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95)
뭐라고 대답을 해 줘야 될까?
“궁금한데, 알고 싶지는 않아.”
“무슨 그런 대답이 있어?”
“더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한테 실망을 하고 싶지가 않거든.”
“…….”
“충분히 했어. 너한테는 미안한 말인데, 그러니까 더는 내 앞에서 그 이야기 안 하면 안 되냐?”
“이젠 할 이유가 없지.”
“그렇지. 넌 그 이유가 참 중요한 사람이지. 이럴 땐 또 편하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후 나처럼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으며 하늘이가 물었다.
“오빠 원래 이런 성격이었어?”
“나는 원래 이랬을 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 눈엔 그간 어떻게 보였는지까지는 알 방법이 없네.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별 관심도 없고. 나 이제 진짜 올라가 봐야겠다. 더 확인할 거 있음 마치고 보자.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아니, 오늘은 아니야. 그 투자 건은 내가 할아버지한테 직접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아.”
“뭘 또 그만한 투자 가지고 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을 귀찮게 만들어?”
“어쨌든 오빠 부탁 때문에 시작된 일이잖아. 오빠 이름만 팔면 금방 컨펌 떨어지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사무실로 복귀해 중간에 물려 있던 미팅을 정리하고 채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늘이 만났다며?”
―오빠 만나서 확인할 게 있어서 간다던데, 벌써 헤어진 모양이야?
“지금부터 너는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새로 들어갈 드라마 준비만 열심히 해.”
―고마워. 오빠 전화가 올 거 같긴 했어. 전화가 오면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해 봤는데, 고맙다는 말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더라.
“그 정도 인사가 딱 적당해.”
웃는 소리가 들렸다.
크게 웃는 거 같지는 않고 가볍게 웃음을 흘리는 소리.
그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채서린이 말했다.
―나도 몰랐는데, 있잖아. 나 그동안 오빠 좋아했네.
“나도 그랬겠지?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그래서 너한테 고마운 거야. 그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여전히 기억이 안 나지만, 나한테도 솔직한 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옆에 있었다는 사실에 말이야.”
―장 팀장님이 자기네 할아버지랑 오빠네 할아버지 사이에 약속 비슷한 게 있었다면서 아마 두 사람의 관계가 진지하게 발전될 거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 듣는 순간 뭔가 모르게 가슴이 허해지는 기분이었어.
“…….”
―오해는 하지 말고. 그 덕에 그동안 내가 오빠를 아무 감정 없이 만났던 게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다행이란 말을 하는 거니까. 어느 순간 내가 참 불쌍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더라고. 이번 일 겪으면서. 진짜 나란 사람은 이 세상에 없고 난 채서린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채서린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사람.
“채서린이 본명이 아냐?”
―하하하… 아… 웃긴다. 몰랐으면 계속 앞으로도 그냥 날 채서린으로 알고 있어. 이제 진짜 앞으로 우린 어떻게든 마주칠 일 없는 거지?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전화 끊고 이젠 서로 연락처 다 지우자. 톡도 지우고.
“그렇게 하자.”
―오빠를 좋아했어. 지금 이 똑 부러지는 손정훈이 아니라, 허세 가득하고, 자격지심에 똘똘 뭉쳐져 있던 날 닮은 오빠를.
“…….”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의 손정훈이 기억하지 못하는 손정훈 역시 누군가에겐 충분히 필요하고 괜찮은 사람이었어. 혹시라도 오빠 전화가 오면 작별 인사로 이 말은 꼭 해 주고 싶더라.
“고맙다. 힘이 되네.”
―잘 지내.
“너도.”
―그럼 이번엔 진짜 안녕.
* * *
더 좋아하는 게 많이 생기셨거든
하늘이는 할아버지 앞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퇴근이 이렇게 일러?”
“좀 일찍 왔어요. 할아버지한테 확인받을 내용이 있어서.”
“회사 일이냐?”
“네.”
“그걸 왜 나한테 확인을 받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책상다리로 고쳐 앉으며 장 회장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하늘이가 이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어제 정훈이 오빠를 만났어요. 지금도 만나고 오는 길이고.”
장 회장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어제는 정훈이 오빠가 만나자고 했고, 오늘은 제가 회사 앞까지 찾아갔어요.”
“내가 준 모직 지분에 관한 내용으로?”
“아니요. 제가 하고 있는 일 쪽 영상 투자 관련된 내용으로요.”
“그 내용으로 지금 정훈이하고 네가 무슨 나눌 이야기가 있어?”
하늘이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일전에 한 번 말씀드렸잖아요. 정훈이 오빠하고 스캔들 났던 배우가 한 명 있었다고.”
“나도 아는 내용이라고 했잖아.”
“제가 잡고 있던 투자 내용에 그 배우를 주연으로 하는 드라마가 하나 있었어요. 철회는 됐지만.”
실수를 만들어 내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는 녀석이다.
장 회장은 하늘이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평소 가지고 있던 조심스러움보다, 스스로의 확신을 확인받고자 하는 강한 열망 같은 게 들어 있는 손녀의 모습에 묘한 이질감 같은 걸 느끼기 시작했다.
“어제 정훈이 오빠가 절 보자고 해서 나갔는데, 저한테 그 드라마에 투자를 다시 해 주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흠….”
“비즈니스적으로는 절대 담으면 안 되는 투자인 거 같은데,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어요.”
“그래서?”
“안 된다고 해 놓고 오늘 그 배우 소속사를 찾아갔어요. 문제는 여기에서 나와요.”
“무슨 문제?”
“여전히 리스크가 큰데, 저도 모르게 투자를 재검토해 보겠다 약속을 해 버렸어요.”
“왜?”
“그걸 저도 지금 모르겠어요.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혼날 각오 하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상황만 보면 투자를 하면 안 되는 게 맞는데, 사람만 보면 해도 되는 거 같아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요?”
천천히 목근육을 풀다가,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며 장 회장이 말했다.
“혼날 각오를 하고 있다는 건 핑계고, 그런 즉흥적인 결정을 한 거에 대해 한 번만 눈감아 달란 소리로 들리네.”
“더 정확하게는 제가 왜 그런 즉흥적인 결정을 하게 된 건지, 그 이유를 할아버지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요.”
“감이겠지.”
“감이요?”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건질 게 있을 거 같다는 감. 그런 게 너도 이젠 생기는 모양이다.”
“위험한 거죠, 그거?”
“투자라는 건 원래 위험한 거다. 그 위험을 극복하는 게 투자사가 해야 하는 일인 거고.”
“…….”
“뭐든 건질 게 잃을 거보다 크다 싶으면 해 보는 게 투자지. 바꿔 말해서 건질 수 있는 게 잃을 거보다 크단 확신이 서지 않을 땐 해선 안 되는 게 투자이기도 하고.”
“확신….”
“그런 게 섰냐?”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그렇다고 하늘이가 대답했다.
“어떤?”
“그걸 모르겠어요. 확신은 섰는데, 그 확신의 근거를 잘 모르겠어요.”
“혹시 정훈이 때문이냐?”
“정훈이 오빠요?”
“사람이 확신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걸까요?”
하늘이는 속으로 그렇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해 주겠냐?”
“그런 거 같아요. 정훈이 오빠가….”
잠시 말을 끊어 놓고 하늘이는 생각을 정리했다.
“왜 그런 확신이 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정훈이 오빠가 저한테 손해가 갈 만한 일을 부탁하지는 않았을 거란 확신 비슷한 게 생겨 버렸어요.”
말을 해 놓고 보니까 스스로 더 명확해지는 하늘이었다.
“그렇잖아요. 그 정도 투자는 자기가 직접 할 수도 있는 걸 텐데, 그걸 저한테 부탁을 한다는 거 자체가 미래기획이 손해를 볼 투자는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그놈이 수가 많아. 그놈이라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계산이 있을 거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생각을 하세요?”
“그렇게 생각을 해.”
“왜요?”
“우린 이제 그런 걸 신뢰, 믿음이라고 하지.”
“그런 게 벌써 생길 수가 없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조금만 더 명쾌해지고 싶어진 하늘이었다.
“장기 몇 판 두고 명절에 식사하면서 술 한잔 같이했다고 그런 게 생길 순 없는 거 아니에요?”
“작년에 안산 공장에서 노조 터졌다고 했을 때, 이번엔 로스가 꽤 크게 나겠다 생각을 했어. 남 사장이 고생깨나 하겠다 싶었지.”
“…….”
“근데 그걸 정훈이 놈이 해결을 하는 중이라고 하더구나. 정신이 나갔냐고 물었어. 그런데 남 사장이 지금 네게 필요한 확신이라는 걸 가지고 내게 조금만 지켜보자고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 사장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런 무책임한 입장을 내게 보일 친구는 아니잖아.”
“그렇죠.”
“해결을 하더구나. 그것도 아주 쉽게. 그런데 이번엔 20년 넘게 거리를 두고 있던 손 회장한테서 연락이 와. 집으로 찾아와서 그동안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어 죄송하다고 나한테 고개를 숙이고 큰절을 해.”
“…….”
“너도 알다시피 스너프는 정훈이 놈 기획이야. 그 스너프로 이 할애비와 손 회장을 다시 붙여 놨어. 아예 재경과 우리 미래금융을 단단하게 붙여 놨지. 그런 놈한테 계산이 없을 수가 있겠어? 이런 게 신뢰인 거지, 믿음인 거고.”
하늘이의 머릿속으로는 정리되지 않은 손정훈에 관한 키워드들이 두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숫자를 보는 놈이 아니야, 그놈이.”
“그럼요?”
“사람을 보고 상황을 볼 줄 아는 놈이야.”
“그걸 할아버지가 어떻게 아세요?”
“숫자만 보고 돈만 셀 줄 아는 놈이었음 명절이라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해외 지사 직원들 챙기겠다고 직접 파리까지 날아갔겠냐?”
“하지만 그건….”
“사람이 있어야 상황이 생기고, 상황이 생겨야 돈이 만들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놈이란 소리지.”
“…….”
“넌 아직 그게 무슨 뜻인지 머리로만 이해를 하고 가슴으론 느끼지를 못하지?”
“…….”
“그런데 그게 그놈한테는 당연한 거야.”
“어째서요?”
“회장님의 손자니까.”
하늘이는 말문이 막혔다.
그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할아버지의 입에서 이런 허무맹랑한 대답이 나올 수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을 못 해 봤던 하늘이었다.
“손중길의 손자야. 생긴 건 외탁을 했지만, 눈빛과 기질은 제 할아버지를 빼다 박아 놨어.”
“…그래요?”
“내가 어디 장기가 두고 싶어 그놈을 매주 집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거겠어?”
하늘이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봐도 봐도 신기한 거야. 어쩜 저렇게 제 놈은 실제로 만나지도 못했던 제 할아버지를 말투까지 그대로 빼다 닮을 수 있는 건지. 식성까지도 똑같아. 장기 둘 때 하는 사소한 버릇, 손짓까지도.”
장 회장은 자기 앞에서 여전히 정훈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손녀를 지긋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말할 때 보면 말을 툭툭 내뱉는 거 같잖아? 그거 회장님이 그러셨어. 그 자리에선 바로 이해가 잘 안 가던 내용들이 집에 와서 곰곰이 되씹어 보면 이해가 될 때가 많았지. 그 녀석이 날 상대로 그런 말투를 써. 재밌지 않아?”
“그분은 도대체 실제로 어떤 분이셨어요?”
“말이 안 되는 분이셨지. 거짓말 같은 분이셨어. 괜히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경영인이라고 손꼽히는 정주형 회장님이 자신의 자서전에 우리 손 회장님이 10년만 더 사셨음 대한민국의 경제가 30년은 앞서 달리고 있었을 거라고 쓰셨던 게 아니야.”
“…….”
“정 회장님이 실없는 소리를 하시는 분이 아니거든. 이 할애비 역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고. 사업을 놀이처럼 하시는 분이셨다.”
“놀이요?”
“즐기셨다는 거야. 몇 날 며칠 날을 새우건, 전날 무슨 과음을 얼마나 했건 그런 거 상관없이 항상 눈이 반짝반짝해서 출근을 하셨지.”
“그야 자기 사업 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은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런 눈이 아니라, 회사에 출근을 하면 항상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믿는 분이셨다.”
“…….”
“사업을 힘들게 하지 않으셨다는 거야. 마이너스가 나면 왜 마이너스가 나는지, 그걸 알아보고 확인하는 거 자체를 너무 재미있어하셨어.”
“그게… 말이 돼요?”
손녀의 어이없어하는 모습에 장 회장은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