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94)
“15분 뒤에 도착할 거 같은데, 잠깐이면 되니까 회사 앞으로 좀 나와.”
―지금? 지금 15분 뒤?
“어.”
―야, 인마. 지금 근무 시간이야.
“중요한 내용이야. 15분. 잠시면 돼. 뭐 좀 확인만 하면 끝나는 일이야.”
―무슨 확인? 통화로는 안 되는 거야?
“얼굴을 보고 해야 하는 거야.”
―뭔데 그래? 그러지 말고 그럴 거면 그냥 퇴근 후에 같이 저녁이나 먹든지.
“아니, 지금 해야겠어.”
―자식, 거 더럽게 일방통행이네. 야, 인마.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짜증이 날 수밖에 없어.
“짜증 같은 건 앞으로 내가 다 받아 줄 수도 있어.”
―…뭐?
“그리고 확인만 끝나면… 앞으로는 오빠한테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나가는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잠깐만 나와. 잠깐이면 돼.”
재경모직 본사 앞 커피 전문점.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그 안으로 들어서니, 이미 정훈이가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 빨리 올라가 봐야 돼. 30분만 자리를 비우겠다 말해 놓고 내려온 거야.”
“10분. 아니 5분이면 돼.”
하늘이는 정훈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요란다 있잖아.”
“야아.”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전에는 보여 준 적 없던 단호하고 엄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정훈이.
“넌 회사 일이 장난이야?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똥오줌 구분을 못 해서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하늘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요란다한테 도대체 왜 그랬던 거야?”
“정말 실망스럽다. 이건 아닌 거야. 내가 널 잘못 봤어.”
“요란다랑 그날 호텔방에서 뭐 했어?”
“그만해라. 더 하면 나 진짜 화낸다. 이거 장난 아니야.”
“그것만 대답해.”
“하. 네 할아버지는 너 이런 성격인 거 아시니?”
“요란다랑 그날 호텔방에서 뭐 했어?”
“다 큰 남녀가 호텔방에 같이 들어가서 할 게 뭐가 있겠어?”
“정말 했어?”
“왜? 정말 했으면 실망이야? 그 정도도 모르고 그간 나한테 요란다란 이름에 노이로제가 생기게 만든 거였어?”
“할 수가 없잖아.”
“왜 없어? 그건 내가 몇 번이나 너한테 미안하다고….”
“오빠는 요란다랑 같이 호텔에 간 적이 없으니까.”
“……!”
“오빠는 요란다랑 같이 호텔에 간 적이 없어. 그런데 간 적도 없는 호텔에서 요란다랑 뭘 했다는 거야?”
이젠 채서린에게 들은 말에 확신을 가지며 하늘이가 다시 물었다.
“요란다 어느 나라 애야?”
“뭐 하냐, 지금?”
“요란다 어느 나라 애냐고.”
하늘이의 눈에 침을 삼키느라 정훈이의 목젖이 울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재차 물었다.
“몰라?”
“기억이… 잘 안 나네.”
“그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나? 학교에서 나랑 같이 다닌 유일한 한국 애가 요란다였는데.”
“아 참, 맞아. 그랬지. 갑자기 물어보니까 당황해서….”
“요란다 미국 앤데?”
정훈이가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런 정훈이를 더는 괴롭히지 않겠다는 투로 하늘이가 마무리를 지었다.
“기억이 잘 안 나는 게 아니라, 기억이 아예 없는 거라며?”
어느새 정훈이의 얼굴은 잠잠해졌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늘이의 두 눈을 쳐다보며, 정훈이가 입을 열었다.
“채서린 만났냐?”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채서린이 전부야?”
* * *
이번엔 진짜 안녕
성공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내 주위로 많은 사람이 다가오기 시작한 이유부터 자연스럽게 터득된 게 있다.
사람의 눈.
날 대하는 사람의 눈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다.
내게 뭔가를 바라는 게 있는 것인지, 날 통해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님 나란 사람에 대해 알아보고 파악을 해 보고 싶어 하는 것인지.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가진 힘이 아닌 나란 사람 자체에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겐 공통점 같은 게 있었다.
나 역시 그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만든다는 공통점.
내가 가진 힘이 필요한 자들은 그 힘을 빌려주기만 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내 사람이 되어 준다.
그게 목적인 사람들도 많았다.
오로지 그게 목적인 사람들.
하지만 내가 가진 힘보다 나란 사람 자체에 더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들이 뭘 원하는지를 내가 알아내야만 한다.
그래야 내 사람이 되어 주니까.
지금 하늘이의 눈빛이 딱 그랬다.
내게 뭔가를 바라고 있는 게 아니다.
당연한 거겠지.
태산이의 미래금융은 현재 스너프 건으로 재경 그룹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명확해진 상태 아닌가.
소파에 등을 깊게 기댔다.
그리고 반쯤 남아 있던 아이스커피를 얼음만 남겨 놓고 모두 빨아 먹은 후 하늘이에게 말했다.
“고맙네.”
“고마워? 뭐가?”
“생각거리를 하나 줄여 줘서.”
난 짧게 대답을 한 후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어제 네가 안 된다고 해서 적당한 영상 투자사를 서치하고 있던 중이었어. 나는 방법을 모르니까 직접 투자를 할 순 없고, 할 수 있다고 해도 요즘 사람들이 어디 보통 똑똑해? 괜히 역효과가 날 거 같았거든.”
“투자사를 서치하고 있었다고?”
“대충 계산기 두들겨 보니까 답이 나오는 투자던데, 뭐. 답이 나와 있는데 못 할 이유 뭐가 있어? 편당 제작비 5억 잡고, 12부작이면 60억. 현재 살고 있는 집 팔고, 장난감처럼 집에 전시돼 있는 차 다 팔아 버리면, 그것만 가지고도 내 명의로 들어와 있는 주식, 채권, 여타 부동산까지는 건드릴 필요 없이 뒤에서 여유 있게 투자를 해 줄 수 있겠다 싶었어.”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 이유가 뭐야?”
“너는 이유, 명분… 그런 게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지?”
“뭐?”
“이유와 명분을 가지고 뭔가를 시작하면, 그 끝은 잘돼 봤자 그 이유와 명분을 충족시키는 거 밖에 안 돼. 반대로 시작을 해 놓고 거기에서 이유와 명분을 갖다 붙이기 시작하면, 그 일엔 한계가 없어지는 거야.”
뭐가 저렇게 분할까?
도대체 뭐가 분해서 저런 눈빛을 만들어 내는 걸까?
날 쳐다보는 하늘이의 두 눈에 담긴 분함.
그 분함이 나로 하여금 하늘이를 궁금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빠 말은 투자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작품? 아니? 난 그걸 뭐라고 해? 시나리오? 대본? 그런 것도 못 봤어.”
“그런데?”
“그 60억으로 내가 채서린이에게 계속 느끼고 있어야 할 미안함을 털어 낼 수 있는 거라면, 내 기준에선 이미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투자 가치가 있는 거야.”
“…….”
“정말 앞으로 더는 채서린이랑 직접적으로 안 엮이고 싶었는데, 네가 그 친구를 만나서 그 친구 통해 내가 기억을 잃었단 이야기를 듣고 왔다니, 어쩔 수 없이 또 통화를 한 번 해야겠네. 그런데도 고맙다. 그 통화 한 번이면 앞으로는 진짜 채서린이에 대한 모든 부담감을 다 털어 낼 수 있게 생겼어.”
“미안함 한 번 털어 내는 데 60억을 태운다고? 그것도 앞으로 더는 안 엮이고 싶다는 상대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 너는 손을 참 많이 타는 아이겠구나.
싹이 전혀 안 보인다면 포기라도 하겠는데, 가진 재능에 비해 의지와 욕심이 굉장한 녀석이네.
그래, 그거라도 가지고 있는 게 어딘가.
손은 많이 가게 생겼지만, 그래도 잘만 가꾸면 나름의 꽃은 피울 수 있겠다.
“어떤 드라마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설마하니 지금의 채서린이가 그 작품을 설렁설렁 찍겠어?”
말이 안 되지.
그쪽 업계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지금의 채서린이라면 배수의 진을 치고 작품에 집중하겠지.
채서린 혼자만 그러는 게 아니라, 투자가 막혀 작품을 펼칠 기회를 놓친 작가와 연출, 다른 출연 배우들 모두 다시 찾아온 기회 앞에 형체 없는 초능력까지 다 쥐어 짜낼 거다.
“네 말대로 아무런 배경 없이 혼자 힘으로 320억짜리 자가 건물을 가지고 있는 애야. 근성 하나만 놓고 보면 월급쟁이 투자사 직원들이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종합한 평가로 가늠할 수 있는 애가 아니라는 뜻이야. 그런 애한테 60억 투자해서 원금 회수 못 할까. 못해도 크게 상관은 없고. 한 번도 안 해 본 드라마 투자라는 걸 난 60억만 들여서 경험해 본 거 아냐. 그거면 충분하지. 투자에 대한 이유와 명분은 그렇게 내 맘 편하게 갖다 붙이면 되는 거야.”
“…….”
“아무튼, 고맙다. 그럼 해당 드라마 투자는 네가 진행을 해 주는 거로 알고 있을게.”
“폰을 잠깐 보자고 했어.”
“무슨 폰? 채서린한테?”
“응.”
“왜?”
“어제 오빠가 말했던 그 절실함을 정말 채서린이 가지고 있는지 확인을 해 보고 싶었거든.”
“참 얄궂네. 왜 그랬냐, 격 떨어지게….”
“그 정도 확인도 안 해 보고 한 번 엎어진 투자를 되살리기엔 내가 책임져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잖아.”
“그래서?”
“보여 주더라. 솔직히 안 보여 줄 줄 알았어. 안 보여 주길 바랐어. 불쾌감을 드러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길 바랐어. 채서린이잖아. 그런데 순순히 보여 주더라.”
녀석의 눈빛이 바뀌고 있었다.
“어제 오빠가 한 말이 맞았다는 거지. 채서린은 정말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있더라. 좋아하는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다 내려놓고 포기를 할 수 있을 만큼.”
테스트를 했던 거다?
“오빠 부탁 때문이 아니라, 나도 그 의지를 확인하고 나니까, 투자를 강행해 보고 싶어졌어. 오빠 부탁 때문이 아니라.”
내 부탁 때문이 아니라는 걸 재차 확인시키는 하늘이었다.
쓸데없는 자존심은….
“뭐든.”
“그런데 그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오빠 상태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됐어. 진짜 채서린 말고는 아무도 몰라?”
“너도 알잖아, 이젠.”
“가족들도 몰라?”
“말 안 했어.”
“숨길 이유가 없는 내용일 텐데, 그걸 왜 숨기고 있어?”
“숨겨? 그런 적은 없는데?”
“숨긴 적이 없다?”
“내가 언제 숨겼어? 나는 그냥 말을 안 했을 뿐이야.”
“그게 숨긴 거지.”
“아니지. 다들 너처럼 그래. 나에게 큰 관심이 없어, 사람들이. 내가 치는 사고에나 관심을 가지지, 나란 사람 자체엔… 이상하게 가족들도 큰 관심이 없는 거 같더라. 네 할아버지처럼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 나한테 딱히 그 정도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은 없더라고.”
“…….”
“그리고 내가 왜 날 숨겨? 뭐가 무서워서? 무서워서 숨긴 게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 말을 안 했던 거뿐이야. 그래도 살아지더라고.”
난 다시 한번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가 봐야 할 거 같다. 자리 너무 오래 비우면 또 뒤에서 말 나와. 뭐 아까 확인할 거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 정도면 확인 다 한 건가?”
“흠… 왜 기억도 못 하는 요란다 일에 나한테 사과를 했어?”
“말했잖아. 귀찮았다고.”
하늘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귀찮은 게 싫었고, 넌 어떻게든 내가 네 앞에서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고. 둘 다를 충족시킬 수 있는 건데, 미안하다 한마디 하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걸 안 해? 너 하는 거 보니까, 뭔지는 몰라도 내가 잘못을 했겠더라고.”
“궁금하지도 않았어?”
“뭐가? 요란다 그 친구 관한 내용?”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