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85)
“집에만 있으라고 한 적 없는데?”
“할아버지 의중, 눈치로 대충 다 긁었잖아. 나도 좋아서 같이 가자는 거 아니니까, 오해는 접어 둬. 일단은 우리끼리라도 말을 좀 맞춰야 할 거 아니냐고.”
그래.
아까 식사를 할 때부터 태산이의 눈치가 꽤 노골적이긴 했다.
그럴 수 있지.
하늘이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태산이 입장에선 충분히 별난 계산을 해 봄 직하다.
“잘됐네.”
“뭐가?”
“마침 나도 좀 힙한 곳을 몇 군데 알아 두고 싶던 참이야.”
“힙한 곳?”
차 앞으로 서서 하늘이에게 말했다.
“너는 알고 있는 곳 꽤 될 거 아냐. 그중에 제일 힙한 곳 한 군데만 소개시켜 줘라.”
“나 지금 뭐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거기에 잘못 들을 내용이 뭐가 있어?”
“아니, 그렇잖아. 천하의 손정훈이 나 같은 범생이한테 힙한 곳을 소개해 달라는 게 말이 돼?”
범생이?
하늘이가?
아무리 봐도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공부만 했던 녀석으로도 보이지는 않는다.
“너 범생이야?”
정색을 하며 하늘이가 반박했다.
“아니거든.”
“방금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내가 그렇다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오빠가 항상 나한테 그렇게 불렀잖아. 범생이라고.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진짜 때린다.”
정훈이 놈이 하늘이를 그렇게 불렀다?
하긴, 정훈이 놈이 그간 해 왔던 행색을 짐작해 보면 정훈이 놈 기준에서 하늘이는 말 잘 듣는 순한 양일 수도 있었겠다 싶다.
“너는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냐?”
“내가 이래서 오빠가 참 별로라는 거야.”
나는 하늘이 네가 아무리 나한테 투덜거려도, 태산이 놈 손주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귀엽고 내 새끼 같아 보인다, 이놈아.
“항상 자기밖에 모르지. 다른 사람 기분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그래 놓고 딴 사람이 뭐라고 하면 금방처럼 뭐 그런 걸 마음에 담아 두느냐는 식이고.”
“너랑은 내가 가급적 말을 안 섞어야겠다. 섞기만 하면 본전도 못 찾네.”
내가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이겼다는 마음에 뿌듯한지 피식하고 웃으며 날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오빠가 소개 좀 시켜 줘라.”
“뭘?”
“힙한 곳. 나보단 오빠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을 거 아냐.”
“몰라.”
“몰라?”
“응. 요즘은 밖을 잘 안 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흘겨보다 이내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하늘이었다.
“하긴. 그간 만나서 논 상대가 채서린이다 보니 힙한 호텔은 알아도, 사람들 많이 모이는 힙한 곳을 자주 다닐 정신은 없었겠네. 그간 회사 일도 꽤 열심히 했다고 하니까 말이야. 공사가 다망하셨을 거 아냐.”
“적당히 하자. 그런 거 아니니까.”
“그래도 힙한 곳 같은 건 나보다는 오빠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을 거 아냐. 나랑 비교가 되겠어?”
“진짜 모른다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좀.”
“아, 그냥 아무 데나 가. 그럴 거면.”
“근데 이거 진짜 오빠 차야?”
내 차를 쳐다보며 하늘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게 진짜 손정훈이 차라고?”
“너 근데 진짜 언제까지 계속 손정훈, 손정훈 하면서 이름 부를 거야?”
“왜 이래? 누구보다 아메리카 스타일을 선호하시던 분이. 안 그래, 테디?”
테디?
정훈이 놈이 썼던 영어 이름인가 보네.
“왜? 넌 비싼 외제 차 타고 다니나 보지?”
“그럴 리가. 내가 오빠야? 오빠가 타는 차치고는 너무 소박한 거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이런 거 오빠 취향 아니잖아.”
“네가 내 취향을 알아?”
“왜 몰라? 무조건 사람들 눈에 띄는 게 바로 오빠 취향 아냐?”
운전석 문을 열며 탈 거면 타고, 아니면 따로 움직이자는 뜻을 담아 말했다.
“나이가 드니까, 하고 있는 거 말고, 앞으로 내가 할 걸로 눈에 띄고 싶어지네. 탈 거야, 말 거야?”
* * *
손해 볼 일은 없을 게다
하늘이는 흥분된 감정을 정훈이 앞에서 숨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태였다.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재경모직의 지분.
그게 아버지를 거치지도 않고 곧바로 자신의 몫이 되게 생겼다.
부담이나, 설렘과는 조금 다른 성질의 흥분이 하늘이를 감싸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있어 재경이란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미래금융의 위기 때에도 많은 간부들이 그 지분을 매각해 현금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을 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던 할아버지였다.
그런 할아버지가 젊음을 모두 바쳤던 재경이란 이름의 마지막 당신의 소유물을 자신에게 넘기겠다 하셨다.
여러 복잡한 감정이 뒤섞이고 있는 하늘이에게, 지금 자신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게 다름 아닌 손정훈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실소라도 흘릴 수 있는 여유이지 않았을까.
“어때? 이 정도면 오빠 기준에선 힙한 건가?”
하늘이 역시 자주 와 봤던 곳은 아니다.
이 시간대는 처음이었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회사 일에 뛰어들었고, 언제나 그랬듯 경영 수업에서도 최고 평가를 받아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평가를 주는 사람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라는 것만 달라졌을 뿐.
어디에서든 최고가 되기 위해, 딸이지만 장남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점에선 크게 달라질 게 없는, 오히려 이젠 실전이었기에 더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던 지난 몇 년이었다.
그런 하늘이에게 정훈이가 주문한 ‘힙’이라는 표현은 그저 잠시 머물다 스쳐 지나갈 트렌드, 유행일 뿐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관통시킬 만한 무게는 없는 것이었다.
저 멀리 남산 뷰가 예술인 이태원의 작은 루프톱 와인 바였다.
저녁엔 완전한 와인 바가 되지만, 점심땐 가벼운 디저트와 커피도 판매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나마 집에서 적당히 가깝고, 또 적당히 멀기도 한 이곳을 추천했다.
하지만 역시나 정훈이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자신의 취향에 실망이라는 듯, 다리를 꼬아 앉아, 보라는 남산 뷰는 안 보고 가게 안만 유심히 뜯어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요즘 말하는 힙이라는 거야?”
“내 기준에선 충분히 힙한 곳이야.”
정훈이가 자신의 취향을 비웃어도 상관없었다.
‘왜 내가 저 인간한테 내 취향을 평가받아야 돼?’ 하는 게 이곳으로 가자고 했던 하늘이의 본심이었다.
그저 여기에서 가볍게 와인 한잔하고 싶었다.
같이 와인 잔을 기울여 줄 상대가 정훈이라는 게 못내 아쉽긴 했지만, 할아버지의 온 젊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재경모직의 지분을 양도받게 된 지금, 그딴 것 따윈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흥분된 감정을 와인 한 모금으로 살짝 눌러 주고 싶었을 뿐.
그런데….
“우리가 시간대를 좀 잘못 맞춰서 온 거 같네.”
대충 가게 안은 다 둘러봤다는 듯, 이내 남산 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정훈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뭐?”
“여자들이 좋아하겠어. 인테리어도 아기자기하고, 뷰도 괜찮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내 취향은 아닌데, 네 말대로 힙의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도 있는 거니까. 네 또래 여자들은 이런 곳을 선호할 수도 있겠다 싶긴 하네. 나는 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에너지 넘치는 곳을 소개해 달라는 뜻이었거든.”
“이 시간에 클럽에 가잔 소린 아니었을 거 아냐.”
“너 클럽 다녀?”
“다닐 거 같아?”
“전혀 안 어울리는데, 네 입에서 클럽 이야기가 나오니까 물어보는 거 아냐.”
“왜 전혀 안 어울려? 내가 뭐 어때서?”
“다녀? 다니면 언제 나랑 클럽 한번 같이 가 주라. 클럽도 궁금해.”
“웃으라고 한 소리였다 생각할게.”
종업원이 얇은 메뉴 북을 들고 주문을 받으러 왔다.
라임 반 조각이 든 유리 물잔을 내려놓고 있는 종업원에게 하늘이가 물었다.
“이 메뉴 북은 이쪽한테만 주고, 저는 와인 리스트 좀 갖다주세요.”
종업원이 와인 리스트를 가지러 다시 안으로 들어갔고, 정훈이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하늘이에게 물었다.
“와인 하게?”
“그러겠다고 여기 온 거야. 가볍게 한잔. 오빠는 커피 마셔. 운전해야 하잖아.”
“운전이야 대리 기사 불러도 되는 거고. 그럼 나도 같이 와인이나 한잔해야겠다.”
“그러시든지.”
정훈이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시간에 맞춰 적당하게 글라스 와인 한 잔 정도만 할 생각이었는데, 정훈이까지 와인을 하겠다고 하니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오빠도 같이 마실 거면 그냥 바틀로 시킬까? 부담스러우면 그냥 글라스로 시키고. 난 많이 마셔도 두 잔이야. 그 이상은 안 마실 거야. 오빠는 어때?”
“바틀로 시켜.”
“오빠 뭐 좋아해?”
“너 마시고 싶은 걸로 시켜.”
“그래. 내가 살 거니까, 내가 마시고 싶은 걸로 시킬게.”
“오… 하긴. 모직 지분 다 받았는데, 오늘 같은 날은 한턱 쏴도 된다.”
“그런 거랑은 상관없는 거거든? 그냥 오빠한테 뭘 얻어먹고 싶지가 않은 거야. 오빠한테 뭐 얻어먹으면 이상하게 뒤끝이 안 좋더라고. 요란다 일도 그렇고….”
“크흠….”
하늘이는 와인 리스트를 쭉 훑어보다 결국 종업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실은 제가 와인을 잘 몰라요. 몇 개 눈에 익은 이름은 있는데, 막상 리스트를 보니까 뭘 시켜야 될지를 모르겠네요. 괜찮은 와인 있음 추천 좀 해 주세요.”
“시간이 좀 이른데 라이트한 걸로 추천을 드려도 될까요?”
“저는 달콤한 게 좋아요. 사실 와인 맛도 잘 몰라요. 가볍고 달콤한 게 좋을 거 같아요.”
옆에서 정훈이가 끼어들었다.
“안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거 보니까, 도메인 뒤폰쉬가 있는 거 같던데 가지고 있는 뒤폰쉬 중에 어느 빈티지가 제일 괜찮아요?”
“뒤폰쉬… 요?”
“저거 뒤폰쉬 아니에요?”
“잠시만요. 제가 안에 들어가서 매니저님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왜요?”
“제가 여기서 일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되거든요.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아….”
“고가 와인을 직접 서비스해 본 적이 아직은 없어서요. 매니저님 불러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뭐든 처음은 있는 거예요.”
종업원이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네?”
“그 처음을 계속 뒤로 미루면, 그만큼 자기 손해 아닌가? 이 일 배우고 있는 중이라면서요?”
“…네.”
“언제 해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나 같으면 직접 한번 서비스해 보겠다. 와인은 나도 좀 알아요. 매니저까지 불러올 필요는 없고, 들고 있는 뒤폰쉬 중에 제일 괜찮은 빈티지 있으면 한 병 가지고 와요.”
그렇게 말한 다음 하늘이에게 물었다.
“뭐랑 같이 마실래? 같이 마시기에 치즈가 제일 만만하긴 해.”
“뭐, 그럼 그러든지.”
와인 리스트를 닫아 그걸 종업원에게 건네며 정훈이가 말했다.
“매니저한테 물어보고 뒤폰쉬하고 어울릴 만한 치즈 있으면 그거랑 같이 갖다줘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가격은….”
종업원의 걱정에 정훈이는 피식하고 웃으며 농담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신경 안 써도 돼요. 이 시간에 와인 마셔야겠다는 사람이 오늘 로또를 맞았거든. 뒤폰쉬 정도는 아무리 비싼 빈티지라도 웃으면서 계산할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갖다줘요.”
3,680,000원.
종업원이 와인 한 병과 함께 가져온 계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