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38)
“그래서?”
“에이, 이렇게 찾아와서 그런 걸 물어볼 땐 이유가 하나밖에 더 있어요?”
“나랑 같이 술 한잔하자고?”
“혹시 오늘 저녁에 마치고 약속 있으세요?”
“약속… 약속… 하반기 공채 공지 내일 올리는 거 아니었어?”
“네, 맞아요.”
“그럼 오늘, 내일 바쁜 거 아냐?”
난 살짝 장난을 걸어 봤다.
“왜요? 저는 용기 내서 찾아왔는데, 혹시 저랑 둘이 술 한잔하는 거 별로세요? 아니면 부담스러우시거나.”
“그럴 리가 있나. 바쁠 거 같은데, 술 이야기 꺼내니까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지.”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시험 전날 밤새 공부하지, 잘하는 애들은 미리미리 다 준비해 놓고 시험 전날은 컨디션 조절하죠.”
“그 컨디션 조절을 나하고 술 마시는 걸로 하겠다?”
“아뇨. 그냥 오늘은… 사장님만 괜찮다고 하시면, 사장님한테 술 한잔 얻어먹고 싶어서요.”
“…….”
“저 약속 지켰잖아요.”
“약속? 무슨 약속.”
“따로 고모 만나는 거 조심하라고 하셔서, 그 소리 들은 이후로 저 일부러 고모한테 전화 한 통 안 했어요.”
그놈 거참… 적당히 빼라, 적당히.
장인이 사위한테 술 한잔 받아 보고 싶어 이러는 건데, 술 한잔 받기 더럽게 어렵네.
“이번 하반기 공채, 무조건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믿으셔도 돼요.”
“그러고 보니까 내가… 손 과장 네가 뭘 좋아하는지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네.”
“저요?”
오늘은 좀 괜찮은 걸 안주로 놓고 마시고 싶은데….
“괜히 밖에 식당 같은 데 가서 사람 많은데 시끄럽게 마시지 말고, 사장님 집에서 고모랑 같이 저녁 먹으면서 반주 삼아 한잔하면 안 될까요?”
내가 자네랑 한 약속 때문에 지난 한 달간 금지옥엽, 공주처럼만 키웠던 여정이 얼굴도 여태 못 보고 참고 있었다고.
알기나 알아?
“집에서 먹자고?”
“지분 이야기 절대 안 합니다. 저 이제 아예 그쪽으로는 관심도 없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집에 술안주 할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하는 말이지.”
“그냥 평소 저녁 식사 하는 거에 제 밥그릇 하나 더 올려 주시면 돼요.”
“그래도… 잠깐만 있어 봐.”
남 사장은 곧 여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정훈이가 술 한잔하자는데, 밖에서 하는 건 좀 그럴 거 같아서. 어, 그래, 그래. 그게 좋겠네. 그럼 당신 말대로 회를 좀 시켜.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으며 남 사장이 말했다.
“네 고모는 바로 아네.”
“뭘요?”
“너랑 같이 간다니까, 너 회 좋아한다고 회를 좀 시켜야겠다 그러네.”
정훈이 놈이 회를 좋아했구나.
“역시 고모네요. 바로 딱 알잖아요.”
“알았어. 내려가서 일 보고 있다가, 퇴근하고 집으로 와.”
앗!
여정이 놈 집이 어딘지 난 모르는데….
하긴.
장혜란이한테….
아니지, 아니지. 괜히 장혜란이한테 물어봤다가 괜한 오해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번거롭게 그러지 말고 그냥 같이 가시죠. 퇴근하고 사장님 차 옆에 차 세워 놓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게 더 번거롭지 않아?”
“같이 들어가야 가족이지, 따로 들어가면 조카가 고모 집 밥 얻어먹으러 가는 건데 괜히 손님 같잖아요.”
* * *
만나자고 하면 싫다고 할까요?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왔던 건 전축 스피커 위로 올려진 작은 액자 하나였다.
지난 한 달간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여정이의 나이 든 얼굴을 보기도 전에 그 액자 속에 든 가족사진에 난 잠시였지만 주춤하고야 말았다.
여정이가 아트 스쿨을 졸업할 때 찍은 우리 가족 사진이었다.
홍명이와 홍준이는 각각 한국에서 기본적인 인문학 대학 공부를 먼저 시키고 경영에 관련된 깊은 공부는 둘 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여정이는 어릴 때부터 제 어미를 닮아서 미술에 소질이 있기도 했거니와 아들자식이 둘씩이나 있는데 굳이 막내딸 아이까지 회사 경영에 참여하게 만들 이유가 있을까 싶어 일찌감치 미술 쪽으로 지원을 많이 했었다.
뉴욕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그 뒤로 다시 2년간 스페인 마드리드의 아트 스쿨에서 공부를 하게 만들었다.
저 사진이 바로 그 아트 스쿨 졸업식 날 찍은 우리 가족 사진이다.
사진 속엔 여정이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내가, 왼쪽으로는 안사람이 서 있고, 또 내 옆으로는 홍준이가, 안사람 옆에 홍명이가 서 있었다.
저런 사진을 찍었다는 기억은 있는데, 그때 찍은 사진이 저런 모습이었다는 건 이제야 봐서 안다.
저 사진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여정이와 가장 끝에 서 있는 홍준이… 그 둘만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게, 내 마음을 찹찹하게 만들고 있었다.
“정훈이 왔어? 들어와, 들어와.”
여정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그 통통하던 녀석이 지금은 얼굴에 생기가 하나도 없을까.
홍준이의 안사람인 장혜란의 모습과 너무 비교가 되고 있었다.
장혜란이는 그 나이라는 게 믿기 힘들 정도로 화사하게 젊음을 잘 유지하고 있던데, 어떻게 여정이 이놈은 이렇게까지 깡말라서, 얼굴에 핏기도 찾기 힘들 정도로 시들시들해져 있단 말인가.
아무리 비싼 옷을 걸치고 있으면 뭐 하나.
사람 자체가 너무 건조해져 있는데.
“배 많이 고프지?”
여정이는 양손에 비닐장갑을 낀 채 밖으로 나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아뇨, 괜찮아요.”
“조금만 기다려. 금방 끝나. 안에서 아줌마가 매운탕 간 보고 있으니까, 화장실 들어가서 손부터 씻고 나와.”
날, 아니 정훈이를 챙기는 게 장혜란보다 더 엄마 같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평소엔 오라고 해도 안 오던 애가 같이 저녁을 먹겠다고 찾아왔어?”
비록 내 눈에는 너무 말라 있고 생기가 없었지만, 그래도 조카의 방문에 기분이 좋긴 한 모양이다.
여정이와 남 사장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정훈이 이놈보다도 6살이나 어리다고 하니까 스물셋.
지금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마침 전공도 미술이라고 하니 지금 여정이가 운영하고 있는 ‘남영 갤러리’를 맡아 나가게 하면 되겠다.
남영 갤러리.
나 손중길이의 모친 성함이다.
곽남영 여사.
그 갤러리 이름 역시 내가 지어 주고 눈을 감았다.
재경은 내 부친 손 재 자, 경 자 쓰시는 분의 성함을 그대로 옮겨서 회사 이름을 만든 것이고 여정이에게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미술 쪽으로 지원을 하면서 나중에 녀석이 계속 미술 쪽으로 나가겠다고 하면 갤러리를 하나 만들어 맡기면서 그 갤러리의 이름에 내 어머니의 성함을 붙여 그 정을 그리고 싶었다.
잠시 뒤 남 사장이 편한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는데, 아주 당연하다는 듯 주방으로 들어가 식탁의 차림을 확인하고 찬그릇을 이리저리 옮겨 보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반대로 여정이 이 녀석은 그런 남 사장 옆에서 입으로만 식탁을 차리고 있었고.
“당신이 여기 앉을 거잖아요. 정훈이가 이쪽으로 앉고. 회 접시는 그냥 이쪽으로 둬요.”
“당신은 안 먹어?”
“나는 맛만 보면 되지. 앞접시에 조금 덜어서.”
“당신이 여기에 앉을 거야?”
“오늘은 내가 여기에 앉지, 뭐.”
“그럼 이거 고등어랑 브로콜리는 이쪽으로 놔야겠네.”
“생선도 그냥 정훈이 앞으로 놔요. 난 브로콜리만 있으면 돼.”
“무슨 소리야. 내가 이거 당신 먹으라고 생물 건져 올린 거 그 자리에서 바로 웃돈까지 줘 가며 가져온 건데.”
“아, 됐다고. 그냥 정훈이 앞으로 놔.”
“이렇게?”
“씁… 아, 그냥 저리 비켜요, 저리.”
괜히 고맙네.
회사에서 봤을 땐 몰랐는데, 집에선 꽤 다정한 구석이 있는 친구였구만.
남 사장 하는 걸로 봐선 딱히 속을 썩일 것 같지도 않은데, 도대체 여정이 이놈은 그간 무슨 마음고생을 그렇게 많이 했길래, 얼굴에 저런 우환 주름이 가득하단 말인가.
역시 그런 거겠지?
아비인 나의 죽음이야, 비록 이르긴 했지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이별이었을 거다.
하지만 아비인 나보다 더 부모처럼 따랐던 큰오빠, 홍명이 놈의 바보 같은 선택과 그 선택으로 이어진 어미와의 이별은 그 예민하고 감수성 풍부했던 여정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감당해 내기엔 너무 큰 시련이었을 것이다.
여정이는 정말 그림과 가족밖에 모르던 녀석이었다.
특히나 오빠들을 잘 따랐고, 오빠들이 있었기에 완벽한 공주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녀석이다.
그런데 그 오빠들이 회사 경영권을 놓고 세상이 시끄러울 정도로 난리를 떨었으니, 그리고 그 난리로 인해 홍준이 놈을 제외한 가족 모두를 잃었으니… 지난 세월 얼마나 홀로 버티기 힘들었을까.
그 옆을 남 사장이 지금처럼 따뜻하게 지켜 줬을 거란 생각을 하니 내 입장에선 고마울 수밖에.
식사를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정이는 채소 위주로만 그것도 아주 조금씩 맛만 보는 수준으로 젓가락을 놀렸다.
“고모 혹시 어디 아프세요?”
“나?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식사하시는 것도 그렇고….”
내 말에 여정이와 남 사장은 서로를 쳐다보며 내가 알 수 없는 자기들만의 대화를 눈빛으로 주고받는 눈치였다.
“정훈이 너도 이제 서른 가까워진다고 나이가 드는 모양이다.”
여정이가 말했다.
“안 보이던 게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지? 그거 나이 든다는 증거야.”
남 사장도 함께 피식하고 웃으며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런데 고모 육고기는 원래 안 드셨어요?”
여정이 녀석이 제일 좋아했던 음식이 바로 고기였다.
처음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놨을 때, 방학이라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미국 고기에 맛을 들여서 살이 이만큼 쪄서 왔던 게 아직도 눈에 훤하다.
“고모 신경성 위염이야. 몰랐어? 가끔 삶은 거나 한 점씩 먹을까, 그것도 먹고 나면 부대끼고, 나이 드니까 잘 안 먹어지더라. 제사나 다른 가족들 모임 때, 고모가 고기 먹는 거 본 적 있어?”
“…….”
남 사장이 거들었다.
“정훈이 이놈이 어디 그런 걸 관심 있게 보기나 했겠어?”
아주 따끔한 회초리 같은 한마디였다.
그 말 앞에 난 내가 그렇게 한 것도 아니면서 그저 고개만 숙이며 회 한 점을 입속으로 넣었다.
“건강 챙기세요, 고모.”
“고맙다. 이젠 고모 걱정도 다 해 주고. 그건 그렇고 넌 왜 젓가락질을 오른손으로 해?”
“…네?”
“너 원래 밥 왼손으로 먹잖아.”
그 말에 남 사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정훈이 얘, 두 손 다 쓰잖아.”
“그래도 밥 먹을 땐 항상 왼손 쓰는 것 같더니….”
정훈이 놈도 나처럼 양손을 다 쓰는 모양이다.
그건 또 몰랐네.
난 얼른 젓가락을 왼손으로 옮겨서, 능숙하게 젓가락질하는 시늉을 했다.
“앉은 자리가 이래서 오른손으로 먹고 있는 거예요. 제가 왼손으로 먹으면 고모부하고 계속 부딪치니까. 고모부 한잔하시죠.”
식사가 거의 다 끝나 갈 즈음이었다.
난 식사 내내 여정이와 남 사장 사이에 흐르는 돈독한 관계에 흐뭇해하며, 사위가 따라 주는 술을 받고, 내 사위, 딸에게 두 손으로 술을 따라 주며 철저하게 정훈이인 척을 했다.
그러다 결국 힘들게 물어봤다.
“혹시….”
여정이와 남 사장은 뜨던 숟갈을 잠시 멈춰 놓고 날 쳐다봤다.
왜 말을 하다가 마느냐는 표정이었다.
“정엽이 형 소식 아는 거 있으세요?”
다시 한번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둘만의 눈빛 대화를 시작했다.
남 사장이 입을 열었다.
“정엽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