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87)
“우린 미래금융이라는 든든한 파트너가 확보된 상태이지 않습니까. 분명 많은 투자가 필요로 한 사업입니다. 그리고 웹툰, 웹소설 기반의 콘텐츠 플랫폼 비즈니스는 시장이 어느새 고착된 상태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여기에 영상을 접목시켜서 새로운 방향으로 접근을 시킨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사업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봐.”
“이미 많은 웹소설, 웹툰을 원작으로 한 2차 영상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너무 많은 종편 채널이 시장에 등장하고 있죠. 국내 영상 사업은 더 이상 시장을 국내로만 한정 짓지 않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시장으로 보고 많은 상품을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이러하다 보니 많은 영화, 드라마 제작사들은 더 이상 국내 안에서만 승부를 보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다 넷플릭스니, 디즈니니 하는 그런 OTT 채널들 때문 아냐.”
“네, 맞습니다.”
다시 화면을 넘겨 놓고 정태가 말했다.
“그러니 스너프에겐 반드시 잡아야 할 기회인 거죠. 국내 유통을 넘어 자체 콘텐츠를 수출하는 플랫폼 수출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현재 국내 업계를 양분하고 있는 초대형 콘텐츠 플랫폼이 두 곳 있습니다.”
“알고 있어.”
“그 두 플랫폼이 국내 시장만 양분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전 세계 웹툰, 웹소설 시장을 양분하고 있습니다. 엄청나죠. 거기에 미래금융과 함께 만들 핀테크를 기반으로 보다 쉬운 콘텐츠 결제 시스템을 갖춰 놓고, 미래금융의 영상 제작 투자사인 미래기획과 사업을 확장시켜 나가면… 스너프는 스너프 자체만으로도 커머스와 핀테크, 콘텐츠라는 세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는 계열 그룹으로의 성장이 가능해집니다.”
* * *
정태가 그룹 본사 상무였을 시절, 자주는 아니었지만, 종종 회장님을 모시고 함께 갔던 설렁탕집이 있다.
그곳에서 손 회장과 함께 회장 대 사장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식사를 하며 정태가 물었다.
“아버지.”
“왜?”
“조금 전 제가 올린 기획, 마음에 드십니까?”
“준비 잘했던데? 어쨌거나 미래금융 쪽은 네가 더 많이 접촉을 해야 할 거다. 그쪽에서도 가급적이면 투자를 많이 넣고 싶어 할 거고. 장 회장님과의 관계도 있고 하니까,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 수준에서 가급적이면 그쪽 투자는 다 받아 주는 걸로 하고, 아까 말한 영상 관련해서도 디테일을 잡아 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물 만난 물고기 같구나.”
“제가요?”
“그래, 확실히 그동안 내 그늘에 가려져 네가 가진 실력이 티가 안 났어.”
“지금은 정훈이 그늘에 가려지고 있죠?”
국을 뜨다 말고 손 회장이 뜨끔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국에 밥을 말며 정태가 말했다.
정태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베여 있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
“저 다 알고 있습니다. 스너프 인수 초기 기획. 그거 정훈이가 만든 거라는 거.”
“그걸… 알고 있었어?”
손 회장은 내심 마음이 흔들거렸지만, 그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기에 무거운 목소리로 애써 무게를 실어 내야 했다.
“어떻게 몰라요? 남 사장, 조 전무, 심지어 미래금융 장 부회장님도 다 알고 계시던데.”
“…….”
“실은 아버지. 저 오늘 기획안 준비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잠을 못 잤어요.”
“…….”
“재경에 입사하고 3년 차였죠, 아마? 본부장 달고 처음으로 아버지까지 참관한 임원 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요. 그 발표 전날 잠을 못 잤거든요. 부담은 딱 하나였어요. 다른 임원들, 사장단 앞에서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발표는 하지 말자… 그 부담밖에 없었어요.”
“기억난다. 너무 잘했지.”
“그리고 어제 잠을 못 잤어요. 스너프 인수, 뱅크 시스템 도입… 다 정훈이가 만든 기획이지, 지금의 스너프 안에 제 기획은 아직 하나도 없는 거잖아요.”
“정태야….”
“서운했습니다.”
정태는 뚝배기 속으로 숟가락을 넣어 둔 채 몸을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환한 미소로 손 회장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저한테 스너프는 정훈이 기획이었다고 아버지께서 직접 말씀을 해 주셨음, 전 정훈이를 기특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
“지금도 기특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나 아버지가 미처 보지 못한 걸 봐 줬잖아요. 얼마나 기특해요? 정훈이 기획인 걸 알았어도 스너프, 제가 기꺼이 맡았을 겁니다. 오히려 정훈이에게 기획 의도를 좀 더 정확하게 물어 훨씬 더 발전적으로 맡을 수 있었을 거예요.”
“흠….”
“외로웠습니다, 처음 스너프가 정훈이 기획이었단 소릴 아버지도 아니고, 정훈이도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을 때요.”
“…….”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의 생각과 회장님의 판단을 이해하고 믿어 보려 하는 중입니다. 제게 언질을 못 주셨을 만한 이유가 있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제가 정훈이를 불편하게 느껴야 하는 상황은… 부디 부탁드리는데, 만들지 말아 주세요. 저 아버지 아들이고요, 정훈이 형입니다. 최소한 아버지한테는 아픈 손가락이 되고 싶지 않고요, 정훈이한테는 듬직한 형이 되고 싶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흠….”
“오랜만에 이 집 설렁탕을 이렇게 아버지랑 같이 먹어서 그런지, 마지막으로 왔을 때보다 더 맛있는 거 같은데요? 하하하. 식사하시죠, 아버지.”
“외롭게 만들었다니, 내가 마음이 무거워지네.”
“에이, 투정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이 정도 투정은 부려도 되잖아요.”
“그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겁다고. 어릴 때도 한 번을 안 했던 투정 아니냐.”
“…….”
“미안하구나. 내 생각이 짧았다.”
“짧으셨던 게 아니라, 너무 기셨던 거 같습니다. 그걸 알기에 서운하고 잠시 외로웠던 걸로 그칠 수 있었고요. 스너프 맡아 나가면서 사장이라는 걸 해 보니까 알겠어요. 역시나 제일 어려운 건 사람이고, 내 마음과는 달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똑같이 나눠 줄 수 없는 자리가 바로 이 자리라는 걸요. 사장 자리에 앉아서도 벌써 이런데, 아버지는 오죽하시겠습니까?”
그 순간 손 회장은 정훈이에게서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정태만의 큰 그림자를 보게 됐다.
어느새 정태가 어른을 거쳐, 큰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게 손 회장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 * *
됐습니다
조동희 전무를 통해 사람을 한 명 소개받았다.
전략기획팀의 강인성 과장.
내가 맡고 있는 인사부 업무 외적으로 쓸 만한 사람을 한 명 정도 곁에 두고 있고 싶다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강인성 과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조 전무였다.
“본사 전략 기획 본부에서도 탐을 내고 있는 친구예요. 이번에 손정태 사장이 스너프 기획팀 꾸리면서 차출을 받았는데, 팀장 추천을 받아 놓고 본인이 계속 모직에 남고 싶다고 해서 제외가 된 친구이기도 하고요.”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몇 번 술자리에 동석을 시킨 적이 있지요.”
조 전무에 대한 파악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정치력이 무기인 친구.
그 무기의 종류와 화력까지 이젠 내게 스스럼없이 공개하고 있다.
이쯤 되면 믿고 같이 가도 된다는 뜻이겠지.
“스너프… 그 사람 입장에선 분명 좋은 기회였을 거 같은데, 왜 안 가고 모직에 남아 있었던 건지 아십니까?”
“팀장이라고 보내고 싶었겠습니까?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키워 놨는데 좀 더 데리고 있고 싶었겠죠. 자기 팀장의 그런 눈치를 읽었던 것도 같고.”
“저한테 붙여 주시면 앞으로 귀하게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거기 팀장한테 말씀 좀 잘 전해 주세요.”
전략기획팀의 과장이다 보니, 사실상 연차만 놓고 보면 다른 일반 부서의 차장급이라고 봐야 한다.
업무를 보고 있던 중 강인성 과장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모르는 번호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받았는데, 상대는 전략기획팀 팀장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전화를 거는 거라고 했다.
우선 적당히 무게감이 실린 목소리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회사 안에서 오다가다 한 번쯤은 마주쳤을 인물.
직접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인사부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고과 평가서와 그 외 기록을 미리 다 확인해 봤던 난 곧바로 그의 목소리와 얼굴을 매치시킬 수 있었다.
“괜찮으시면 인사부로 잠시 내려와 주시겠습니까?”
―네,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조 전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강인성이라는 친구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난 몇 달 동안 나란 사람에 대해서는 파악을 끝내 놓은 것처럼 보였다.
나름대로 나와 합이 잘 맞을 만한 인물로 추천을 한 것이겠지.
불필요한 질문은 일체 하지 않고, 나의 요청에 바로 내려오겠다고 하는 것만 봐도 강인성이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 대충은 엿볼 수 있었다.
인사부 면담실.
강인한 과장과 마주 보고 앉았다.
나이는 서른여섯.
과장 2년 차.
고려대 국제학과를 졸업하고 스물여덟에 재경모직 전략기획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를 한 재원이었다.
전략기획팀 안에서도 준수한 고과 평가 점수를 챙기고 있었고, 과장 승진도 전략기획팀 안에서는 제법 빠르게 한 편에 속했다.
여기까지는 인사부가 가지고 있는 그의 데이터상의 내용.
그 내용을 미리 다 숙지를 하고 있었기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제가 처음 모직에 입사를 하고 6개월 정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회사 밖에서 사고를 치고 다니는 바람에 많이 피곤하셨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저 때문에 그룹 본사 전략 기획 본부 쪽으로부터 많은 참견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참견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럼요?”
“다만 얼마든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내용까지 그룹 본사 쪽으로 보고를 올려야 했던 게 비효율적이라 아쉬웠을 뿐입니다.”
일을 시키기에 아주 편한 상대일 거 같았다.
난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무님께 제 사람을 한 명 붙여 달라고 요청을 드렸습니다. 과장님을 추천해 주시더군요.”
“저도 팀장님께 비슷한 뉘앙스로 과장님을 한번 만나 보란 지시를 받았습니다.”
“지금 계신 곳에서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는 지금까지 전략기획팀에서 해 오셨던 기획 관련 업무보다 더 사소하고 성취감이 떨어지는 업무를 맡으실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절반의 기대와 절반의 궁금증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마음에 드는 솔직함이었다.
“작년 하반기 공채 건과 안산 생산 라인 노조 사태, 그리고 시니어즈 인수 건까지… 짧은 몇 달 사이에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 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계신 건지 궁금합니다.”
“관계를 거창하게 시작하지는 맙시다. 과장님도 저에 대해 옆에서 지켜볼 시간이 필요할 거고, 저 역시 과장님을 알아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저 인사부 HRO 과장이라는 포지션이 현재 제 활동 범위를 너무 제한하고 있는 거 같아 약간의 꼼수를 생각해낸 거뿐이니까요.”
“이해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굳이 현재 우리 모직뿐 아니라 항공, 식품의 사장단 그리고 이번에 스너프 사장으로 옮겨 간 정태까지 모두가 다 전략 기획 파트와 비서실 출신이라는 내용은 굳이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 내용으로 희망 고문을 던질 이유도 내겐 없었고, 강 과장 역시 그 정도 내용으로 바람이 들 인물 같지는 않았다.
“재경모직에 대한 파악은 대충 다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항공과 식품에 대한 세부 내용을 좀 구할 수 있음 좋겠는데요.”
“재무제표를 뽑아 드릴까요?”
“그런 건 다 나와 있는 거고요.”
“어느 정도의 세부 내용을 말씀하시는 건지 짐작이 잘 안 됩니다.”
“우리 전략기획팀에서 받을 수 있는 내용에서 한 발만 더 앞서 생각해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제가 직접 알아내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내용이겠지만….”
“이해했습니다.”
그래, 이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당장은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고요, 앞으로 개발부에서 진행 중인 새 브랜드 론칭과 시니어즈 브랜드 리뉴얼에 관한 내용을 기획 쪽에서는 강 과장님이 직접 맡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올라가는 대로 팀장님께, 그게 과장님의 생각이라고 전하겠습니다.”
웃음이 나왔다.
“근데 원래 그렇게 딱딱하세요?”
“네?”
“강 과장님이요. 여기가 군대도 아닌데, 대답을 너무 칼같이 각을 잡아서 하시니 살짝 부담스러운데요?”
그제야 표정을 풀며 강 과장이 대답했다.
“제가 과장님 앞이라 저도 모르게 긴장을 했나 봅니다.”
“그러신 거 같아서 한 말이었어요. 그럴 필요 있습니까? 제가 필요해서 실력 있는 사람을 요청한 거고, 거기에 과장님이 내려오신 건데요. 앞으로 많은 도움을 주실 분이 그렇게 긴장을 하고 계시면, 제가 부담스러워서 편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조만간 따로 자리 한번 마련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진작에 사람 한 명을 붙여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전까지는 스스로 모직 안의 구조를 뜯어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태산이도 모직에 있는 자기 지분을 하늘이에게 주겠다 하면서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으니, 지금부터는 나도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나.
* * *
강 과장과 별도의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동명물산에서 넘어온 시니어즈 팀 사람들 사이에서 재경모직의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부분이다.
언제 터져도 터질 일이었고, 오히려 지금쯤 문제점들이 하나둘씩 나올 때가 됐는데, 자기들끼리 신호를 만들어 가며 교통정리를 잘해 나가고 있어서 의외이던 참이었다.
“손 과장님.”
처음엔 김 부장이 무슨 일로 날 찾는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그런데 따로 자리를 마련한 김 부장은 동명물산에서 넘어온 시니어즈 팀 사람들 중 류성환 본부장을 중심으로 몇몇 업무의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이 모였고, 그들을 대표해 류 본부장이 자신을 직접 찾아와 몇 가지 불만을 토로했다고 말했다.
“시니어즈 관련해서는 과장님이 직접 핸들링을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우선적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있다면 어떤 계획인지부터 물어보려고요.”
“어떤 부분에서 문제점들이 나오고 있다고 하던가요?”
“뻔하죠. 어쨌거나 기존의 시니어즈 팀은 그동안 해 왔던 게 있으니까, 변화를 주더라도 기존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 하는 거 같아요.”
“그럴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