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79)
“모직에서 인수한 시니어즈도 정훈이 기획이었다고 하더군.”
“네, 맞습니다.”
“남 사장 통해서 안 좋은 소식만 들었을 땐 내심 걱정을 했는데, 정신을 차린 모양이야.”
장 회장과 함께 술잔을 비운 손 회장은 곁에 두고 있던 술병을 들어 절반이 조금 넘을 정도로만 술잔을 채워 드린 후 자신의 잔을 마저 채웠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아니면 그간 정신 나간 척 연기를 했던 건지 제 아들이지만 헷갈리고 있습니다.”
장 회장은 그런 느낌 역시 남 사장을 통해 전해 들었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 스너프 인수 관련 기획안 정리해 놓은 걸 가져오면서 그러더군요. 부경이 과거 우리 재경이 만든 사업들을 원래부터 자기들 것인 양하는 꼴이 눈에 상당히 거슬린다고요.”
“자네 처가 그 이야기를 들었음 속이 많이 상하겠어.”
“그보다 더 속이 상할 일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부경화학 아들내미 결혼식 날 있었던 일? 아, 이건 남 사장이 아니라 하늘이한테 들은 이야기야.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모양이지.”
“그랬었군요. 자식들이 사촌 형제들한테 그런 대접을 그간 받아 왔다는 걸 듣고 기분 좋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때 또 정훈이 이놈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합니다.”
“무슨 말?”
“도대체 우리 재경에게는 우리 편이라는 게 있긴 하느냐고요.”
“…….”
“그러면서 회장님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놈이. 장 회장님만큼, 우리 손씨 집안 사람도 아니면서 우리 재경 그룹에 진심인 분이 어디에 있겠냐고 말이죠.”
“정훈이 그놈이 자네한테 그런 말을 하더란 말이지?”
바로 조금 전 천천히 마시자는 걱정을 했던 손 회장이, 이번엔 먼저 술잔을 들었다.
“아들놈에게 혼이 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다 큰 어른이 어째서 이미 지난 일에 얽매여 그러고 있느냐고요.”
“…….”
“이번 설에 저는 정태를 데리고 해외 지사 순방을 계획했습니다.”
“정훈이는?”
“여전히 재경에 진심이시라면, 회장님께서 정훈이를 다시 한번 만나 봐 주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정훈이를?”
“스너프에 뱅크 시스템을 도입시키려 하는데, 거기에 파트너로 정훈이 이놈이 미래금융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러면서 저에게 직접 회장님께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합니다.”
장 회장이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는 지난 세월의 염치 때문에 직접 그 말을 꺼낼 엄두가 아직은 안 납니다. 정훈이 이놈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산을 가지고 그런 제안을 했는지도 아직은 자세하게 못 물어 봤고 말이죠.”
“오늘 나한테 내민 이 손은 결국 미래금융을 정훈이한테 놓아 주는 다리다?”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뭘?”
“정훈이 놈 생각처럼 여전히 회장님께서 저희 재경에 진심이신지를요.”
“진심이 아예 다 사라졌다면 내가 무슨 미련으로 모직 지분을 꼭 쥐고 있겠나.”
* * *
설날 당일.
홍준이 놈이 정태를 데리고 해외 지사 순방을 나간 탓에 혼자 탕국과 물밥을 갈아 가며 차례를 지내야 했다.
아무 의미 없는, 그저 장혜란과 원수경이 보고 있었기에 마지못해 지내는 차례였다.
차례를 끝내고 제사 음식으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면서 장혜란에게 말했다.
“형수는 이거 밥만 먹고 친정에 가 봐도 되지 않나?”
그 말에 원수경은 시어머니의 눈치만 살피며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어떻게 그래요. 아버님이랑 그 사람까지 해외 출장 나가 계시는데, 저라도 어머님 옆에 있어야죠.”
“그건 형수 생각인 거고. 엄마도 혼자만의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겠어요? 사돈분들도 승현이 보고 싶어 하실 거 아니에요. 회장님, 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 찾아올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여기 있어요. 그러지 말고 이번 설은 아침밥만 대충 먹고 승현이 데리고 집에 가세요.”
장혜란 역시 내 생각에 동의를 했다.
“그래, 그렇게 해. 아무렴 집보다 여기가 편할까. 나도 아줌마들 시켜서 집 정리 대충 해 놓고 친구들이나 만나러 나갈까 싶어.”
“진짜… 그렇게 해도 돼요?”
“어머, 얘 말하는 거 좀 봐. 모르는 사람이 들었음 우리가 널 구박하는 줄 알겠다.”
“아뇨, 어머님. 호호호. 무슨 말씀을 또 그렇게 하세요? 죄송해서 그러죠. 아버님도 안 계시는데, 어머님 혼자 계시게 해도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내가 애니? 나도 잠시 보는 건 몰라도 하루 종일 딱히 하는 거 없이 얼굴 뜯어 먹고 있어야 하는 명절이 부담인 건 마찬가지야. 정훈이 말대로 이번 설은 아버지하고, 정태도 없으니까 우리끼리는 편하게 하자. 그리고 우리 집은 최근 들어 신경을 썼지, 예전엔 딱히 명절이라고 가족들 다 같이 만나서 뭔가를 하는 집은 아니었어.”
여전히 눈치를 살피며 원수경이 내게 물었다.
“도련님은요?”
“나는 뭐… 있는 동안은 승준이랑 같이 놀다가, 형수님 가시고 나면 엄마랑 데이트나 잠깐 할까 싶어요.”
“데이트요?”
“데이트?”
데이트란 표현에 동시에 놀라는 장혜란과 원수경.
특히 난 장혜란을 향해 싱긋이 웃어 보이며, 왜 그렇게 놀라느냐고 물었다.
“왜요? 징그러워요?”
내가 너한테 물어볼 게 좀 있다, 며늘아.
원수경이 먼저 보내 놓고 나랑 이야기 좀 하자꾸나.
* * *
약속 꼭 지켜 주세요
원수경이 승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그리고 난 장혜란과 2층 테라스에서 잠시 시간을 가졌다.
바깥바람이 차가워, 담요로 몸을 덮고 야외 전기난로를 켠 상태로 마주 앉아 잠시나마 살가운 아들이 되어 주었다.
무뚝뚝한 정태에 비해 장혜란이 유독 정훈이 놈을 가깝게 두고 챙겼다는 건, 그간의 카톡 대화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똑 부러지고 욕심이 많은 정태에 비해 서른 가까운 나이가 될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정훈이 놈이 항상 걱정이었겠지.
그리고 공교롭게도 장혜란을 홍준이의 짝으로 지어 준 건 바로 나였다.
똑똑하고 눈치가 있으며, 타고난 우아함에 욕심을 숨길 줄 아는 그 모습을 난 항상 좋게 보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 역시 장혜란과의 이런 자리가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현재의 재경 그룹 자식들이 고작 부경 따위에게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걸 난 참을 수도, 이해를 할 수도 없었다.
“엄마.”
장혜란은 뜨거운 자스민차가 담겨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손을 데우며 대답했다.
“응? 왜?”
“그날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있었던 일, 그 이야기 듣고 기분이 어땠어요?”
“좋을 수가 있겠니?”
“그런데 왜 외삼촌이 회장님께 불편한 내색을 해 가며 전화를 걸어서 따졌던 것처럼 엄마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만 있었어요?”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우리 재경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고 해도, 자식들이 다 컸다고 해도 그때 그 일은 장혜란이 참을 이유가 없는 내용 아닌가.
“엄마가 먼저 전화를 걸어서 따질 수도 있는 일 아니었어요?”
“너희가 애니? 그만한 일로 부모가 나서게.”
“그럼 우리가 애였을 때는요? 그땐 어땠는데요?”
“너는 그게 섭섭하니?”
“섭섭한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뭐가 궁금해?”
궁금한 거야 많지.
“큰외삼촌은 화학과 물산, 화재를 물려받았어요. 물산과 화재는 원래 우리 재경의 계열사였죠. 작은외삼촌은 통신과 건설을 물려받아요. 건설은 우리 계열사였고. 막내 외삼촌은 쇼핑과 택배를 물려받았는데 쇼핑은 우리 거였어요. 이모도 원래 우리 거였던 호텔을 물려받았어요. 그런데 엄마는요?”
말이 안 되지 않나.
장혜란은 똑똑한 사람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돈도 자식 중 장혜란을 가장 신임하고 있었단 걸 내가 모르지는 않고.
출가외인이라 알짜를 물려줄 수는 없었을지언정, 다른 딸에겐 호텔 사업을 물려줬는데 부경 그룹 쪽으로 재경의 여러 사업권이 돌아가게끔 중간 다리 역할을 했을 장혜란에겐 아무것도 떨어진 게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설혹 정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상속이 있었다고 하면, 장혜란은 그때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내가 장민수의 옷에 와인을 쏟았을 때 더 참을 이유가 없는 거지.
내가 그딴 부경가 상속 콩고물에 욕심이 나서 이 내용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틀림없이 장혜란이라면 최소 호텔 사업보다는 더 큰 걸 하나 정도는 받아 냈을 텐데, 겉으로 드러나는 게 없어서 원수경이를 친정으로 보내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던 거다.
나도 현재 우리 재경이 가진 패를 정확히 알아야 할 거 아닌가.
그래야 천천히, 야금야금 전진할지, 아니면 전력을 다해 돌진할지를 결정하지.
장혜란은 날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상관없다.
입을 열게 할 방법은 머리카락 수만큼 많으니까.
“이해가 안 돼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는 거예요.”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야? 다른 외삼촌들, 이모는 다 뭔가를 받았는데, 엄마만 네 외할아버지한테 아무것도 못 물려받은 게 못마땅해?”
“못마땅한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이건 못마땅한 거랑은 별개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왜 외가 쪽 사촌들이 나랑 정태 형한테 그러는지.”
“…….”
“엄마, 잘 생각해 봐요. 아니, 나나 정태 형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라고. 나랑 정태 형이 외가 쪽 사촌들한테 먼저 시비를 걸 이유가 있어요?”
장혜란은 그저 머그잔만 입술에 붙일 뿐 그 모습으로 자신의 반응을 숨겼다.
“이유도 없고, 우린 그런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날도 이야기 들어서 알겠지만, 그쪽에서 먼저 우리한테 시비를 걸어요. 원래라면 시비를 걸 이유가 없어야 하는 거잖아요. 자기들은 뭐라도 상속을 받았어. 반면에 우린 외할아버지한테 아무것도 받은 게 없어. 그렇다면 나나 정태 형도 자기들 기준에선 같은 사촌 형제인데 최소한 날은 안 세워야 맞는 거죠. 제 말이 틀려요?”
“…….”
“나 같으면 미안할 것도 같고. 그런데 안 그러잖아요. 오히려 날을 세우잖아. 왜 우리한테 날을 세우는 걸까를 생각해 보니까, 이건 미안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불편해서일 것 같은 거예요. 나나 정태 형이 불편하기 때문에 날을 세우는 걸 텐데, 그럼 도대체 서로 연관된 사업이 크게 없는 우리 재경가가 무엇으로 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걸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난 이유가 하나밖에 없을 거 같은 거예요.”
“무슨… 이유?”
“우리 재경에서 부경으로 넘어간 계열사들, 현재 그 계열사 쪽으로 지분 가지고 계시죠?”
“……!”
“엄마는 다른 외삼촌들, 이모하고 달리 재경에서 부경으로 넘어간 계열사들의 지분을 상속으로 받았죠? 그거 말곤 이유가 없어. 그 계열사들에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지분을 엄마가 들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람들이 우리 재경가를 불편해하는 거 아니에요?”
이 정도의 침묵이라면 긍정으로 이해해도 되는 거겠지.
“몇 퍼센트씩 받으셨어요? 틀림없이 회장님도 그 부분에 동의하면서 계열사들을 부경 쪽으로 매각하셨을 거고… 10퍼센트? 10퍼센트씩은 너무 적나? 그래도 명색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해 주고 받은 커미션 개념에 상속 개념도 포함이 되는 걸 텐데, 12퍼센트씩?”
“…….”
“나랑 약속 하나만 해요.”
“무슨… 약속?”
“우리 사이에 거리를 만들지 말자는 약속.”
“우리 사이에 무슨 거리가 있어?”
“없어야 정상인데, 난 지금 엄마한테서 거리가 느껴져요.”
이건 내가 장혜란을 상대로 질 수가 없는 게임이지.
부모가 무슨 수로 자식을 이기겠나.
미안한 말이지만, 혜란아.
나는 네가 가진 어미로서의 모정을 좀 이용해 먹어야겠구나.
“엄마는 우리 재경가 사람이에요, 아니면 여전히 부경가 사람이에요?”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에 있어?”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엄마가 지금 하게 만들잖아요.”
“…….”
“분명 우리 엄마고, 나랑 형은 재경가 자식들인데 왜 이상하게 엄마는 외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신 마당에 여전히 재경가와 부경가에 끼어 있는 사람 같은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끼어 있는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그 사람들이 우릴 겉으론 가족인 것처럼 대하지만 속으론 불편해하고,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공개적인 망신을 주겠다고 그 시답잖은 짓을 했다는 걸 다 알면서도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게 당연한 거라고?”
가볍게 비웃으며 장혜란에게 물었다.
“그럼 나도 그냥 앞으로 엄마처럼 중간에 끼어 버릴까? 어차피 재경은 형한테 갈 거 아니에요?”
“아버지 아직 젊다. 쌩쌩하셔. 네가 벌써 그런 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
“아니지. 형한테 다 가야지. 나눠 준다고 해도 내가 거절을 해야지. 우리가 뭐 나눠 먹을 게 많은 것도 아니고, 계열사 몇 개 가지고 나랑 형이 지지고 볶으며 회장님 눈에 들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거. 엄마 그런 거 원해요?”
“…….”
“난 안 그러고 싶어요. 안 그럴 거예요. 왜 그래요? 밖엔 먹을 게 훨씬 더 많은데, 내가 왜 형이랑 감정 상하게 그런 거로 경쟁을 해요.”
“진심이니?”
“나는 아까부터 쭉 진심이었는데, 엄마가 계속 우리 사이에 거리를 만드네. 이러니 내가 약속을 해 달라는 거예요. 거리 만들지 말자는 약속.”
결국, 장혜란은 담요를 목까지 올려 덮어 놓고 머그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약속해. 엄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훈이 너한테 거리를 둔 적이 없어.”
“부경에 넘어가 있는 원래 우리 재경의 계열사들 지분… 몇 퍼센트씩 가지고 있어요?”
“조금씩 다 달라.”
“최소 12퍼센트씩은 들고 있죠?”
“떨어진 곳도 있고, 더 오른 곳도 있지.”
역시.
웃음이 나왔다.
“그거 내가 달라고 하면 나한테 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