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92)
와인 잔을 내려놓고 하늘이에게 말했다.
“채서린이 강남에 320억짜리 자기 건물이 있어? 우와, 부자네. 지금의 나보다 훨씬 부자네. 나보다 훨씬 돈이 많으니까, 나는 채서린을 걱정해 줄 자격이 안 되는 거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거든?”
“그런 눈으로 무슨 투자를 한다는 거냐, 너는?”
“…….”
“네 말대로 채서린은 아이돌 연습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자기 힘만으로 여기까지 왔어. 그 힘든 일 그만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었을까. 마음 편히 사람도 못 만나, 연애도 못 해. 연애를 하고 싶어도 세상에 자기를 알아보는 눈이 너무 많아 호텔 룸 아니면 데이트를 하지도 못해. 보통의 사람들은 그런 감옥 같은 생활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는 한 달도 못 버텨. 그런데 그걸 채서린은 10년 넘게 버티면서 하고 있어. 왜? 자기가 하는 일이 좋으니까.”
“……!”
“그 힘든 걸 다 참을 수 있을 만큼, 다른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연예계 생활이 좋으니까. 물론 힘든 날도 많겠지. 그런데도 그걸 10년 넘게 참을 수 있었을 만큼 좋아하니까, 버틸 수 있었던 거 아니겠어? 그래서 지금도 버티고 있는 중이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버틸 수 있다고 스스로 채찍질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냐고.”
“…….”
“너무 혼자 일어서는 게 당연한 사람이고, 거기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지금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도 어떻게 도와 달란 손을 내미는지, 누구한테 손을 내밀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거 같아 보였어.”
“…….”
“그래서 그 스캔들의 지분 90퍼센트 이상은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못 본 척할 수가 없어서 너한테 이런 부탁까지 한 거고. 네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돼서 더는 부탁을 안 할 거야. 그런데 하늘아.”
“…….”
“남 이야기 그렇게 쉽게 하는 거 아냐. 그거 너한테 좋을 거 하나 없어. 너는 죽어라 놀지도 않고 어떻게든 미래금융을 잘 이끌어 보겠다고 노력을 하는데, 밖에서 널 잘 모르는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지금 저 위치에 있는 건 다 부모 잘 만난 덕이라고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노력을 싸잡아 평가를 해 버리면… 넌 좋겠냐?”
“오빠 이제 봤더니 꼰대기까지 있네?”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요즘 사람들이 꼰대라고 한다면 난 꼰대가 맞아. 난 차라리 꼰대 소리 듣는 게 낫지, 그 소리 듣기 싫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것도 없는 자리에서 내 멋대로 평가하는 사람에게 그건 잘못된 거라는 말도 못 하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아.”
“…….”
“와인 마시자. 치즈 새로 나오네. 채서린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 더는 하지 말자. 하면 또 너한테 꼰대 소리 들을 거 같으니까.”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하늘이는 분했다.
너무 분한데, 그 분함을 한 번 보고 끝일 대리 기사 앞에서조차 마음 편히 표출을 할 수 없는 하늘이었다.
하늘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항상 교양이 있고, 누굴 상대하든 예의를 지켜야 했으며, 약자들을 상대로 동정이란 감정을 느낄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
그런 강박 속에서 지금껏 살아왔다.
그런 강박으로부터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상대는 정훈이었고.
하늘이에게 있어 절제 없고 무분별한 정훈이의 대학 생활은 그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희열이었다.
저런 인간이 있어 주기에 나란 사람이 더 빛날 수 있단 생각에.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천하의 개망나니 소리나 듣던 손정훈이 저런 단단한 소신과 깊이 있는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
도대체 뭔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건데!
놀 거 다 놀고, 자기 하고 싶은 건 그게 뭐든 다 해야만 하는 인간 아니었나?
그게 윤리적,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짓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정훈이에 비해 하늘이는 정말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하늘이를 배신하고 있었다.
처음엔 정훈이라는 인간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람 보는 눈을 잠시 의심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젠 알 것 같다.
할아버지의 사람 보는 눈을 잠시라도 의심해 볼 정도의 역량마저 하늘이 자신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걸.
다음 날 하늘이는 출근과 동시에 채서린의 기획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래기획의 장하늘 팀장입니다.”
―네, 팀장님!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일전에 진행이 되다 엎어졌던 악녀검사에 관한 내용으로 전화 드렸어요.”
―네? 아, 악녀검사요?
“네. 그 건으로 채서린 씨와 잠시 미팅을 가졌음 싶은데, 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요?”
―호, 혹시 지금 악녀검사라고 하신 거 맞죠?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아뇨. 악녀검사 건으로 채서린 씨와 잠시 미팅을 가져 보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당연히 되죠.
“아직 제작사 측과는 따로 나눈 이야기가 없어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 * *
저한테 이런 부탁을 하네요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채서린은 그런 심정으로 소속사 대표실을 찾았다.
“왔어?”
“네.”
소속사 대표는 보고 있던 자료들을 미련 없이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파 자리로 직접 채서린을 안내한 뒤 자리에 앉았다.
“점심이나 같이하자니까.”
“식단 조절 중. 간만에 찾아온 비수기라고 그동안 너무 퍼져 있었어요.”
“채서린이한테 비수기가 어딨어?”
“왜 없어요? 누가 봐도 지금이 비수기인데.”
“커피는 괜찮잖아? 뭐 마실래?”
“조금 이따가요. 장 팀장님 오면 그때 같이 마셔요. 커피도 많이 마시면 살쪄요.”
미래기획 쪽에서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 대표는 채서린에게 당부하고 싶은 내용이 있었다.
“장 팀장은 서린이 너도 잘 알지?”
“개인적으로는 모르죠. 미래금융 사주 장손녀라는 거 정도? 그게 끝이에요.”
“그럼 다 아는 거지. 그쪽으로 와 달라는 게 아니라, 직접 오겠다고 했어. 오피셜한 내용은 아닐 거란 말이지.”
“이 바닥에서 계약서 도장 찍기 전까지 오피셜한 게 어디에 있어?”
채서린의 말이라면 무조건 수긍부터 하고 보는 대표였지만, 이번 사안 앞에선 어느 정도 단호한 입장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가 만나 달라고 사정을 한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온 거야. 제작사 측이랑도 접촉이 있었던 게 아니래.”
그 부분이 채서린에게 일말의 희망을 안겨 주고 있는 거였다.
현재 미래기획 쪽과 이야기를 나눌 만한 내용은 편성 직전까지 갔다가 엎어진 드라마 <악녀검사>에 관한 것밖에 없다.
미래기획이 중간에 끼어 있는 CF도 몇 건 있긴 했지만, 그것들은 이미 진작에 다 해결이 난 상태이고.
“이거 우리 오늘 무조건 잡아야 한다, 서린아.”
“잡긴 뭘 잡아요. 이미 엎어진 건데.”
“왜 그러냐. 다 알고 와 놓고 왜 또 삐딱선을 타?”
삐딱선을 타는 게 아니라, 그만큼 채서린이 조심스러운 상태라는 걸 대표는 모르고 있었다.
채서린이라고 왜 모를까.
누구보다 잘 알지.
조금의 틈만 상대가 보인다면 바짓가랑이,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게 대수겠나.
하지만 지난 몇 달간 해당 스캔들 이슈로 소속사 쪽으로 너무 많은 피해를 부담시켰다.
그 부분에 있어 이젠 가족이나 다름없는 대표와 편하게 마주 앉아 식사 한 끼 하는 게 미안해서 부담스러울 정도이고.
괜히 여기에서 자기까지 덩달아 대표의 기대를 부채질해 버리면, 그랬다가 별 성과 없는 미팅이 되어 버리면 거기에서 받게 될 대표의 상실감과 실망스러움이 배가 될 것이라는 걸 알기에 애써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는 척해야만 했다.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며 채서린이 건조하게 물었다.
“그런데 악녀검사 투자 건은 보통 투자 건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걸 팀장 선이 결정을 할 수 있는 건가?”
채서린은 불안한 마음을 에둘러서 대표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달래고 있었다.
“그 팀장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거지. 배우라고 다 똑같은 배우고, 연출이라고 다 같은 연출이야? 작가라고 다 같은 작가냐고. 그리고 우리가 그런 거까지 알아서 뭐 하냐? 포인트는 우리도 엎어진 거라 생각하고 잊고 있었던 건으로 미래기획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는 거고, 그 연락이 장 팀장 연락이라는 거야.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고.”
“흠….”
“너 장 팀장하고 서로 어색하고 그런 사이 아니잖아?”
“기억이 잘 안 나요. 프레지아 꽃향기 종방 파티 때랑 초특급 연애 기사 크랭크 인 할 때였나, 시사회 때였나? 아무튼, 두세 번 정도 봤던 거 같긴 한데,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길게 나눠 본 적은 없었던 거 같아.”
“그럼 된 거지. 불편한 자리로 만난 적은 없었단 소리잖아.”
“불편하게 만날 일이 어디에 있어요. 지금 이 자리가 제일 불편하겠네.”
“그럼 됐어. 오늘은 콘셉트를 좀 말랑말랑하게 잡아 보자, 서린아.”
“언제는 내가 딱딱했어?”
“지금 이런 설정 안 좋아. 상당히 안 좋아. 표정 좀 풀고.”
“어후, 됐어. 내가 바보예요? 오면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만나기도 전에 아군 힘 뺄 일 있어? 내가 지금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요.”
“걸리는 거? 뭐? 뭐가 걸리는데?”
“있어, 그런 게. 배우가 눈뜨면 하는 게 표정 관리인데, 뭘 그런 걸 걱정해?”
그리고 얼마 뒤, 바깥에서 대표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채서린은 눈만 살짝 돌려 대표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상대가 온 모양이다.
대표 역시 입고 있던 재킷을 다시 한번 정돈한 뒤, 연출된 음성으로 대답을 했다.
“들어와요.”
대표실 안으로 실장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로 장하늘 미래기획 팀장이 따라 들어왔다.
채서린과 대표는 짐짓 벌써 도착을 했느냐는 식으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장하늘 팀장을 반갑게 맞이했다.
대표의 호들갑은 극에 달했다.
“아이고오오오… 장 팀장님!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으로. 이게 진짜 얼마 만입니까? 프레지아 꽃향기 종방 파티 때 이후로 처음이죠?”
“그 파티에 대표님도 계셨던가요?”
“이거 섭섭합니다? 2차 가는 중간에 제가 편의점에서 스크류바 사서 나눠 드리고 했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
“아, 맞네. 그랬네요.”
박수까지 쳐 가며 하늘이가 당시의 상황을 기억해 냈다.
“1차 때도 중간에 오셔서 2차 때도 소리 소문 없이 먼저 가셨죠. 계산만 하시고.”
“사실 그런 자리에 배우 소속사 대표가 얼굴 들이밀고 하면 타 소속사 배우들이 불편해하잖아요. 그때도 연은영 작가가 계속 오라고 연락을 해서 어쩔 수 없이 갔던 거지, 아니었음 안 갔어요. 아무튼 이쪽으로 앉으세요.”
장하늘 팀장을 안으로 안내한 실장이 마실 것을 물었고, 그걸 준비해서 다시 대표실을 찾는 동안 세 사람은 최대한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 대표실 안으로 커피가 들어온 뒤에야 장하늘 팀장이 조심스럽게 대표에게 양해를 구했다.
“실은 대표님.”
“네, 팀장님.”
“제가 서린 씨한테 개인적으로 물어서 확인을 하고 싶은 내용이 좀 있어요.”
“혹시 제가 자리를 비켜 드려야 하는 그런 그림인가요?”
하늘이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눈치가 밥줄인 대표였기에 곧장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으세요?”
“꺼내 보기 전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어떻게 하지? 시간이 좀 어중간하긴 한데, 그래도 두 분이 이야기 나누시고 나중에 저까지 해서 가볍게 생맥주나 한잔하러 나갈까요?”
하늘이는 천하의 채서린이를 데리고 있는 소속사의 대표가 이렇게까지 극진한 친절을 보이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더는 감정 노동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악녀검사 건은 제가 서린 씨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눠 본 후에 최대한 긍정적인 투자 검토가 다시 이뤄질 수 있도록 보고서를 만들어 볼 생각이에요.”
“오우… 그거 너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재추진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선 우선은 제가 먼저 확신을 가져야 할 거 같아서요.”
“그럼요, 그럼요. 당연하죠. 그러면 저는 잠시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고요, 서린아. 알지? 궁금해하시는 내용 있으면 편하게 말씀드려.”
대표가 나가고 난 후, 그 대표실 안으로는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누구에게나 처음이라는 건 참 소중한 거 같아요.”
하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처음이 그리 나쁘지 않은 기억이라고 하면 말이에요.”
“처음이요?”
“프레지아 꽃향기. 대학 졸업하고 미래기획에 입사해서 제가 맡았던 첫 드라마 투자 기획이었어요.”
빨대로 커피를 조금 빨아 마신 후 채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테스트를 받은 거였죠, 제 입장에선. 투자 제의가 들어와 있는 드라마 대본이랑 영화 시나리오를 이만큼 받았어요.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보래요. 제목이 좀 촌스럽긴 했지만, 이상하게 그 많은 대본, 시나리오 중에 프레지아 꽃향기가 가장 먼저 제 눈에 들어왔어요. 아니나 다를까 막상 읽어 봤는데, 제가 좋아하는 로코 장르 드라마인 거예요. 주인공 지아에게 감정 이입을 해서 대본을 넘기면 넘길수록 지아 역을 맡을 수 있는 배우는 한 명뿐이란 생각밖에 안 들었죠. 배우 채서린 씨가 지아 역을 입으면 참 그림이 예쁘게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기억이 나네요. 처음 대본을 받고 일정이 안 맞아서 거절했는데, 준비 중인 작품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라는 대답을 받았죠. 다른 작가님도 아니고 연은영 작가님이라 한 번 거절을 한 상태에서 다시 또 거절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그걸 알고 제가 연은영 작가님을 많이 푸시했었죠.”
“그러셨어요? 이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듣는 내용인데요?”
“연은영 작가님이라고 그런 내용을 배우들한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으셨겠어요? 작가님 커리어가 있는데.”
“하긴. 그건 그렇네요.”
“서린 씨가 그 역을 맡겠다 했을 때 저 정말 기뻤어요. 그리고 그때 처음 알았죠. 아, 이런 게 쾌감이라는 거구나. 이런 쾌감 때문에 사람들이 일이라는 걸 하는 거구나… 하는걸요.”
하늘이는 그 쾌감의 입구까지 채서린을 서서히 몰아 놓고 본론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