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64)
“우리한테는 항공이 있지 않습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남아 쪽으로 골프 투어를 나갑니까? 배 타고 갑니까? 비행기 타야죠. 국적 항공 중 재경의 동남아 노선 점유율은 80퍼센트가 넘습니다. 기내 쇼핑 카탈로그에만 다 실어도 그 노출력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동명물산이 가지고 있는 골프장은요? 이게 다 결국은 가장 효과적인 광고판이 될 수도 있는 건데, 지분 5퍼센트 정도 인정해 주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입니까? 충분히 더 큰 걸 얻어 낼 수 있는 상대를 앞에 두고.”
잠시 후 손 과장이 배시시 웃으며 남필우 사장과 조동희 전무에게 말했다.
“저는 제가 준비한 걸 모두 보여 드렸으니, 지금부터는 사장님과 전무님의 능력을 좀 보여 주세요.”
“이걸 나와 전무님더러 직접 하란 말이야?”
“회사에 직원이 몇 명인데, 설마 판 다 깔아 놓고 설명서까지 첨부해 놓은 이걸 진행할 사람이 없을 거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
“없다고 해도 인사부 과장인 제가 이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성과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제가 바라는 건 우리 재경모직이 KS 인터내셔널을 제치고 업계 1위로 올라서는 거뿐입니다.”
“흠….”
“아 참, 그리고 사장님.”
“왜?”
“저희 인사부 회식 찬조 좀 해 주십시오. 오늘 승진자들 축하 겸 회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뭐?”
“보상이요, 보상. 적절한 보상 좀 해 달라고요.”
“무슨 보상?”
“노조 터진 거 저희 인사부가 단 하루 만에 해산시켰습니다.”
“…….”
“어떻게 된 게 부장 통해서 수고했단 말씀 한마디 안 해 주십니까? 이래서 무슨 의욕이 생기겠냐고요.”
손 과장이 방긋이 장난을 섞어 말을 하자 조 전무가 피식하며 웃음을 흘렸다.
“지난달에는 전무님이 회식비 찬조해 주셨어요. 이번 달엔 사장님이 좀 해 주세요.”
그러자 옆에서 조 전무가 고자질을 하듯 남 사장에게 말했다.
“카드 주실 때 제한을 좀 두셔야 할 겁니다. 지난달에 카드 줬더니 회식비로 360을 썼습니다.”
“그 360만 원치 고기 먹고 노조 관련해서 그 큰일을 해낸 거 아닙니까. 360억 이상 날 손해를 360만 원으로 막았으면 남는 장사죠.”
그 말에 남 사장은 조 전무를 보며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선, 마지못해 꺼낸다는 식으로 한쪽 엉덩이를 소파에서 떼어 냈다.
그리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카드 한 장을 손 과장에게 건넸다.
손 과장이 그 카드를 두 손으로 받으려고 할 때였다.
재빨리 카드를 자기 쪽으로 가져가며 남 사장이 말했다.
“그런데 이 기획안 이거 말이야.”
“네.”
“이건 언제 준비한 거야?”
“스너프 인수 관련 트래픽 비즈니스 폼 만든 뒤에요.”
손 과장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을 하자, 이에 눈을 가늘게 뜨며 남 사장이 물었다.
“그 말은 이거 준비하는 데 일주일밖에 안 걸렸다는 소리야?”
“삼 일 정도 걸렸겠네요. 네. 삼 일 걸렸습니다.”
“이걸 혼자 준비한 거야?”
“그럴 리가요.”
“그럼? 누구랑 같이 준비했는데?”
조동희 전무 역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손 과장의 입을 주시했다.
“신상품 개발팀의 윤현정 팀장이요.”
“윤 팀장?”
“네, 사실 윤 팀장이 힌트를 많이 줬죠. 현재 우리 재경모직의 신상품 개발 수준이나, 여타 다른 부분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다 설명까지 해 줘 가며. 그 모든 걸 취합해서 시니어즈를 먼저 인수해서 신상품 개발에 대한 감을 익혀 놓고, 골프 웨어 브랜드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떻겠냐고 했더니, 그런 스텝이라면 자기가 책임지고 프로젝트를 맡아 나갈 수 있겠다고 했어요.”
“흠….”
“윤 팀장. 실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틀림없어요.”
* * *
말 그대로입니다
그렇게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을의 냄새가 여전히 남아 있는 이른 겨울.
어느 누구도 가을과 겨울의 경계를 명확히 정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올해만큼은 재경 그룹 안에서 가을과 겨울의 경계가 명확하게 나누어지고 있었다.
도약을 준비했던 재경의 가을과 도약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재경의 겨울.
확연한 경계가 생겨 있었다.
스너프 인수 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손정태 본사 상무는 겨울이 시작됨과 동시에 본사 상무직을 내려놓고 스너프 커머스 플랫폼의 사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손홍준 회장의 계산이었다.
둘째 정훈에게서 가능성을 찾지 못했을 땐 어쩔 수 없이 정태를 본사 상무로 앉혀 곁에 둘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두 아들에게 똑같은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비교해 볼 필요성이 생겼다.
그게 스너프 인수 건을 정태에게 맡긴 가장 큰 이유였다.
한 계열의 기반을 직접 만들고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사장 자리에까지 올라선 손정태.
주위를 둘러볼 겨를 같은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스너프 운영 안정화에 목숨을 걸 뿐이었다.
정태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대의 재경 그룹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안의 큰일이 있는 이후부터 재경의 재계 순위가 매년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걸 아버지의 한숨을 통해 경험하며 성장해 왔다.
자신에겐 태산과도 같았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세상으로부터 권력에 눈이 멀어 친형을 죽음으로 내몰았단 비난을 받고, 뒤에서 무능하단 조롱 섞인 평가를 받는다는 걸 아무 내색 없이 참아 내야만 했다.
그런 것 따윈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여전히 재경은 건재하고 언젠가는 본인 손으로 직접 세상이 하고 있는 아버지에 관한 오해를 무안으로 바꿔 버릴 자신감이 있었기에.
하지만 그런 정태에게도 절대 참을 수 없는 게 있었다.
바로 외가 쪽 사람들의 간악함.
큰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만 해도 정태의 외가는 자신과 정훈이에게 언제나 호의적이었고, 때론 어린 정태 눈에도 아버지와 어머니, 재경가 전체를 어렵게 대한다는 게 눈에 보였다.
아무것도 몰랐을 당시엔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재경 그룹의 회장 자리에 오르자마자 싹 바뀌어 버린 외가 쪽 사람들의 태도에 정태는 세상이 무섭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었지만, 1년에 몇 번 안 되는 외가 쪽 가족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정태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속으로 삭여야만 했다.
그 모멸감을 동생 정훈이는 느끼지 않아도 되게끔 사촌 형제들 앞에서 항상 실실거렸고, 정훈이를 자신의 뒤에 숨기기에 급급했다.
특히 자신과 정훈이를 대하는 이종사촌들, 부경 그룹 직계 형제들의 거만하고 강압적인 태도, 비아냥거리는 말투와 재경가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은 지금의 정태를 만들어 놓은 원동력이기도 했다.
정태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현재 부경 그룹이 떵떵거리며 국내 재계 순위에 올려놓는 몇몇 사업은 원래부터 부경의 것이 아니라, 재경의 것이었다는 걸.
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기에 정태의 목표는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부경 그룹.
외가인 부경 그룹을 뛰어넘는 재경 그룹을 만들어 그동안 자신과 정훈이, 그리고 재경가 전체를 낮잡아 봤던 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놓고, 다시금 재경가를 어렵게 대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 목표.
그 목표를 자신의 손으로 이뤄 낼 첫 발걸음이었기에, 스너프 커머스 플랫폼의 사장으로 거머쥔 인사 발령 앞에 정태는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인수 건을 성공적으로 매듭지어 낸 부분에 스스로 도취해 있을 틈도, 회사로부터 받고 있는 인정에 취해 있을 틈도 정태에겐 없었다.
* * *
한편 재경모직 쪽에선 시니어즈 인수 건으로 새로운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좁은 국내 모직 업계.
한일어패럴이 1년 넘게 접촉 중이었던 시니어즈 측으로 재경모직의 전략기획팀이 손을 뻗었다는 내용은 금방 업계에 소문이 났다.
골프장 사업 확대를 위해 시니어즈 매각이 급해진 동명물산 쪽에서도 재경모직 쪽으로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시니어즈 브랜드 본부장은 재경모직 쪽 전략기획팀장과의 1차 미팅을 끝내 놓고 곧바로 윤정기 회장에게 새로운 매각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가능성 앞에 그동안 한일어패럴 쪽과의 생산성 없는 줄다리기식 협상 조건 맞추기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윤정기 회장은 자신이 직접 재경모직과 만남을 가져 보길 희망했다.
그 제안은 전략기획팀장을 통해 곧바로 조동희 전무에게로 올라갔고, 조 전무는 해당 제안이 가져온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남필우 사장을 직접 찾아가 의견을 물었다.
“직접 오겠다는 말이에요?”
“아직 그런 내용까지는 오고 간 게 없어요. 그저 2차 미팅 땐 우리 쪽에서도 교섭권이 아닌 결정권자가 나와 주길 기대하는 뉘앙스로 만남을 제안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될 거 같아요.”
“전무님 생각은 어떠세요?”
조동희 전무는 별수 있겠냐는 식으로 대답했다.
“그쪽에서 회장이 직접 나온다고 하는데, 예우 차원에서라도 제가 직접 얼굴을 비춰야 하지 않을까요?”
“전무님이요?”
“왜요? 불안하세요?”
웃음을 머금고서 농담처럼 묻고 있는 조동희 전무의 얼굴에선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모직에선 브랜드 인수가 이번이 처음이지만 재경의 삼사와 본사 임원까지 모두 거쳐서 지금의 재경모직에 있는 조동희 전무에게 브랜드 인수 건은 크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식품 쪽에서 얼마나 많은 프랜차이즈 요식 브랜드를 매입해 봤던가.
가능성 있는 메뉴의 레시피를 매입해서 기성 가공품으로 발전시킨 건 또 몇 개나 된단 말이가.
현재 재경모직에서 이번 시니어즈 매입 프로젝트를 총괄할 수 있는 인물은 조동희 전무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적임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필우 사장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전무님의 실력이 불안한 게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에서 제 역할이 하나도 없는 게 불안한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손 과장이 만든 기획이죠. 그런데 저와 전무님은 해당 기획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검토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지원해 주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있었잖아요.”
“그러니까요. 손 과장의 기획에 회장님의 컨펌. 사장이 그 기획의 진행에까지 아무런 참여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있으나 마나 한 꼭두각시 사장이 아닐까 해서요.”
남 사장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본 조 전무는 금세 남 사장의 걱정과 우려를 눈치채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럼 동명 회장은 사장님께서 직접 만나 보시겠어요?”
“전무님도 같이 가 주시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 같습니다.”
“저까지요? 동명 그쪽은 우리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는….”
“그만큼 시간은 절약할 수 있겠죠.”
조동희 전무는 자신의 3년 입사 후배였던 남필우 사장의 능력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인정한 인물이기도 했다.
대쪽 같으면서도 때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활처럼 휘어지기도 하는 남필우라는 인물.
조동희 전무의 눈에 지금 남필우 사장은 재경모직의 도약을 위해 스스로를 활처럼 휘게 만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거 같았다.
“협상의 첫 번째 원칙은 상호 동등 아니겠습니까. 서로의 덩치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협상 테이블 위로 올라온 물건의 가치가 중요한 거죠. 우리가 그 가치를 한일어패럴 쪽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아니겠습니까? 저랑 같이 가시죠.”
“그렇게 하시죠. 약속 잡아 보겠습니다.”
동명물산과의 만남은 바로 이뤄졌다.
남 사장의 의견에 따라 윤정기 회장과의 만남은 딱딱한 격식을 갖춘 자리가 아닌 동명물산이 가지고 있는 남양주의 한 골프장 리조트의 아웃 코스 그늘집 2층에서 이뤄졌다.
해당 그늘집은 겨울 시즌에 맞춰 군고구마와 어묵 등을 판매하고 있었지만, 단체석으로 마련된 2층은 중요한 미팅을 위해 일반 손님들의 발걸음을 막아 놓고 있었다.
해당 리조트의 일식당 요리사가 몇몇 서비스 직원들을 데리고 와서 식사를 준비했고, 전체 창으로는 초록의 필드 위에서 아웃 코스 라운딩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서둘러 이동하는 카트의 모습들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동명물산 쪽에선 윤정기 회장과 그의 장남인 윤기태 사장이 함께 나왔다.
백발의 윤정기 회장이 남필우 사장과 조동희 전무에게 자리를 권하며 최선의 예우를 갖추었다.
“앉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테이블에 앉은 네 사람을 함께 전체 창으로 보기만 해도 가슴이 확 트이는 아웃 코스를 잠시 감상했다.
곧 남필우 사장이 말문을 열었다.
“저도 그렇고, 저희 전무님도 공 치는 걸 아주 좋아합니다.”
“오, 그러세요?”
윤기태 사장이 적절한 리액션으로 대화의 흐름을 가볍게 유도해 나갔다.
“네, 그래서 식사도 식사지만 그 전에 가볍게 라운딩을 함께하자는 제안을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첫 만남에 라운딩은 서로가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 참고 또 참았습니다.”
“오늘 이렇게 서로 안면을 트고, 식사까지 하면 다음엔 필드에서 편하게 만날 수 있겠습니다. 하하하.”
아들의 적절한 화답이 마음에 드는 듯 윤정기 회장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레몬 한 조각이 담겨 있는 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재경 그룹의 골프 회동은 유명하죠.”
윤정기 회장이 말했다.
그 말에 조 전무가 대답했다.
“이걸 공교롭다고 표현을 해야 할지, 아니면 마침이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번 골프 회동을 이 골프장에서 했었습니다.”
윤정기 회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그러셨다는 내용은 다녀가신 이후에 보고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예약 쪽에서 손 회장님 성함을 보고도 설마 재경 손 회장님일까 했다고 하더군요.”
“워낙에 새로운 걸 좋아하시는 분이 되셔서 회원권 자체를 안 가지고 계십니다. 그저 서울 가까운 어딘가에 새로운 골프장이 생겼다고 하면 경험 삼아 사장단과 다 같이 가서 공 한번 치시는 거죠.”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주로 윤정기 회장은 조동희 전무가 상대를 하고, 윤기태 사장은 남필우 사장이 상대했다.
그러다 식사가 나오고, 윤 회장의 제안으로 약한 정종을 곁들이기 시작한 이후부터 서로의 역할이 바뀌었다.
그때부터는 남 사장이 공격적으로 윤 회장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시니어즈 브랜드 자체보다는 동명물산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이번 시니어즈 매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남 사장은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본론을 꺼냈다.
눈치를 읽은 윤기태 사장은 식사를 준비했던 주방장과 서비스 직원들을 모두 아래층으로 물린 다음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실례가 될 거 같아 일부러 한일어패럴 쪽과의 계약 조건에 대해선 깊게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남 사장의 말에 낮게 손을 들며 윤 회장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