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47)
“저 한국에 돌아갈 때 몇 상자 사 가지고 들어가려고요. 맛이 정말 기가 막히더라고요.”
지사장이 내게 마카롱 가게의 위치를 설명해 주고 잠시 뒤, 우린 다 같이 점심 식사를 했던 한식당 앞에서 지사 직원들 모두와 헤어졌다.
정 대리와 단둘이서만 그 근처 노천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커피를 마시면서 정 대리가 물었다.
“정말 차례상 준비해 주고 추석 떡값 전달하시려고 오신 거예요?”
“응? 뭐가요?”
“여기 오신 거요. 이게 정말 끝이에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 진짜 할 거 없다고.”
“그래도요.”
“그래도요는 뭐가 그래도요, 예요? 그게 전부라니까.”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의자를 앞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정 대리가 말했다.
“아니, 저는 그래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했던 거죠.”
“다른 이유? 무슨 이유?”
“그때 직원들 추석 선물 고를 때요.”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저한테 생뚜앙 지사는 명절 선물로 뭘 주는지 여쭤보셨잖아요.”
“마카롱이라면서요.”
“아니이이이….”
정말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다는 식으로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몇 차례 때리는 정 대리였다.
미쳤나?
“지사 운영을 하면서 지사장이 인 투 더 포켓을 하는 내용이 있지는 않을까 의심을 하셨던 거 아니에요?”
“인 투 더 포켓? 뭘 인 투 더 포켓 한단 소리예요?”
“직원들 명절 선물을 직접 고르면서, 중간에 뭘 좀 남겨 먹는다든지… 그걸 시작으로 해외 지사 운영에 뭔가 확인을 해 보고 싶으셔서 오셨던 게 아니냐고요.”
아….
한마디로 정 대리 말은 내가 내 눈으로 직접 생뚜앙 지사가 투명하게 운영이 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겠다고 내가 이 일정을 잡았다고 오해를 했다는 말이네.
생각을 하는 게 우스워서 이번엔 내가 물어봤다.
“그래서 따라온 거예요?”
“네?”
“내가 지사 감찰 같은 걸 할 줄 알고, 그래서 따라온 거냐고.”
“꼭… 그런 건 아닌데….”
“꼭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은 그런 이유도 조금은 있다는 말이네?”
“그건 그렇고 아까 영어 그건 뭐예요?”
“영어?”
“혹시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중이세요?”
잠깐만….
그거였구나.
이거 때문에 황금 같은 명절 연휴를 반납하고 날 따라왔던 거였어.
정 대리 이 친구….
내가 영어를 못할 줄 알았나 보다.
정훈이 놈은 대학을 미국에서 나왔다.
원래라면 영어가 유창해야 정상.
그런데 기억을 잃은 정훈이는 영어를 못할 거라 생각을 했고, 그 부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심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날 따라와 준 거라고 봐야 할까?
“아까 현지 직원들이랑 대화할 때 보니까 영어가 되시던데, 어렸을 때의 기억이 아무것도 없는 과장님이 영어를 그렇게 쓰실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거 때문에 저 따라온 거예요? 중간에 제가 영어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싶어서?”
정 대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영어?
우습지.
내가 재경을 어떻게 키웠는데.
지금의 재경 그룹 모태 사업은 모직이지만, 재경에게 그룹화의 발판을 만들어 준 건 누가 뭐래도 재경상회, 지금의 재경식품이다.
재경상회를 운영하면서 미군 부대로 식자재를 납품하며 그 군부대 관계자와 얼마나 많은 인맥을 만들었던가.
식자재 구매 관련 군부대 관계자를 밖에서 따로 만나 접대를 하고, 그들과 인맥을 유지해 나가는 생활만 5년 넘게 했다.
일본어뿐 아니라 영어는 내게 선택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필수였다.
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말했다.
“그렇네? 내가 왜 영어를 할 줄 알지?”
“……?”
“언어에 관한 부분은 기억과는 별개인가?”
“에이… 그럼 좀 진작에 말씀을 해 주시지….”
“그거 때문에 따라온 게 맞나 보네.”
고맙네.
이렇게까지 날 챙겨 주는데, 뭐라도 선물을 하나 해 줘야 할 거 같다.
“제 할아버지, 손중길 회장님의 팬이라고 하셨죠?”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또 꺼내시는 거예요?”
지금 내가 자네한테 선물을 해 주는 중이다, 이 친구야.
어쩌면 지금 내가 자네에게 해 주는 이 이야기들이, 자네가 거절했던 자네 연봉만큼의 수고비보다 몇 배는 더 값질 수도 있으니….
“제가 지금 명절 연휴를 이용해 여기에 있는 이유예요.”
“이유요?”
“제 할아버지는 본인 사업을 시작하시고, 회사가 커져 해외에도 이곳 생뚜앙 지사처럼 해외 법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명절을 한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낸 적이 없으셨답니다.”
“진짜요?”
크게 놀라며 정 대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네. 우선은 이북에 계신 부모님들이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확인을 못 하셨던 게 첫 번째 이유였고,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보고 싶은 가족들과 떨어져 평생을 사셨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대요. 명절만 되면 회사 일 때문에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해외 지사, 법인 직원들이 그렇게 눈에 밟히셨다고 합니다.”
“역시… 저는 전혀 몰랐던 내용인데, 제가 그런 점들 때문에 손중길 회장님을 높게 보는 겁니다. 크흐….”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당시는 지금의 화상 통화 같은 건 상상도 못 할 때였고, 국제 전화도 너무 비싸서 가족들과 한 달에 한 번 통화를 하면 많이 하는 거였다고 합니다.”
“그랬겠죠. 90년대 초반 이럴 땐 일본만 나가도 대단한 거였다고 들었어요.”
“우리는 그룹 계열에 항공이 있잖아요. 명절 때마다 해외 근로자 가족들을 불러서 같이 갔다고 합니다. 그립다고 하는 한국 음식들을 박스째로 실어서.”
“클래스 지리고.”
“중동에 건설 붐이 일었을 땐, 해외 근로자들이 회를 그렇게 먹고 싶어 했답니다. 활어를 재경식품 쪽에 말해서 산 채로 급속 냉동을 시키고, 일식 주방장들을 섭외해서 해외 근로자 가족들과 다 같이 넘어가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서 오늘 했던 것처럼 합동 차례도 지내고 직원들과 뒤섞여서 한국식으로 먹고 마시고를 하면서 감사함을 표현했다고 하시더군요. 인사는 만사이니까요. 회사에서 인사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
“그렇게 해외까지 나와서 고생하고 있는 우리 회사 직원들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명절 선물 같은 걸로 지사장과 지사 운영을 의심할 수 있겠어요?”
“근데 이거 한 상자에 70유로면 비싸긴 비쌉니다. 나중에 가서 가격을 확인해 보긴 해야 할 거 같아요.”
“뭘 또 확인을 합니까, 확인을. 70유로라고 하면 70유로가 맞겠죠.”
하지만 정 대리는 단호하게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야 그렇겠죠. 그래도 60상자, 70상자를 한꺼번에 주문을 하면 디스카운트 네고 같은 게 되는지 정도는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정 대리.”
“네.”
“나는 진짜 맛이 괜찮아서, 한국 들어갈 때 몇 상자 사서 들어가려고 가게 위치를 물어본 거예요. 연구 좀 해 보려고.”
“연구요?”
“이 정도 맛을 우리 재경식품에서도 맛 개발을 해 대량으로 생산이 가능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국에서 이 정도 맛이면 대박 아닙니까?”
“그야….”
“썩은 과일은 굳이 직접 내 손으로 따지 않아도 작은 비바람에 알아서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에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간 생뚜앙 지사 운영에 문제가 있었다면 어떻게 지난 4년간 지사장이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지금처럼 잘 운영이 될 수 있었겠어요? 어디에서 말이 나와도 말이 나왔겠지. 안 그래요?”
“…….”
“재경모직 전체 매출의 70퍼센트가 해외 브랜드 수입 유통입니다. 이곳 지사 직원들이 지금의 재경모직을 지켜 주고 있는 거라고 봐야죠. 썩은 나무에선 절대 열매가 열리지 않습니다.”
* * *
셧다운
프랑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
며칠 근무 뒤 다시 또 이틀간의 주말이 있었고, 그렇게 출근을 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난 출근과 동시에 남 사장을 찾았다.
윤 팀장과 한 약속을 지키고자, 신상품 개발팀 계약직 직원의 정규직 전환에 관한 건의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게 한 번에 통과가 될 거라는 기대는 나도 안 했다.
직원 3천 명 중 3분의 1이 계약직 직원이라고 하는데, 특정 부서, 특정 팀의 계약직 직원에 한해서만 정규직 전환의 기회를 준다는 건 형평성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거겠지.
그런데 어쩐 일인지, 딱딱하기만 하던 남 사장이 내 앞에서 무척 말랑말랑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부분은 고민을 다 같이 좀 더 해 보자.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곧바로 하라 마라 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야, 이건.”
이 정도 대답이라면 얼마든지 앞으로 더 찔러서 안쪽 깊숙이 파고들 여지를 남 사장이 내게 준 거나 다름없다.
함께 한발 뒤로 물러나 주며 파리에서 사 온 마카롱 한 상자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네, 저도 운만 미리 띄워 본 겁니다. 알아볼 내용도 더 남아 있고요. 중간에 공채 준비한다고 저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잠시 손을 놓고 있었거든요.”
“그건 뭐야?”
“고모 갖다드리라고요. 마카롱이에요. 이번에 생뚜앙 지사 가서 오는 길에 산 거예요.”
남 사장아.
나도 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자네가 알고 있는 손정훈이와 너무 다르다는 걸.
나 역시 어디 다녀온다고 이런 선물 같은 거 꼬박꼬박 챙기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여정이는 내 막내딸이다.
내가 해외 출장 같은 걸 다녀올 때 홍명이 놈, 홍준이 놈 선물은 안 사 와도 어릴 때부터 여정이 선물은 꼭 챙겼던 사람이다.
특히 내가 눈을 감기 전의 나만큼 이젠 나이가 들어 있는 여정이의 현재 모습이, 건강상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맛있는 과자를 좀 사 와 본 거뿐이다.
“고모가 좋아하겠네. 정훈이가 해외 출장 다녀오는 길에 고모 선물까지 다 챙겼다고 하면 말이야.”
“출장은요, 무슨. 가서 한 게 없는데.”
“한 게 없긴 왜 없어? 지사장이 전화 왔더라.”
“그래요?”
“신경 써 줘서 고맙다고, 너 다녀간 이후로 파견 근무자들이랑 거기 현지 직원들 사이의 유대도 더 깊어진 거 같다면서 말이야.”
“뭐 그만한 일로….”
“수고했다. 쉬지도 못하고. 알았어. 나가 봐.”
그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우선 날 대하는 남 사장의 모습이 확실히 많이 변해 있었고, 점점 이 시대에 적응을 하면서 오랜만에 자신감이 크게 올라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남 사장을 만나고 인사부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사무실 분위기가 무척 무겁게 변해 있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마침 박 과장이 내가 들어선 인사부 출입문 앞으로 서 있었다.
그냥 딱 들어가는 순간 사무실의 공기가 크게 달라져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에 박 과장을 보자마자 그렇게 물었던 거다.
“전무식이라고 생산 라인 노조 위원장이 있어요.”
이름 한번 걸작이네.
“그런데요?”
“지금 안에서 부장님, 차장님이랑 같이 면담 중입니다.”
“할 수도 있는 거지, 노조 위원장 한 명 왔다고 사무실 전체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져요?”
“기억 안 나십니까?”
나는 박 과장이 한 번씩 이렇게 물어볼 때가 제일 무섭더라.
어느덧 정훈이 놈의 몸에서 2달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회사 입장에서는 손정훈이라는 회장 아들이 재경모직 인사부에 과장으로 입사해 8개월간 근무를 했다는 걸 테고.
망나니가 에이스로 둔갑을 해서인지, 언제부턴가 나에 대한 박 과장의 기대치가 부쩍 올라가 있었다.
나는 모르는 이전 일들을 계속해서 물어보며, 지금처럼 기억이 안 나는지를 물어볼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뜨끔뜨끔하다.
“뭘요?”
“지난 3월요. 교복 생산 라인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파업이 일어나 버리는 바람에 회사 전체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잖아요.”
“아… 그거요? 알죠, 알죠. 크게 뒤집혔죠. 어후, 그때만 생각하면….”
물론 난 전혀 모르는 일이다.
내가 보인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박 과장이 말했다.
“제 느낌이 그래요. 이번에도 뭔가 생산 라인 쪽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려고 찾아온 거 같은데… 좀 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