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
신마의선-1화(1/500)
신마의선 (1)
어둠이 내려앉은 깊은 새벽.
짙은 안개를 헤치며 험한 산길을 걷는 인영이 있었다.
오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날렵한 이목구비만큼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중년인이었다.
다만 그의 안색은 몹시 창백했다.
찢기고 베여 넝마처럼 변한 무복에, 입가에서는 쉬지 않고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드러난 상처들 역시 하나같이 끔찍했다.
특히 오른쪽 빗장뼈 부근에서 시작된 자상(刺傷)은 가슴을 가로질러 반대편 옆구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허벅지 역시 한 움큼 넘게 살점이 떨어져 나간 상태.
어깨에 깊이 박힌 강전 또한 숨을 쉴 때마다 함께 들썩였다.
그야말로 만신창이.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위중한 부상이었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다문 채 반복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크윽…….”
오래지 않아 중년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여기까지인가.’
실낱같이 이어지던 진기가 결국 끊어졌다.
온몸의 상처들에서 뭉클거리며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내공으로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출혈을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의 얼굴 위로 허탈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곤 무너지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엄습해 오는 아득한 절망.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숨을 몰아쉬던 그때, 희미한 향기 한 줄기가 코끝을 스쳤다.
초악량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간신히 몸을 뒤집었다.
밤하늘 가득한 별을 보며 가는 것도 제법 운치 있는 죽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젠장.’
짙게 깔린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통 뿌옇고 새카말 뿐이다.
‘내 꼴하고 똑같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 것도 그때였다.
동시에 의식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려 해 봤지만 이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정말 마지막이구나……, 응?’
초악량은 최후의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얼굴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열두 살 정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귀여운 얼굴.
거기에 선명한 눈빛이 유독 돋보이는 소년이었다.
소년의 얼굴을 더 살필 겨를도 없이 초악량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초악량이 다시 의식을 회복한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눈을 뜬 초악량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분명 죽었어야 할 자신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그러고 보니 주변 풍경 역시 달라져 있다.
그는 낯선 실내, 그것도 깨끗한 침상에 누워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침상과 가구, 탁자 하나가 전부인 간소한 방이었는데, 벽 한쪽에는 족자가 걸려 있었다.
예술에 문외한인 자신이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유려한 필체의 족자였다.
무심코 몸을 일으키던 초악량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크윽!”
몸을 움직이기 무섭게 전신에 맺혀 있던 고통이 일제히 깨어난 것이다.
진저리 쳐질 만큼 지독하기 짝이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허억……. 허억…….”
두 손으로 벽을 짚은 채 초악량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단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뿐이었는데도 온몸에서 비 오듯 땀이 쏟아졌다.
‘빌어먹을!’
말을 듣지 않는 손발을 억지로 다그쳐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
순간 초악량이 눈을 부릅떴다.
눈 앞에 펼쳐진 경치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깎아지른 듯한 천장 단애가 병풍처럼 에워싼 분지.
절벽에서 떨어진 폭포가 뿌연 물안개를 피워 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폭포 끝에는 연못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투명한 연못이었다.
거기서 시작된 냇물이 분지 한쪽을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었다.
연못 옆에는 이 층짜리 전각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한 폭의 그림처럼 운치가 느껴졌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던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춰 섰다.
손을 가져다 대면 그대로 붉은 물이 묻어 나올 것 같은 진홍색 꽃. 벌판 가득 흐드러진 화홍(花紅)의 파도가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 것도 그때였다.
미풍에 몸을 맡긴 그윽한 향기가 계곡을 금세 가득 메웠다.
‘내가 저기서 쓰러졌었군.’
당시를 떠올린 초악량이 쓴웃음을 머금고 있을 때였다.
“어?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되는데…….”
초악량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
정신을 잃기 직전 봤던 소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은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초악량은 대답 대신 물끄러미 소년을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저요? 전 단악선인데요?”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다.”
단악선이라 자신을 밝힌 소년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를 살려 준 사람이죠.”
“나를 살렸다고? 네가?”
“네. 전 의원이거든요.”
초악량은 당황했다.
참으로 맹랑한 꼬마가 아닐 수 없었다.
아직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어린애가 의원이라니.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서 해요.”
단악선이 재차 채근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니까, 일단 들어가서 누우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단악선이 초악량을 지나쳐 모옥 안으로 들어가 침상을 가리켰다.
그러나 초악량은 선뜻 따르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네가 나를 치료했다는 말이냐?”
경계심 가득한 모습에 단악선이 조용히 웃었다.
“여긴 저 말고 아무도 없거든요. 저 아니면 치료할 사람도 공격할 사람도 없죠. 그러니 어서 들어와 누우세요.”
초악량의 눈썹이 꿈틀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단악선이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픈 사람이요.”
“…….”
초악량은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단악선이 다시 한 번 다그쳤다.
“어서요. 빨리 치료를 이어 가지 않으면 돌이키기 힘들어요. 제가 얼마나 힘들게 살렸는지 아세요?”
초악량이 침음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전의 자신은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았던가? 게다가 단악선의 얼굴에는 그 어떤 사심도 깃들지 않은, 순진한 눈빛이 담겨 있었다.
결국 초악량이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런 그에게 단악선이 물에 적신 헝겊을 건넸다.
“일단 목부터 축이세요. 사흘 만에 깨어나신 거니까.”
의아해하는 초악량에게 단악선이 설명을 이어 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어요. 지금 상태에서 평소처럼 물을 드시면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어요. 그걸 입에 물고 천천히 빨아 드시면 돼요.”
초악량은 말없이 단악선의 지시에 따랐다.
“그럼 시작할게요.”
단악선이 품 안에서 작은 목갑을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각기 다른 크기의 침을 꺼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재질의 침이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침의 손잡이는 특이하게도 상아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침두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
언젠가 들어 본 기억이 떠올랐다.
“선앙침(仙仰針)?”
“어? 아세요?”
단악선의 반문에 초악량은 되려 놀라고 말았다.
“성수신의(聖手神醫)의 신물을 어떻게 네가…….”
“제 아버지세요. 그럼 지금부터 혈을 짚을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악선의 손이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초악량의 몸 곳곳에 침이 박혔다.
“……!”
순식간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걸 느끼며 초악량이 경악했다.
‘마혈과 아혈이 동시에?’
실로 고절한 점혈법이었다.
그러나 이어질 놀라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통이 사라진다!’
들끓던 기혈이 가라앉으며 빠르게 몸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초악량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소년이 정말 성수신의의 아들이라면…….
그리고 그 의술을 이었다면?
‘살 수 있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한 반드시 살려 낸다는 의원이 성수신의다.
‘잠깐?’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성수신의는 오직 정파인만 치료해 왔다.
‘그가 무림에서 사라진 것도 벌써 이십 년인가?’
한때 그를 찾기 위해 무림의 온갖 정보 단체가 강호를 들쑤시고 다녔었다. 천이문을 비롯해 개방과 하오문, 심지어 관부의 육선문까지.
그러나 그의 행적을 찾은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
쑤욱.
어깨 부근이 시원해지며 초악량의 모든 혈도가 풀렸다.
초악량이 탄성을 흘렸다.
“네가 나를 살렸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이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겪었는데 어찌 더 의심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내 다른 의구심이 생겼다.
“왜 날 살린 것이냐?”
단악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의원이 환자를 살리는 것에 이유가 필요한가요?”
“단지…… 그것뿐이더냐?”
초악량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정파인이 아니다.”
“그런가요?”
“내 알기로…….”
초악량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성수신의는 평생 정파 사람들만 치료한 것으로 알고 있다만.”
“아! 아저씨는 사파인이시군요?”
“그렇다.”
“그렇군요.”
단악선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반면 초악량의 눈빛은 싸늘해졌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웃어서 죄송해요.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려워서요.”
웃음을 거둔 단악선이 초약량을 바라봤다.
“전 아버지가 아니잖아요.”
그래도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초악량이었다. 그 모습에 단악선이 입술을 삐죽였다.
“사람 살리는 게 잘못한 일이라고 배우지도 않았고요.”
그리곤 퉁명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하나뿐인 목숨이잖아요. 소중히 여기세요. 아저씨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날 위해 슬퍼해 줄 사람은 없다.”
초악량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요?”
단악선이 씁쓸하게 덧붙였다.
“저는 슬플 거예요. 아저씨가 죽으면.”
단악선이 이번에는 다른 목갑을 꺼냈다.
그 상자를 열자 붉은 빛깔의 침이 모습을 드러냈다. 침의 손잡이가 새카만 흑주목으로 된 침이었다. 손잡이에 새긴 악귀상을 발견한 초악량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마령침(魔靈鍼)!”
단악선이 새삼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것도 알아요?”
“생사마의(生死魔醫)의 신물을 어떻게 몰라보겠느냐?”
성수신의와 더불어 사파 의술의 정점에 선 의원.
그녀 역시 성수신의가 사라진 것과 때를 같이해 모습을 감췄었다. 오직 사파인만 치료한 그녀는 고절한 의술만큼이나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녀가 사라지면서 남긴 말이 아직까지 회자될 정도였다.
―은혜도 모르는 놈들, 죄다 고자나 돼라.
“설마?”
초악량의 물음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어머니세요.”
“신의와 마의가 혼인을 했다고?”
“그러니 지금의 제가 있는 거겠죠?”
어딘가 살짝 삐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의심은 이내 확신이 되었다.
“이번엔 좀 아플 거예요.”
단악선이 마령침을 꽂는 순간.
“커헉!”
초악량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죄송해요. 혈도를 짚는 걸 깜빡했네요.”
그 순간 초악량은 또다시 온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고통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의연했던 그다.
하나 지금의 고통은 그때의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그저 속으로 비명을 삼키는 것뿐.
* * *
사흘 후.
아침에 눈을 뜬 초악량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확실히 몸 상태가 달라져 있었다.
“살아 있구나.”
위태로웠던 고비를 넘긴 것이다.
“신의와 마의의 아들이라니…….”
초악량이 천천히 움직여 모옥을 나섰다.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사흘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기연이 달리 있을까.
죽기 직전 단악선을 만난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이었다.
그렇게 초악량이 모처럼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신마곡 입구로 들어서는 인영이 있었다.
단악선이었다.
“어? 일어나셨어요?”
초악량을 발견한 단악선이 쪼르르 달려왔다.
평소보다 무척 밝은 얼굴이었다.
“이것 보세요, 아저씨!”
단악선이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새하얀 꽃과 아홉 개의 잎사귀를 지닌 풀이었다.
“헤헤. 드디어 찾았네요!”
“기분이 좋은 이유가 그것 때문이더냐?”
단악선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건 기령초라고, 내상에 좋은 약초거든요. 어지간히 안 보이는 녀석인데 운이 좋았어요.”
“설마……, 나 때문에 찾은 것이냐?”
“그럼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돌아서는 단악선을 초악량이 손을 뻗어 붙들었다.
“이건 어쩌다 이런 것이냐?”
긁히고 쓸려 피투성이가 된 단악선의 손을 응시하며 초악량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손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흙투성이였고, 목과 볼에도 상처가 가득했다. 핏물이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처였다.
단악선이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기령초가 좀 험한 곳에서 자라거든요.”
“……!”
초악량은 할 말을 잃었다.
눈앞의 아이는 고작 열두 살.
이 어린아이가 생면부지의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홀로 오른 것이다.
가슴 한편이 저릿했다.
도산검림(刀山劍林)을 누벼 온 수십 성상(星霜).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생각해 보니 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았더구나.”
“뭔데요?”
초악량이 단악선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의 무례를 사과하마.”
단악선이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요. 환자들이 예민한 건 당연하니까요. 특히나 아저씨처럼 죽음 직전에 있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고요.”
단악선이 흔쾌히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
의아해하는 단악선을 향해 초악량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다. 나를 살려 준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