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99)
자기 술잔은 나더러 채워 보란 뜻 같은데··· 이거 일부러 내 잔을 넘치게 따른 거 아냐?
받은 술잔은 내려놓으며 하늘이가 말했다.
“이렇게까지 속을 보여 주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을 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거 상당히 격 떨어져 보인다? 촌스러워 보여. 특히 이런 내용을 앞에 놓고 피곤하게 굴면 말이야.”
“모르는데, 아는 척을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모를 수가 있나. 그간 장기 두러 우리 집에 몇 번이나 와 놓고. 설마 지금 내 앞에서 우리 할아버지, 우리 집안 상대로 간 보는 거야?”
“너는 회사 일 하는 동안, 절대 앞에 나서서 협상 같은 거 하지 마라. 너는 협상이 아니라 분쟁을 하겠다.”
“뭐?”
그럼에도 술맛은 유난히 좋았다.
모처럼 시끄럽지 않은 분위기, 대화 상대를 앞에 두고 편하게 술잔을 비워서일까?
“난 모르는 척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오빠 우리 집 올 때마다 내가 계속 집에 있는 게 우연이겠어?”
“그럴 수 있나.”
“그럼 우리 할아버지 의중은 다 알고 있다는 뜻 아냐?”
“그래서 계속 응하고 있잖아.”
할 말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는 듯 하늘이는 들숨 한 번에 날숨 없이 날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번 회장님 생일 잔칫날에 어른들끼리 뭔가 이야기가 나오시겠지. 그전까지는 회장님 생각을 먼저 전해 들은 입장에서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고. 너도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오빠네 부모님은 알고 계셔?”
“알고 계시지 않을까? 중간에 남 사장도 있고. 내가 주말마다 회장님 만난다는 거 정도는 충분히 알고 계실 거 같은데? 그런데도 따로 불러 별말 안 하는 걸로 봐선 너네 할아버지 통해서 직접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기다리고 계시는 걸 테고.”
“······.”
“보통 기업가끼리의 연 맺는 건 다 그렇게 하지 않나? 우리 재경 쪽에서 먼저 사업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아 준 건 미래금융이야. 여기에서 관계를 더 발전시켜 보자고 손을 내미는 건 너희 쪽에서 해야지, 우리 쪽에서 하면 그림이 이상해지지. 스너프 건으로 너무 매달리는 거 같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이게 중요한 부분이다.
“네 마음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내 마음?”
“부담 주고 싶지도 않고, 네가 강요당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아.”
“오빠는 괜찮고?”
“솔직하게 말해도 돼?”
“지금까지 나만 솔직했던 거야?”
“이게 아니다 싶었음 주말마다 부른다고 계속 그렇게 찾아갔을까. 그렇게 노골적으로 힌트를 주시는데.”
“······.”
“그렇다고 그게 목적이었다는 말은 절대 아니야. 싫었다면 안 갔을 거란 말을 하는 거지. 재경 그룹, 그리고 미래금융. 스너프에 지원 들어간 뱅크 시스템은 물론이고, 앞으로 같이 할 수 있는 비즈니스들이 무궁무진하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야. 세상에 가족보다 더 단단하고 항상 서로 실수를 안 만들어 내기 위해 조심해야 하는 관계의 파트너십이 어디에 있겠어?”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네가 나도 모르는 내 바닥을 다 알고 있다는 게 민망하고 부담스럽긴 해도, 네 마음만 괜찮다고 하면 난 재경 그룹과 미래금융이 예전 할아버지 시대처럼 함께 가 보는 거. 나쁘지 않다고 봐.”
“이야, 정말 기름기 쫙 빠진 입장이네.”
“추가할 기름기가 있을 수가 없지. 너한테 나는 더 들킬 것도 없잖아. 나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럼 더 불안할 텐데? 내가 오빠라면 불안해서 같이 못 갈 거 같은데?”
“오히려 지금은 내가 널 기대하고 있는 중이야.”
“기대?”
“채서린 건. 도와주면 고맙겠단 생각 반, 안 도와준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 반이었어. 그걸 네가 도와주더라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너랑 같은 입장에 놓인 다른 여자였으면. 도와주기 쉽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너는 도와주더라고. 날 믿어도 주고. 앞으로 충분히 더 재밌는 것들을 더 많이 같이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거 같단 기대를 하고 있는 중이야.”
“손정훈. 진짜 본바탕 자체가 골 때리는 캐릭터구나? 이 내용에 재미 타령을 하고 있어?”
“그게 제일 중요하지 않겠어? 중간에 서로 실수만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가장 오래 함께 같이 가야 할 파트너가 될 건데, 감정, 이해관계도 중요하겠지만, 그 상대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라면 난 이번엔 같이해서 재미가 있는 사람과 함께 가 보고 싶거든.”
“이번엔?”
아차!
“그동안 여러 가지 선택해 오며 살아왔을 거 아냐. 그중엔 내가 하고 싶은 선택도 있었을 것이고, 강요받은 선택도 있었을 것이고. 이번만큼은 내 선택이라는 말을 하는 거야.”
“나 지금 이거, 오빠가 채서린 건으로 날 테스트했다고 이해하면 되는 거야?”
“그 스캔들 안 터졌음 어쩔 뻔했냐?”
“뭐?”
“아니라고. 나 그렇게까지 돌아이는 아니야. 진짜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었고, 그걸 네가 흔쾌히 도와줘서 나도 놀랐어.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지.”
“무슨 생각?”
“나도 나지만 얘도 정상은 아니구나··· 하는. 다음 날 바로 채서린을 찾아가서 폰까지 확인을 할 줄은 나도 몰랐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피식하고 혼자서만 웃은 후 하늘이가 말했다.
“오빠 혹시 힐링광장 알아?”
“백지훈이 엠시 보는 토크쇼 같은 거 아냐?”
“맞아. 그 프로그램 투자도 우리 미래기획에서 하고 있어.”
“알고 있어. 미래기획 공부하면서 봤어.”
“거기에 다음 주 채서린이 나올 거야.”
“잘했네.”
“그 전에 오빠한테 확인을 받을 게 있어.”
“말해.”
“우리 쪽에서 악녀검사 투자를 하기로 한 이상, 드라마 슈팅 들어가기 전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채서린이 이미지를 좀 빨아 놔야 해.”
“사람한테 이미지를 빤다는 표현은 좀 그런 거 아니야?”
“그런가? 그렇네. 우리 쪽에선 너무나 당연하게 쓰는 표현이라 입에서 그 표현이 너무 막 나갔네.”
“아, 너희 쪽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라면 뭐··· 암튼 그래서?”
먹을 게 이렇게나 푸짐한데, 그중에 물잔을 들어 입을 헹궈 낸 후 하늘이가 말했다.
“악녀검사에 투자를 강행하면서 내가 안아야 할 리스크를 혼자 좀 따져 봤어. 그 스캔들. 증권가 지라시에 오빠 존재까지 다 노출이 된 스캔들이야. 알 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아는 스캔들이라고 봐야겠지?”
“그래, 우리 회사 전략기획팀 과장도 다 알고 있더라.”
“그런데 나는 또 오빠랑 새로운 관계로 발전을 준비 중에 있어. 그런 내가 채서린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악녀검사에 투자를 담당하게 되면, 사람들이 날, 우리 미래금융을 뭐라고 생각할까?”
“글쎄?”
“그냥 내가 그 스캔들의 중심에 있으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대중들이 알게 될 스캔들의 진실은 내가 따로 각색을 조금 했어.”
“···각색?”
“오빠는 채서린과 계산이 다 끝났을지 모르겠지만, 난 이번 투자 건으로 채서린과 계산을 새로 시작해야지.”
“······?”
“세상에 공짜가 어딨니?”
설마 이 녀석이 날 가르치려 드는 건가?
귀엽네.
“오빠도 나한테 빚이 있는 거잖아. 도움은 두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내가 줬어. 그러니 빚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받을 거야. 채서린은 동의를 했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서 해.”
“믿어 줘서 고맙네. 미리 말하지만, 오빠가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야.”
“사람만 안 다친다면 손해 잠깐 보는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
사람만 안 다친다면 뭐든 괜찮다는 내 말에 무슨 트집을 잡을 게 있었을까?
너무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듯한 눈을 하며 날 쳐다보길래, 그 눈빛이 부담스럽다고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하늘이는 내가 그 말을 하기도 전에 알아서 눈빛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다칠 사람 아무도 없어. 실은 다음 주에 채서린 힐링광장에 나올 거란 이 이야기 하려고 보자고 한 거야.”
* * *
사업을 보는 눈과 사람을 보는 눈
토요일 아침.
안사람이 잠들어 있는 산소를 찾았다.
살아생전 그렇게나 좋아했던 수국 생화 한 다발과 곶감 한 접시를 올려놓고 속으로 쑥스러운 고백을 했다.
젊은 손자 몸에 들어와서 주책이란 주책은 다 부리고 앉아 있다 비웃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내가 정훈이 몸에서 이런 경험을 하고 있다 보니, 어쩌면 자네도 지금의 날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 찾아와 본 거라고.
참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르는 남편 만나 30년 넘게 큰소리도 못 내고 속앓이만 했던 그 삶을 어찌 내가 모르겠냐고.
“사람 욕심이 참 끝이 없네. 처음엔 육개장에 소주 한잔 얼큰하게 취해 보고 얼른 이 몸, 정훈이한테 돌려줘야겠단 생각을 했는데··· 이젠 그러고 싶지가 않아졌어. 어떻게 주는지도 모르겠고, 안다 해도 그러고 싶지가 않아.”
손질은 잘되어 있었지만, 괜히 머쓱한 마음에 풀이라도 뽑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 시늉을 해 봤다.
“자네는 내가 말 안 해도 다 알지?”
설마 내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이 꼴을 못 봤다면 모르겠지만, 엉망진창인 회사 꼴을 다 봤는데, 그걸 보고도 어떻게 못 본 척을 하겠어? 혼자 다 짊어지고 있는 홍준이 놈 어깨도 너무 무거워 보이는데, 이걸 어떻게 못 본 척 가만히 있겠냐고.”
무슨 놈의 3월 아침 바람이 이렇게까지 따뜻하단 말인가···.
“다행히 태산이가 만든 회사가 앞으로 우리 재경에 좋은 배경이 되어 줄 수 있을 거 같아. 역시 태산이야. 잘 키워 냈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그래서 그런 거니까, 주책이라고 너무 비웃지는 마. 내가 언제는 자네 앞에서 염치가 있는 사람이었나? 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지 않았냔 말이야.”
해 보고 싶은 것도 많이 생겼고, 그러는 만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들도 너무 명확해졌다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보는 시간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중이고, 자네라면 또 언제나 그랬듯 내 선택을 말없이 뒤에서 믿어 줄 거라 믿네. 부경가 사돈총각들이 내가 없다고 우리 아이들한테 너무 과한 짓을 한 것 같네. 그걸 지켜만 봐야 했던 자네 심정이 어땠을까 싶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내가 어떻게 해 줬는데. 그래서 내가 지금부터 혼꾸멍을 내 줄라니까, 지켜봐.”
이번에도 자네에게 염치가 없을 준비를 하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자네가 마음에 쓰인다 솔직히 고백하고, 그저 멍하니 안사람이 누워있는 자리 옆을 지키고 앉았다.
항상 그랬다.
가겠다 결정을 한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고야 말았다.
중간에 잘못된 길로 든 것 같아 확신이 줄어든 상태에서도 그 끝이 궁금해서 꼭 끝까지 가 보고야 말았다.
그럴 때마다 난 항상 우리 안사람을 옆에 앉혀 놓고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이상하게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것보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내 말이 맞는다고 말해 주는 안사람을 옆에 앉혀 놓고 생각을 정리하면, 그 정리가 한결 쉽게 되었다.
지금도 그랬다.
지금이 그랬다.
과연 지금 내가 가겠다 결정을 한 길이 맞는 길인 건지, 그 확신이 필요했다.
그러다 폰을 꺼내 태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장기 두러 오라는 말씀이 없으시네요?”
―내일 볼 건데, 뭘 또 와. 오늘은 자네 시간 보내.
“회장님이 바쁘신 건 아니고요?”
―내가 바쁠 게 뭐가 있나.
“그럼 가도 됩니까?”
―오는 거야 상관이 없는데, 주말 이틀을 다 이 늙은 사람한테 쓰기엔 아깝지 않나?
“그럴 리가요. 지금 출발하면 1시간 정도 걸릴 거 같은데, 최대한 빨리 도착해 보겠습니다.”
―어딘데?
“저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잠시 왔습니다.”
―거긴 왜?
“그냥요.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조금 나서요.”
―혼자?
“얼추 점심때쯤 도착해질 거 같은데, 혹시 오늘도 가면 점심 얻어먹을 수 있습니까? 하하하.”
―몇 명이 사는 집인데, 밥솥에 한 공기 따로 풀 밥이 없을까. 와.
가는 도중 하늘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내일 다 같이 만날 건데 왜 오냐는 전화였다.
오늘은 자기도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그래서 그냥 편하게 있으라고 했다.
결국 짜증 섞인 투정을 한 다발 토해 놓고 전화를 끊은 하늘이.
도착하기까지 1시간 정도 시간이 걸렸는데, 그사이 자기 딴에는 단장을 하고 있었다.
영석이와, 그의 처도 내가 오늘까지 왜 찾아온 건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으며 날 맞이했다.
괜히 편하게 집에 있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미안함도 잠시, 며칠 전 하늘이가 계산을 하라고 해서 미리 사 둔 시계를 태산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뭐야?”
하늘이도 이 선물을 왜 내일 안 주고 벌써 주는 거냐는 식으로 날 쳐다봤다.
영석이도 같이 있는 자리였다.
“수요일에 하늘이가 잠시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날 보며 인상을 찡그리는 하늘이를 무시하고, 태산이와 영석이에게 말했다.
“회장님 선물을 따로 봐 놓은 게 있는데, 와서 저더러 계산을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뭔가 봤더니, 이 시계였습니다.”
태산이는 그 자리에서 상자를 열어 시계를 확인했다.
“제가 드리는 게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던 거 같습니다.”
태산이가 기분 좋게 웃으며 그 시계를 꺼내 자신의 손목에 채웠다.
“회장님께 어떤 의미의 시계인지,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그 시계가 이 시계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뭔지 아나?”
“네, 이 시계에 관한 내용도 할아버지 일기장에서 봤습니다. 1974년. 재경 그룹이 처음으로 고용 인원 2천 명을 넘기고, 그룹 본사 사옥을 완공했을 때, 전 임원들에게 시계를 하나씩 나눠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할아버지도 똑같은 걸 차셨고요.”
손목에 찬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태산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