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44)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난 일부러 몸을 뒤로 빼며 정 대리와의 거리를 만들었다.
“뭘요?”
“아무리 공식 일정이 아니라, 과장님 개인 일정으로 가시는 거라도 어쨌거나 생뚜앙 지사 직원 입장에선 회장님의 아들이 지사를 방문하는 겁니다.”
“근데요?”
“이건 공식과 비공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죠.”
“그래서요?”
“혼자 방문을 하시는 건 여러모로 보기가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안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저 데리고 가시죠.”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정 대리가 좀 더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난 그런 정 대리를 밀어내며 물었다.
“이거 출장 아니에요. 그냥 연휴 이용해서 가는 겁니다.”
“네, 저도 조금 전 통화하시는 거 다 옆에서 들었습니다.”
“정 대리는 추석 때 부모님 만나러 안 가요?”
“다른 날은 다 가도 명절만큼은 피하고 싶죠.”
“…왜요?”
“왜긴요. 그날은 집에 작은아버지, 고모도 오시거든요.”
“……?”
“장가는 언제 갈 거냐, 만나고 있는 아가씨는 있냐… 저 이제 그런 질문 더는 안 받고 싶어요.”
마치 자신을 살려 달란 눈빛으로 다시 한 발짝 내게 다가오며 정 대리가 말했다.
“그날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제가 집에 없어야 저희 부모님도 스트레스가 덜할 거예요. 과장님.”
“…네.”
“저 정말 그동안 열심히 과장님 도와 왔습니다. 뭘 도와 왔는지는 제가 굳이 말씀 안 드려도 과장님이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저 파리 가 보고 싶습니다.”
“…….”
“아직 저 유럽 한 번도 못 가 봤습니다. 그냥 놀러 가겠다는 거 절대 아닙니다. 가서 과장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거 옆에서 최선을 다해 보좌할 겁니다. 그리고 저 파리 지사도 꼭 한번 가 보고 싶었고요.”
솔직히 정 대리만 괜찮다고 하면 나도 같이 가는 게 좋긴 하다.
“그래도 쉬는 연휴를 그렇게 써 버리는 건 좀… 정 대리 입장에선 아깝지 않을까요?”
“아뇨, 전혀요. 저 비행기 안 타 본 지도 너무 오래됩니다.”
“아니, 나야… 정 대리만 괜찮다고 하면 출장 개념은 아니지만 내가 비행 편이랑 다 부담을 해서 같이 가고 싶죠.”
“호텔도….”
“그게 무슨 문제라고….”
“과장님. 저 진짜 가 보고 싶습니다. 파리. 데리고 가 주세요.”
어랍쇼?
이젠 아예 대놓고 불쌍한 표정까지 만들어 짓네?
“진짜 괜찮겠어요? 나는 갔다 왔다 하는 동안 안 심심하고 좋을 거 같긴 한데, 그 연휴를 왜 그렇게 쓰려고 하지?”
“과장님이랑 같이 있으면요, 그냥 뭔가… 제 시야가 넓어지는 거 같아서 좋습니다.”
“우와, 몰랐는데, 정 대리 사회생활 완전 잘하네. 그동안 정 대리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내가 왜 몰랐지?”
“진심으로요.”
“흠… 나중에 뒤에서 이상한 말 하고 다니지 마요.”
“무슨 이상한 말이요?”
“추석 연휴에 쉬지도 못하고 손 과장 따라 파리 다녀왔다… 그런 말이요.”
“진짜 제가 가 보고 싶은 거라니까요?!”
“방금 나한테 소리 지른 겁니까?”
“누가요? 제가요?”
난 고개를 돌려 다른 직원들을 쳐다봤다.
모두가 나와 정 대리의 대화를 킥킥대며 엿듣고 있었다.
이건 엿듣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조금 애매하다.
정 대리의 목소리가 그만큼 컸으니까.
“알겠어요. 자, 이거 내 폰으로 항공권하고 호텔 예약 좀 하세요.”
“호텔은 어디로….”
“생뚜앙 지사 근처에 있는 호텔.”
“네.”
“그중에 제일 비싼 호텔, 그 안에서도 제일 좋은 방으로 두 개.”
“크흐… 역시.”
* * *
사람이 좋네요
추석 연휴가 다가오고 있었다.
승현이 때문에 가족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던 정태 내외.
녀석들이 없는 식사 자리이다 보니 내 입장에선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아들 내외 앞에서 내가 정말 녀석들의 둘째 아들인 척 연기를 하며 나의 책임을 다했고, 그 자리에서 홍준이 놈에게 연휴를 이용해 생뚜앙 지사를 다녀오겠다는 뜻을 밝혔다.
승현이가 태어난 첫 명절인데, 가족들 다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겠냐며 질색을 했던 장혜란이었지만, 곧 홍준이 놈의 허락으로 장혜란은 그 내용에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또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이었다.
“그럼 과장님, 내일 아침에 제가 댁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내가 그냥 정 대리를 데리러 가는 건 어때요?”
“과장님이요?”
“정 대리 말대로 굳이 차 두 대로 움직일 필요 있겠어요? 한 대면 충분하고 거리도 정 대리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 공항까지 훨씬 더 가깝잖아요.”
“…….”
“나 데리러 우리 집까지 왔다가 다시 공항으로 가면 왔다 갔다 하는 거잖아요. 그냥 내가 오피스텔 앞에서 정 대리 태워서 공항으로 가는 게 훨씬 경제적이지.”
퇴근길에 정 대리와 다음 날 움직일 대략적인 약속을 잡고, 혹시라도 중간에 다른 일이 생기면 전화로 조율을 하기로 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무척 헛헛한 명절 연휴 하루 전날이었다.
정훈이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과는 달리, 재경 그룹의 작은 뼈마디 한 곳까지도 말 한마디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었던 당시의 난 명절 연휴를 앞두고 이렇게까지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이런 큰 명절을 앞두고 있을 때면 며칠 전부터 집으로 걸려 오는 정·재계의 다양한 인맥들과 일일이 통화를 하며 인사를 주고받았고, 또 내가 직접 집안의 어르신들이나 내가 꼭 챙겨야 하지만 여건상 직접 찾아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기에 바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 건지, 아님 정훈이 놈의 그런 인맥들을 내가 카톡이나 SNS상에서 내 기준으로 다 차단을 해 버려서 그런 건지 연락이 오는 곳이 없었다.
평생을 한국 전쟁 통에 작은아버지와 단둘이서만 남한으로 내려와 굶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배불리 먹기 위해 일을 했고, 또 가정을 꾸려서는 기업에 큰 뜻을 두고 재경을 키우는 것에만 온 정신을 쏟아부었던 인생이었기에 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껴 볼 겨를이 없었다.
내가 느껴 봤던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내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끔씩 내 주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장태산이 말고는 내 진심, 내 뜻을 정확히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까 하는 외로움이 전부였던 거 같다.
그나마도 태산이가 항상 내 옆에 있었고, 지금 이 시대와는 달리 비록 경제 수준이나 국가 위상은 한참 아래에 있었지만, 기업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국가 자체가 동력이 풍부한 상황이라 사업이 커 가는 모습에 정작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껴 볼 틈이 없었다.
그런데 이젠 완전히 익숙해진 이 집에 홀로 있는 지금, 이상하게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난 용기를 냈다.
태산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볼 용기.
명분은 있었다.
추석 아닌가.
큰 명절을 앞두고 안부 인사차 전화를 걸어 보는 건데, 그만하면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으리라….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리고 짧은 두 번의 연결음 후, 장태산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장님. 저 손가 정훈입니다.”
정말 잠시였지만,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난 어떻게 하면 태산이와 따로 자리를 만들 수 있을지, 그 궁리를 하느라 침묵이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자네가 또 어쩐 일인가?
“추석이지 않습니까. 제가 오늘이 아니면 따로 회장님께 명절 잘 보내시라는 안부 전화를 드리기가 어려울 거 같아서 미리 전화를 드렸습니다.”
제발 이 친구야, 내가 이렇게까지 대화를 이어 가려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써서 말을 하면 받아 주는 척이라도 하게!
“제가 내일부터 며칠간 지사 방문차 파리에 가 있을 예정입니다.”
―…….
제발, 제발 이 친구야.
홍준이도 아니고, 정훈이처럼 이런 어린놈을 상대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어쨌든 내 손주 아닌가.
제 아비가 자넬 실망시키고, 또 마음을 안 좋게 만들었다는 건 나도 대충 알겠네만, 그래도 어쨌거나 자네 친구, 내 손주 놈 아니냔 말이다.
이렇게 명절을 핑계로 다시 한번 큰 용기를 내어 연락을 넣은 건데, 꼭 이놈 정훈이를 이겨 먹어야만 하겠는가?
꼭 이렇게까지 박하게 굴어야 하겠어?
“명절인데도 우리 지사 직원들, 회사 일 하느라 고향에 계신 부모, 가족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저라도 가서 수고 많다고, 고맙다는 말을 대신 전하려고요.”
―…….
분명 전화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고 있다는 게 주위에서 들려오는 생활 잡음으로 다 느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태산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가 하는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해 주지 않고 있었다.
결국 난 태산이를 상대로 낚시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의 자식들인 것처럼 살펴 달라고 하셨다 들었습니다.”
―뭐?
“무리한 부탁이고, 또 너무 큰 짐을 짊어지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회장님 말고는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셨다 합니다.”
―자네 방금 뭐라고 한 건가?
“친구가 아닌 형제인 듯 부탁을 하실 거라 했습니다.”
―자네가 그걸….
역시.
결국 태산이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가족들을 다 밖으로 물리고 오로지 회장님만 곁에 있게 하시면서… 그런 부탁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난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한테 말한 역사가 없는데.
“저 역시 제 할아버지의 자식입니다.”
―…….
“비록 회장님 눈에는 많이 부족하고, 정이 안 가시겠지만… 저 역시 할아버지의 자식입니다.”
태산이는 다시 침묵을 시작했다.
“이 말고도 더 많은 이야기를 회장님과 나눠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오늘은 정말 순수하게 추석 명절 잘 보내시라, 건강하시라… 그 말씀 전해 드리려고 연락드렸던 겁니다.”
―…그래, 자네도 명절 잘 보내고.
“혹시 제가 추석 명절 끝내고 다시 전화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그렇게 차갑게 전화를 끊었는데, 또 이렇게 다시 전화를 하는 걸로 봐선 내가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할 거 같지는 않네.
“정태 형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건너 건너 들어서 알고는 있네.
“그런데 저는 건너 건너서라도 제 할아버지의 형제나 다름없으셨던 회장님의 안부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
“회장님께서 불편해할 만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약속드리건대, 절대 제가 먼저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저 회장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자네가 이러는 걸 자네 아버지, 손 회장은 알고 있나?
“모릅니다. 그런데 숨기지는 않을 겁니다. 마땅히 저라도 해야 하는 걸 하고 있는 거니까요.”
―마땅히 해야 하는 걸 하는 거다?
“현재 회장님께서 들고 계신 재경모직의 지분. 회사 쪽에서 아무리 큰 금액을 제시하더라도 절대 넘기지 말고 끝까지 들고 계셔 주십시오.”
―뭐?
“재경모직은… 아니, 재경 그룹 전체로 놓고 봐도 현재 회장님께서 들고 계신 지분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계열별로 그렇게 가지고 계시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모직 쪽에서만 11.3퍼센트라니요.”
―…….
“누가 뭐래도 재경은 회장님께서 제 할아버지의 옆을 지켜 주지 않으셨다면 성장하기 힘든 회사였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짐작건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회장님의 관여가 없으셨다면 지금처럼 유지되기 힘들었을 겁니다. 저라도 염치를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저라도 앞으로는 회장님에 대한 저희 집안의 도리를 하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렇다 다시 한참의 침묵을 만들어 낸 태산이가 탁한 웃음소리를 만들어 낸 뒤 말했다.
―지금 자네가 한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이렇게 목소리만 들어서는 분간이 안 가네.
“네?”
―지사 방문 잘하고 돌아와서… 그러고 나서 다시 전화를 주게.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는 걸로 하지.
태산이.
자네는 내 목소리만 들어서는 내가 한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분간을 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난 바로 알겠네.
난 자네 목소리만 들어도 바로 알겠어.
고맙네, 태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