하늘이를 둘러업었다.
그리고 다시 가방을 넘겨받아 채서린의 집을 나섰다.
* * *
271화 아무렇지도 않냐?
멋 부리다가 얼어 죽겠다.
이 추운 날씨에 무슨 옷을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왔지?
진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어지간했으면 비상계단으로 내려갔을 거다.
이 시간에 술이 떡이 되어서 남자한테 업혀 있는 여자를 혹여나 다른 사람이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서 보기라도 하면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런데 채서린이 사는 집 층수가 너무 어중간했던 거지.
13층.
이걸 혼자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다 큰 여자를 등에 업고 내려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결국 바로 눈앞에 보이는 비상계단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열린 엘리베이터 안엔 이미 사람이 타 있었다.
그것도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 한 명과 누가 봐도 그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젊은 커플이….
이런 우라질….
내가 내려가는 버튼을 눌러서 엘리베이터를 잡아 놓고, 안 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어린애가 보고 있는데 술이 떡이 된 여자를 등에 업고 저 안으로 들어가자니 그것도 그 부모 보기에 미안하고….
“…….”
그런데 아이의 부모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안으로 더 들어가 주며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게 아닌가.
이런 친절은 정말 필요 없는 친절인데….
어쩔 수 있나, 탔지.
그런데 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잠시 다시 멈췄고, 거기에서 강아지를 각각 품에 안고 있는 젊은 여자 둘이 더 탔다.
당연히 다들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하늘이를 업고 있는 날 힐긋거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들의 힐긋거림은 굳이 엘리베이터 안 거울이 아니었더라도 내게 다 전달이 되고 있었다.
잘하는 짓이다.
얼굴이나 안 팔린 놈이라면 내가 말을 안 하겠는데, 여기저기 얼굴이란 얼굴은 다 팔린 놈이 이 시간에 술이 떡이 되어서 남자한테 업혀 있는 꼴이라니.
거기다 나는 또 얼굴이 좀 많이 팔려 있냐고.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같이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1층에서 내렸다는 거고, 그때부터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동안 더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는 거다.
“너는 진짜 씨이… 일단 술만 깨라. 내가 진짜 가만히 안 있는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간신히 조수석에 하늘이를 태우는 데 성공을 했다.
하늘이는 완전 기절을 해 있는 상태였다.
취했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곯아떨어진 상태.
입고 있던 내 외투를 벗어 스커트 아래로 나와 있는 민다리를 덮어 줘 놓고 안전밸트까지 채워 준 뒤에야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이게 뭐라고 땀까지 나고 있었다.
* * *
한강을 건너고 있을 때였는데, 저 멀리 63빌딩이 저녁 노을을 맞아서 건물 전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응?”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부시시한 눈으로 날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감는 하늘이었다.
그러더니 다시 눈을 떠서 이게 뭐냐는 듯 내게 물었다.
“어? 손정훈이다?”
“너는 진짜, 하아….”
“어? 진짜 손정훈이다.”
“그럼 가짜 손정훈이겠냐?”
“오빠가 여기에 왜 있어?”
잠만 깼다뿐이지, 횡설수설하는 게 술까지 깬 건 아니었다.
“이거 내 차다. 내 차에 네가 있는 거야.”
“그럼 내 차는?”
“너 그냥 다시 자면 안 되냐? 너 지금 입에서 술 냄새 장난 아니게 나거든? 이 냄새에 나까지 취하겠다. 집까지 20분 남았어. 가는 동안 다시 좀 자라.”
“우와, 대박 신기. 우와… 오빠도 이런 기분이었어?”
“뭐라는 거야?”
“기억 상실. 갑자기 눈을 떴는데, 내가 원래 있어야 되는 자리가 아닌 엄한 곳에 와 있고, 내 옆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없었던 사람이 같이 있고. 우와, 대박 신기.”
“자라, 자. 그냥 좀 자라.”
“지금 몇 시야?”
이 녀석 이것도 주사가 있네….
손으로 좌석 시트 옆 부분을 더듬더니, 최대한 뒤로 눕혀 놓았던 좌석 시트를 세우기 시작했다.
“에게? 이제 6시 반이야?”
“보통은 이런 상황에선 나 보기가 민망해야 정상 아니냐?”
“내가 왜?”
“대단하네. 멋지다. 맞아. 민망할 게 뭐 있어.”
“아, 목말라. 물 있어?”
여전히 횡설수설, 자기가 직접 생수병을 찾아서 따 마시고는 그 생수병을 품에 안고서 눈을 감는 하늘이었다.
“아, 죽겠다. 머리 깨질 거 같아….”
“그러게 무슨 술을 그렇게 미련하게 마시냐? 어이, 곰. 진짜 내가 마늘 좀 사 줘?”
“마늘 말고 해장국. 속 쓰려 죽을 거 같아.”
“해장국 같은 소리 하고 있다. 간만에 글자 좀 써 보겠다고 먹까지 다 갈아 놨는데 너 때문에 인마, 그 먹물 써 보지도 못하고 달려온 거야. 집에 가서 해장해.”
“해장국, 해장국… 태화장 육개장….”
고민을 전혀 안 했던 건 아니었다.
헤롱헤롱거리긴 해도, 일단 잠이 깬 건 확실하고 나도 나온 김에 저녁을 먹고 들어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하늘이는 그냥 잠만 깬 거지, 여전히 술에 절여져 있는 상태였다.
얘를 데리고 뭘 먹으러 식당 같은 곳을 찾아간다는 건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해장국, 해장국 노래를 부르는 하늘이의 말을 싹 무시하고 중간중간 알았다며, 해장국 잘하는 집으로 간다는 거짓말까지 해 가며 하늘이의 집까지 차를 몰았다.
“어? 뭐야? 우리 집 근처에 해장국 잘하는 집 있다며? 거기로 간다며?”
“이 집이 해장 맛집이야. 내려.”
앉아 있는 것만 봐서는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