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96)
“그러니 보통 분이 아니신 거지. 사업에서 아무리 마이너스가 나도, 내 직원들 고용에만 문제가 안 생기면 아무 문제가 없는 분이셨다.”
“아….”
“내 직원만 안 다치면 되는 분이셨다고.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떤… 일화요?”
“돌아가시기 1년 전이었어. 그땐 췌장암이 발견되기도 전이었고, 건강상 문제가 있다는 게 겉으로 드러나기도 전이셨는데, 하루는 그룹 임원들을 다 불러 모으셨어.”
“…….”
“그 자리에서 임원들, 사장단한테 숙제를 내주셨지.”
“무슨 숙제요?”
“어떤 숙제였을 거 같냐?”
하늘이는 대답을 하기 전 그 당시의 상황이 궁금했다.
“회사 경영에 문제가 있는 상황이었나요?”
“그 큰 그룹이 움직이는 데 경영에 문제가 없는 날이 있을 수 있겠어?”
“그럼, 다른 큰 이슈 같은 거라도 있었나요?”
“그렇지도 않았어.”
“그럼 모르겠어요. 어떤 숙제를 내주셨는데요?”
“재경의 전 직원이 과장만 달면 그 위치가 어디에 있든 자기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을 수 있게 해 주고 싶은데, 그 방법을 찾아오라는 거였어.”
“헐….”
“그 말씀이 무슨 뜻이었겠어?”
“그만큼 월급을 올려 주란 뜻 아니었어요.”
“그때 이미 재경은 대한민국 대기업 중에선 직원 월급이 가장 높은 기업이었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때가 있었으니, 지금이 있는 거지. 그리고 재경이 있었기에, 현재 대한민국 대기업 평균 연봉이 이 정도 선까지 올라온 거고.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임원들, 사장단에게 그 숙제를 내주시고 1년도 안 지나 돌아가셨어. 숙제만 내주시고, 검사는 안 해 주신 거지.”
“…….”
“그러니 그 검사를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던 회장님이 10년만 더 사셨다면, 재경 그룹이 지금쯤 어디까지 올라가 있었겠어? 그런 분이셨다, 그분이. 그리고 난 요즘 정훈이 그놈과 장기를 두다 보면, 나도 모르게 회장님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기분이 들어. 달라.”
“달라요? 뭐가요?”
“똑똑하다고 평가받고 있는 놈들, 특별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놈들… 그런 놈들을 그간 많이 봐 왔고, 많이 데리고 일을 해 봤지만, 그런 놈들이 가지고 있는 기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걸 정훈이 그놈이 가지고 있어. 자기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겠지.”
하늘이가 물었다.
“그분도 혹시 뭐… 여자관계가 복잡하셨다거나 그랬어요?”
“회장님이?”
“…네.”
“왜? 정훈이 놈이 여자 관계가 복잡한 모양이지?”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회장님도 여자를 싫어하고 그런 분은 아니셨어.”
얼굴빛이 어두워지는 손녀 모습을 바라보며 장 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여자 좋아하는 게 어디 문제인가. 가정을 꾸리고도 그런다면 문제가 있는 거겠지만, 회장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다.”
“…그래요?”
“더 좋아하는 게 많이 생기셨거든.”
“더 좋아하는 거요?”
“결혼과 동시에 사업이 불어났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사업이셨어. 재미난 게 널려 있는데, 다른 데 눈을 돌릴 여유가 있으셨겠냐?”
“…….”
“정훈이 놈도 그럴 거다.”
“피… 그걸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아요?”
“매주 이 집에 찾아오는 거 보면 알 수 있지. 지금 그놈한테는 여기가 재미가 있는 거야. 그나마 사업적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까.”
“…….”
“그래서 나도 요즘 그놈 때문에 즐겁다.”
크게 숨을 몰아쉰 뒤 하늘이가 부탁했다.
“할아버지.”
“왜?”
“일요일은 저도 쉬어야 돼요.”
“……?”
“앞으로는 정훈이 오빠 일요일 말고 토요일에 부르시면 안 돼요?”
“허허허….”
“같이 따로 나가서 밥을 먹든, 술을 먹든… 저도 좀 옆에서 지켜볼 시간이 만들어져야 지금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그 확신이라는 게 생길 거 아니에요.”
수줍게 몸을 움츠리는 손녀의 모습에 장 회장은 장난기가 동했다.
“그놈 참… 왜? 정훈이 놈은 생각이 있다더냐?”
그 말에 하늘이는 두 눈을 크게 끔뻑거리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건 제가 먼저 확신을 가진 후에 제가 알아서 할게요.”
* * *
뜯으세요
“‘퍼스펙티브’요?”
전략기획팀 강인성 과장으로부터 윤현정 팀장이 총괄을 맡고 있는 골프 웨어 브랜드의 이름이 나왔다는 소릴 들었다.
“네. 저 개인적으로도 중성적인 느낌이 강조되는 네이밍이라 현재 신상품 개발팀에서 준비 중인 콘셉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이 듭니다. 과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퍼스펙티브, 퍼스펙티브… 묘하네요.”
솔직한 느낌이었다.
한 번에 뭔가가 팍! 하고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맛은 없는데, 몇 번 소리 내어 발음하다 보니 입에는 착! 하고 감기는 느낌이다.
“나쁘지는 않은데, 네이밍이 좀 긴 거 같단 생각은 안 드세요?”
강 과장의 반응이 재밌었다.
“전혀 길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일부러 브랜드 길이를 맞췄나 싶던데요?”
“일부러요?”
“현재 골프 웨어 베스트 브랜드들을 보면, 공교롭게도 네이밍이 다 다섯 음절에서 여섯 음절 사이에서 끝이 납니다. 까스텔바작, 와이드앵글, 파리게이츠. 여기에서 타이틀리스트나 제이린드버그 같은 경우는 음절이 길어지는 대신 약자를 쓰기도 하죠.”
듣고 보니 그렇네.
퍼스펙티브….
아직은 낯설어서 그런 거겠지?
하긴.
한 번에 확! 하고 가슴에 박힐 필요가 있을까.
의류 브랜드라는 건 결국 시각 싸움인데.
“그리고 브랜드로 표현할 수 있는 콘셉트가 다양해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요?”
“저도 처음 네이밍을 받고 네이밍 프로세스를 확인했는데, 관점과 시각, 그리고 균형감과 원근법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였습니다. 골프와 아주 잘 어울리는 단어 같지 않습니까?”
“과장님은 퍼스펙티브에 꽂히셨나 보네.”
“네, 저는 ATM 쪽에서 좋은 보기를 올려 준 거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ATM 쪽에서 만든 네이밍이에요?”
“아닙니다. 윤 팀장이 만든 브랜드 콘셉트를 들고 외주 브랜드 네이밍 디자인 업체 6군데를 통해 총 12개의 이름을 받았고, 그중에서 최종 선택된 네이밍입니다. 기획 본부장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기획 본부장님이 저한테 과장님 생각부터 여쭤보고 다시 이야기를 하자고 하네요.”
다들 몸을 사린다, 이거지?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내가 만든 기획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어찌 조심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선 귀에 들어오는 정도는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나쁘지 않다….”
“로고 디자인이 어떻게 뽑히는지를 먼저 봐야 할 거 같아요. 눈에 들어오는 게 중요하지, 귀에 들어오는 건 그다음 일 아니겠어요.”
“네, 참고해서 기획 본부장 쪽으로 전달하겠습니다.”
어느새 새 브랜드 론칭 발표가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영업부 연 부장님하고 하기로 한 식사 자리는 다 준비된 거죠?”
“네. 6시 반까지 준비해 달라고 예약해 놨습니다.”
확실히 사람 하나를 곁에 두고 움직이는 것과 혼자 움직이는 건 천지 차이다.
강 과장이 많은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김 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10분 정도 먼저 퇴근을 해서 강 과장의 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연규호 영업부장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와 미리 예약해 둔 방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내가 직접 나서서 앞으로 우리 재경모직의 사업 범위가 이렇게까지 넓어질 겁니다… 하는 걸 보여 줄 위치가 아니다 보니, 번거롭지만 이렇게 부서장들과 사적인 자리로 위장한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번거롭다뿐이지, 귀찮지는 않다.
오히려 일선 계열의 부서장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현장의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이 귀하게 여겨졌다.
지금이니까 그나마 부서장들이 나와의 시간을 어색해하는 것이지,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 내가 공식적으로 더 큰 그림을 그려도 되는 자리에 가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일선 현장의 부서장들은 날 어색해하는 게 아니라 어려워하고 무서워하지 않겠나.
값진 시간들이다.
“ATM 쪽에서 시니어즈 마케팅을 참 잘하고 있는 거 같아요. 매출이 반등하고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워낙 기본기가 탄탄한 브랜드니까요. 모델 초이스도 잘된 거 같고, 올해도 역시나 시니어즈의 SS컬렉션이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디자인이 잘 뽑혔습니다.”
“기존 동명물산에서 넘어온 영업팀 사람들은 영업부 안에서 흡수가 잘되고 있습니까?”
“서로 존중할 건 존중하고, 또 의견을 조율할 건 조율해 가면서 그렇게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현재 시니어즈는 한 과장인가요?”
“한세준 과장 말씀이십니까?”
“맞아요. 그분이 영업을 책임지고 있죠?”
“네.”
“해외 영업은요?”
“그건 스마일 스쿨 해외영업팀이 병행을 하고 있습니다.”
시니어즈의 기존 해외영업팀 팀장은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 않고 다른 회사로 갔다.
“교복하고는 장르가 아예 다른데 괜찮겠습니까?”
“최대한 해외 영업이 가능한 인원을 외부에서 끌어오긴 해야 합니다.”
“그런 내용이 있으면, 빨리빨리 인사과로 요청서를 넣어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시니어즈 건뿐만 아니라 새 브랜드 론칭에 맞추려면 경력직 추가 인원이 많이 필요하실 텐데, 아직 영업부 쪽에선 아무런 요청이 안 들어와서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본 겁니다. 술도 한잔하면서 편하게 이야기도 나눌까 해서요.”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현재 영업부에 해외 파견 근무가 가능한 인원이 얼마나 됩니까?”
“해외 파견 근무요? 생뚜앙 지사 근무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기본적으로 영어가 되는 직원이….”
“많지 않죠?”
“네.”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는 내용.
하지만 연 부장에게 영업부의 맨파워 현주소를 알려 주기엔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했다.
“올해 상반기 공채도 작년 하반기 공채와 똑같은 부서별 공채로 이뤄질 겁니다. 사실 공채라고 할 수도 없는 거죠. 보니까 이제 대한민국에서 공채라는 개념 자체도 점점 사라지는 추세인 거 같고.”
“…네.”
“인력 충원 수를 현재 부장님께서 생각하고 계신 것보다 10명 정도를 높여서 인사부로 요청해 주세요.”
“10명씩이나요?”
“시니어즈도 있고, 곧 새 브랜드도 론칭이 됩니다. 계속 우리 자체 브랜드를 쌓아 나가야죠. 해외영업팀을 더 크게 보강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해외 파견 영업 직원도 준비를 해 주셔야 하고요.”
“파견 영업 직원은 왜….”
“고성표 부장님이 현재 파리에 넘어가 계시잖아요.”
“네.”
“해외 지사 건물 매입을 준비 중에 계세요. 곧 이사 준비를 시작할 거예요. 우리 브랜드가 생겼는데, 또 계속 만들어질 건데 우리도 남의 해외 브랜드 받아 와 대신 팔아 주는 것만 할 게 아니라, 해외 지사 통해서 가져가 팔 수 있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강 과장이 말없이 나와 연 부장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우리 재경모직은 언제쯤 KS 인터내셔널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KS 인터내셔널이요?”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아뇨, 놀란 게 아니라 워낙 뜬금없이 그쪽 이름을 말씀하셔서요.”
“생각은 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
“만약 아직 그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없으시다면,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조금씩 해 보시길 부탁드립니다.”
“…….”
“차준영 대리는 요즘 어떤가요?”
“차 대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