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81)
“바둑은 좀 두나?”
“두는 법은 알지만, 이기는 경우가 적어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실력이 없으면 꾸준히 연습을 해서 이길 수 있게 실력을 쌓아야지.”
“세상에 바둑 말고도 재미있는 놀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놀이라는 건 즐겁자고 하는 거잖아요. 저는 그게 비록 놀이일지라도 해서 제가 이길 수 있는 놀이를 좋아합니다.”
“그럼 내가 자네한테 세뱃돈으로 얼마를 챙겨 줘야 할지 감을 잡기가 참 어려워지는데?”
웃음을 참으며 태산이에게 말했다.
“제 할아버지와 장기를 자주 두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본가에서 찾았다는 회장님 일기장에 그런 내용도 적혀 있던가?”
“네. 바둑으로는 아무리 해도 회장님을 이길 수가 없어, 장기만 죽어라 연습을 하셨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셨지. 그런 분이셨지. 안 되는 건 깔끔하게 포기를 하실 줄도 아셨고, 상대가 누구든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어 결국엔 이기고야 마는 분이셨지.”
태산이의 말에 남 사장과 여정이는 전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난 그런 모습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나중에 가서 장기는 내가 자네 할아버지한테 안 됐어.”
“저도 어디 가서 지는 장기를 두는 편은 아닙니다. 바둑은 자신이 없고, 장기도 괜찮으실 거 같으면 마주 앉아 보고 싶습니다.”
“하늘이 애비야.”
“네, 아버지.”
“내 방에 가서 장기판 좀 가지고 와 봐. 아니다.”
“……?”
“그냥 내 방에 들어가서 두지. 다들 밖에서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있어. 나는 정훈이 이놈이랑 내 방에 같이 가서 장기 한판 두고 나올 테니까.”
태산이의 방에서 바둑판 위에 접이식 장기판을 올려놓고 나는 초나라 말을 태산이는 한나라 말을 나눠 가져 마주 보고 앉았다.
“두지.”
“네, 그럼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차가 뛰어다닐 수 있는 문을 열어 주기 위해 가장 오른쪽 졸을 왼쪽으로 한 칸 당기려고 할 때였다.
“스너프 뱅크 시스템을 우리 미래금융을 통해 접목을 시켜 보자고 손 회장에게 제안을 했다지?”
“네.”
“나쁘지 않은 제안 같더군.”
“사업보다는 두 분의 관계 개선에 초점을 맞춘 제안이었습니다.”
“그런 기특함도 엿보였고.”
“혹시 이 장기에 걸려 있는 내기 같은 게 있는 겁니까?”
“나는 걸 게 있겠지만, 자네는 져도 딱히 내게 줄 수 있는 게 없지 않은가.”
“그 말씀은 스너프 프로젝트에 함께하실 결정을 내리신 거라고 제가 이해를 해도 되겠습니까?”
“정태가 총괄을 하고는 있지만, 결국은 자네 기획이고, 또 우리 미래금융까지 끌어들인 게 자네이다 보니 바둑을 뒀음 좋았겠지만, 장기로라도 자네가 어떤 수를 즐기는지 확인을 해 보고 싶었네.”
“그럼 무조건 이기는 장기가 아닌 제 수를 보여 드리는 장기를 둬야겠습니다.”
“뭐든 보여 줘 봐.”
차가 뛰어다닐 수 있는 문은 나중에 열어야겠다.
들었던 졸을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 장군을 지키고 있는 사졸을 위로 한 칸 올렸다.
“수성?”
“장군집이 든든하면 무리한 공격을 할 이유도 없고, 그만큼의 무리수는 피할 수 있게 되는 법이지요.”
태산이는 마를 움직였고, 나는 이번엔 장군을 밑으로 내렸다.
“올해 서른이지?”
“네.”
마를 건너 포를 장군 앞으로 세워 두며 태산이가 물었다.
“만나고 있는 여자는 있고?”
나도 마를 움직여 포의 길을 만들었다.
“아뇨, 없습니다.”
이번엔 태산이가 먼저 차의 길을 열어 주겠다고 졸을 옆으로 붙였다.
“앞으로 큰 사업 할 사람이, 장기판 장군집은 든든하게 만들 줄 알면서 정작 자기 울타리 만드는 걸 소홀하면 어떻게 하나?”
난 곧바로 포를 상대 쪽 차를 겨냥해 옮겨 놓고 허를 찔렀다.
“어허이. 자네 장기 둘 줄 아는 거 맞아? 무슨 장기가 이렇게 근본이 없어?”
얼른 졸을 움직여 포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 내며, 왜 쓸데없는 공격으로 장기 판수를 늘이냐는 식으로 태산이가 물었다.
하지만 난 마를 옆으로 돌려 상대편 차가 나의 포를 먹지 못하게끔 장치를 해 놓고 말했다.
“아무 나뭇가지로 울타리를 만들 순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한 번 만들 때 튼튼한 나뭇가지로 만들어 놔야, 두 번, 세 번 울타리를 다시 고치는 일이 없을 거 같아 신중하게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자네, 이거 장기 두는 거 누구한테 배웠나?”
누구한테 배우긴, 자네한테 배웠지.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장기라는 게 가는 길만 대충 알면 그다음부터는 깨지면서 배우는 거 아니겠습니까? 장입니다, 회장님.”
“잠깐만, 잠깐만… 이게 왜… 이게 왜 지금 여기에 있어? 이거 언제 이리로 왔어?”
“회장님 차 빼실 때 포로 막아 놓고 옮긴 겁니다.”
“잠깐… 이건 한 수 물러야겠네. 이건 아냐, 이건 아냐. 내가 질문하는 데 신경 쓰느라 장기판을 제대로 못 봤네. 이건 이렇게 한 수 무르는 걸로 하지.”
제멋대로 장기짝을 원래 자리대로 옮기려고 하는 태산이의 손을 막아 세우며 내가 말했다.
“그런 게 어디에 있습니까, 회장님.”
“한 수만 물러.”
“안 됩니다.”
“내가 아직 제대로 못 봤다고, 자네 수를!”
“속전속결. 눈 뜨고 코 베이게 만드는 게 제 수인데, 당하셔 놓고 못 봤다고 하시면 안 되죠. 다 보여 드렸는데….”
* * *
너 말고는 마땅히 없네
“물러. 한 수만 물러.”
“안 됩니다.”
“그럼 다시 둬. 한 판만 다시 둬.”
방을 나서는 나와 태산이의 모습을 거실에 모인 모든 사람이 의아해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끝나셨어요?”
“들어가신 지 10분 정도밖에 안 된 거 같은데?”
수가 뻔한 태산이를 데리고 장기 한판 두는 데 10분이면 충분하지.
“이놈이 장기를 어디서 이상하게 배워 와서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잖아.”
내가?
어이가 없네.
이 친구가 나이 먹고 억지가 늘었나, 아님 회장님 소리 몇 년 들었다고 사람이 바뀌었나?
내가 아는 태산이하고는 다르게 생떼를 부리네?
“원래 전술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누가 상대한테 나 이런 식으로 공격한다? 하고 다 말해 주면서 수를 짭니까?”
“그러니까 한판 다시 둬 보자고. 내가 실수를 한 건지, 아님 자네 실력이 날 눈뜬장님으로 만들 정도로 뛰어난 건지 제대로 확인을 해 보자고.”
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남 사장이 기분 좋게 웃으며 어르신이 저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는데, 한 판만 다시 둬 드리라고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판이 문제겠습니까? 그만두자 하실 때까지 계속 상대해 드릴 수는 있는데, 그럼 다음이 없잖아요.”
장태산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뜯어보기 시작했다.
“다음?”
“자주 뵙고 싶습니다.”
“…….”
“자주 불러 주십시오. 다음에 올 땐 제가 근사한 장기판 새로 하나 맞춰서 오겠습니다. 바둑은 자신이 없지만, 장기가 물리신다 하시면 그땐 바둑돌도 들어 보겠습니다.”
“자주 보고 싶다?”
“네.”
“뒷방 늙은이 자주 만나 뭐 얻을 게 있다고?”
“그러는 회장님은 저 같은 애송이한테 뭐 얻을 게 있다고 오라고 하셨습니까?”
“뭐?”
“얻을 게 없어도 나눌 수 있는 건 많을 겁니다.”
내가 싱긋이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태산이도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한마디를 안 지네, 한마디를 안 져.”
“저랑 같이 있음 심심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대신 혈압이 오르겠네.”
영석이가 자리를 만들었다.
“보니까 정훈이가 일부러 장기를 빨리 끝을 낸 거 같네요. 얼른 세배 받으시라고.”
“일부러? 하!”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태산이.
나와 남 사장, 그리고 여정이는 그런 태산이가 소파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나란히 서서 절을 올렸다.
세배를 하는 것도 재미가 있었고, 태산이에게 세뱃돈을 받는 것도 이상하게 재미가 있었다.
결국 이런 소소한 재미를 마음 편하게 누리는 게 우리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일 것이고 가치일 것인데, 어째서 난 그런 걸 이미 다 알면서 여전히 눈을 감기 전과 전혀 달라진 것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다른 삶을 살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아니, 이미 그런 기회는 나의 선택일 뿐,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난 싸우고, 쟁취하고, 그래서 내 울타리를 더 크게 확장을 시켜서 그 안에 더 많은 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걸 지켜보는 거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일 뿐.
난 나를 변화시키고 싶지가 않을 뿐이다.
한 번뿐인 인생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원 없이 나의 영역을 확장시켜 보고 싶었다.
거기엔 돈이라는 물질적 가치는 크게 작용을 하지 못했던 거 같다.
물론 기업을 처음 일으킬 때 가장 큰 가치는 돈이었지.
하지만 그 돈도 기업이 그룹으로 성장을 하고, 더 많은 재경맨들이 나의 울타리 안으로 모여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 순간 더 이상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돈보다 내 울타리 안에 모여든 사람들이 더 발전을 할 수 있게끔 내가 먼저 나의 한계를 깨부숴 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걸 삶의 가치로 삼아야 했다.
그랬기에 어쩌면 실패가 두렵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마치 내가 요즘 가끔씩 하고 있는 모바일 게임처럼, 죽으면 언제든 새로 시작하면 되는 게 내게는 사업이라는 것이고, 도전이라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시시한 상대보다는 조금이라도 날 긴장하게 만드는 상대와 상황이 반가웠던 것이고, 그런 상대와 상황을 내 편에 서게 만들 때 얻게 되는 성취감과 희열은 종이에 적힌 숫자에 불과한 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였던 것이다.
그런 걸 자식 놈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너무 이른 나이에 눈을 감았다.
어쩌면 그게 다시 얻은 삶의 기회 앞에서 여전히 눈을 감기 전 나와 똑같이 살고 있는 이유일 것이고.
나는 그냥 타고나길 이렇게 사는 게 재미가 있는 사람일 뿐, 앞으로도 나의 인생관을 바꿀 마음도, 변화를 줘 볼 생각도 전혀 없다.
“거기서 혼자 뭐 해?”
잠시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외투를 여미며 하늘이가 다가왔다.
“식사 준비 거의 다 끝났으니까, 들어와서 밥 먹어.”
“하늘아.”
“뭐?”
근데 이 녀석 이건 일부러 이러는 건가?
정훈이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사과까지 했는데 너무 안 풀리네.
“잠시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이야기?”
“뭐 좀 물어볼 게 있어.”
“물어봐.”
“그러지 말고 이리로 좀 와 봐. 같이 좀 걷자.”
“걷긴 뭘 걸어?”
“그럼 여기 좀 와서 앉든가.”
“뭐? 무슨 이야기?”
여민 외투 위로, 춥다는 걸 표현하기 위함인지 팔짱을 끼며 하늘이가 철제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함께 마주 보고 앉으며 심술이 가득한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렇게 웃지 말지?”
내게 심술을 부리건 말건, 태산이 놈 손녀딸인데 내 눈에 안 예뻐 보일 수가 있으랴.
“깡패야? 왜 남 웃는 거까지 못 하게 해?”
“그럼 앉으란 말을 하지를 말든가. 앞에 앉혀 놓고 그렇게 세상만사 다 통달한 사람처럼 영감 미소 짓고 있는데, 보기 좋을 리가 있어?”
“야, 그래도 오늘은 내가 명색이 회장님 손님으로 왔는데, 너무 툴툴거리는 거 아니냐? 그때 그 일은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
”손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리고 요란다 그 일은 나도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거든?”
“근데 왜 자꾸 그래?”
“뭐가?”
“에휴… 그래, 다 내 업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