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1)
신마의선-11화(11/500)
신마의선 (11)
향연루(饗宴樓) 사 층에 위치한 특급 연회장.
온갖 산해진미가 그득한 상 앞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대략 사십 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깡마른 외모만큼 날카로운 눈매가 유독 돋보이는 사내였다. 그러나 정작 사내는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만 무료한 표정으로 술잔만 기울이는 중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칠현금을 끌어안은 스무 살 남짓의 기녀였다.
짙은 화장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청초함이 유독 돋보이는 여인.
나른하던 사내의 눈빛이 달라졌다.
날아갈 듯이 대례를 올리는 그녀의 모습에 사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더불어 끈적끈적한 시선이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길고 가느다란 목을 따라 움직이던 눈빛이 도발적으로 솟아오른 가슴에 잠시 멈추나 싶더니, 이내 세류요와 풍만한 둔부를 차례대로 훑어 내렸다.
관능적인 몸매만큼이나 유혹적인 분위기.
그 안에서도 설명하기 힘든 묘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정말 죽이는구나!’
능소밀은 내심 탄성을 터트렸다.
바로 그녀가 이곳 향연루를 찾게 만든 이유였다.
그런 능소밀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인이 슬며시 미소를 베어 물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능소밀은 가슴이 진탕되는 것을 느꼈다.
‘진정 우물(尤物)이로다!’
애써 표정을 숨긴 능소밀이 짧게 헛기침을 터트렸다.
“드디어 오늘로써 네게 백 번째 잔을 받게 되는구나. 백 번을 모두 채우면 함께 밤을 보내겠다던 약조는 아직 유효한 것이겠지?”
능소밀의 말에 기녀, 예월향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물론입니다. 내일이면 소녀 역시 고향으로 내려갈 몸.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쁜 마음으로 대인과 함께하겠습니다.”
예월향이 능소밀 옆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능소밀의 손이 자연스럽게 예월향의 허리를 감쌌다.
“밤은 기니 서두르지 마셔요, 대인.”
사뭇 부끄러운 듯 능소밀의 손을 떠미는 예월향이었다.
하나 이마저도 애간장을 녹이는 교태로 느껴졌다.
그때 예월향이 탄성을 터트렸다.
“아!”
그녀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능소밀 앞에 내밀었다.
“저희 총관이 대인께 이 서찰을 전해 달라 하시더군요.”
“갑자기?”
“어떤 거지 아이가 대인의 함자를 정확히 대며 가져왔다던데요?”
“지금 내 눈에 서찰 따위가 들어올 것 같…….”
능소밀이 말을 맺지 못했다.
서찰에 써져 있는 글씨 때문이었다.
혈(血).
아무것도 없이 휘갈기듯 써진 글자 하나가 전부인 서찰이었는데, 글씨체가 눈에 익었다.
‘이런 씨☓!’
능소밀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분명히 죽었다 들었는데?’
눈에 띄게 굳어진 능소밀의 모습에 예월향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인?”
“하, 이거 미치겠네.”
한참 갈팡질팡하던 능소밀이 이윽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풍류도 좋고 연애도 좋지만 일단 목숨이 먼저인 법이다.
“잠시만 기다려라. 내 금방 돌아오마. 아! 젠장! 거긴 금방 다녀올 거리가 아니잖아?”
접선 장소를 떠올린 능소밀이 욕설을 터트렸다.
잠시 진지하게 서찰을 무시할까 고민했다. 하나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서라. 그 미친 인간이 참아 줄 리가 없는데…….”
일 한번 틀어지면 자신이 운영하는 신소방(新紹房)이 쑥대밭 될 것은 분명하고, 자신 또한 산목숨이 아닐 것이다.
기루를 나선 능소밀이 곧장 경공을 전개했다. 그러나 터져 나오는 울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왜 하필 오늘이냐고!”
그렇게 두 시진을 쉬지 않고 달려 그가 도착한 곳은 난주를 한참 벗어난 폐사찰이었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능소밀이 사찰 안으로 들어섰다.
사찰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고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능소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눈을 뜬 것도 그때였다.
“……!”
능소밀은 소름이 쭉 끼쳤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
그 서늘한 눈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텅 빈 것 같던 사찰이 단숨에 꽉 차 버렸다.
주변의 공간을 완벽하게 지배한 엄청난 중압감.
오직 천하를 발아래 둔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망할!’
능소밀은 암담한 심정에 질끈 눈을 감았다.
마음속 깊은 곳.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특유의 눈빛.
살기를 흘리는 것도, 요란한 기운을 내뿜는 것도 아닌데, 능소밀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죽은 줄 알았던 혈수존자가 분명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 속에서 지워 낼 수 없는, 그만의 눈빛이었다.
능소밀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애써 뿌리쳤다.
그리곤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나 봅니다.”
그렇게 말문을 연 능소밀이 초악량을 유심히 살폈다.
“무림맹 고수들과 동귀어진(同歸於盡) 하셨다는 이야길 들었거든요.”
초악량은 말이 없었다.
반면 능소밀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초악량의 침묵이 불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무려 무림맹이 펼친 천라지망(天羅地網)이다.
그것도 남궁세가의 장로와 소림의 나한당주, 사천당가의 천수암제가 포함된…….
그야말로 무림맹 전체 전력의 삼 할을 갈아 넣은 셈이다.
양패구사(兩敗俱死) 했다는 무림맹의 발표를 믿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초악량에게서는 그 어떤 부상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지금의 존재감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능소밀이 힐끔 관제묘 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동이 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절로 마음이 급해졌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는 초악량의 모습에 능소밀은 애가 탔다.
“혹 무림맹의 십대악인 토벌과 관련된 정보를 묻고자 하십니까?”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능소밀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터.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능소밀이 입을 열었다.
“존자께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으나 저 또한 폐방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이라는 점 부디 해량해 주십시오.”
초악량의 눈치를 살피며 능소밀이 말을 이어 갔다.
“더구나 이번 사안은 무림맹과 관련이 되어 있는 만큼 폐방이 부담해야 하는 위험이 매우 큽니다. 따라서 정보를 제공해 드리기가…….”
그 순간.
초악량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뿐인가?”
“……?”
영문 모를 말에 능소밀이 의아해하는 사이 초악량이 다시 말했다.
“나라면 좀 더 그럴듯한 말을 남길 텐데.”
“예?”
“마지막에 남기는 유언치고는 너무 볼품없어서.”
그 말과 함께 초악량이 하얗게 웃었다.
능소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빌어먹을!’
지금껏 무수한 위기를 넘겨 왔던 무인의 감이 맹렬하게 경종을 울려 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을 에워싼 공기가 급격히 얼어붙나 싶더니, 숨이 멎을 것 같은 위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는 초악량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
능소밀은 그만 아연해졌다.
초악량은 그저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선 채로 덜덜 떨던 능소밀이 그 자리에 엎드렸다.
“살려 주십시오!”
그런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능소밀은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여전히 뒤통수에 날아와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투두둑.
비 오듯 쏟아진 식은땀이 콧날을 타고 흐르다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몇이나 당했지?”
“예?”
반사적으로 반문하던 능소밀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여섯 명입니다!”
눈치 빠른 능소밀의 대처에 초악량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능소밀은 방심할 수 없었다.
눈앞의 상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만 삐끗해도 곧장 황천행이었다.
저 웃음 너머에 더없이 위험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무수히 봐 온 그였다.
능소밀은 무림맹의 십대악인 토벌과 관련해 알고 있는 정보들을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아는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
약 한 시진에 걸친 능소밀의 설명이 끝나자 초악량이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세 명뿐이지?”
그가 언급한 대로라면 무림맹은 십대악인 중 일곱 명을 주살했다고 발표했다.
한데 아직 자신이 살아 있으니 여섯 명이 죽은 셈.
계산이 맞지 않는다. 생존자 한 명이 더 있어야 하는 것이다.
능소밀이 재빨리 대답했다.
“한 명은 무림맹에 투항했습니다.”
능소밀의 대답에 초악량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제외한 십대악인의 생존자는 범계위와 녹림의 총표파자인 악호군, 그리고 칠절마군이라 불리는 노단양뿐이었다.
일단 범계위는 논외.
녹림의 총표파자 역시 아니다.
그 탐욕스러운 놈이 녹림십팔채를 고스란히 무림맹에 갖다 바칠 리 없다.
그렇다면 남는 건 한 사람뿐.
‘칠절마군.’
고집으로 똘똘 뭉친 그가 정파에 투항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능소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직접 파사단(破邪團)를 이끌고 있다더군요.”
무림맹을 떠받치는 네 개의 조직 중 한 곳인 파사단은 적의 잔당을 전문적으로 추적해 소탕하는 추살대(追殺隊)다.
초악량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기를 잠시.
초악량이 능소밀을 바라봤다.
“나는 누구보다 은원이 확실하다.”
꿀꺽.
능소밀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안에 담긴 뜻을 모를 만큼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금일 혈존을 뵌 일은 오직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아니…….”
능소밀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기억에서 아예 지우겠습니다.”
초악량이 슬쩍 웃었다.
“또 보지.”
그대로 능소밀을 지나친 초악량이 떠오르기 시작한 햇살 너머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능소밀은 질끈 눈을 감았다.
“후우.”
살았다는 안도감에 능소밀은 바닥에 벌렁 누워 하늘을 보았다.
이미 날이 밝아 태양을 정면으로 봐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끼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렸다.
“월향아!”
능소밀이 애처롭게 부르짖었다.
꿈같은 초야를 위해 쏟아부은 시간과 정성.
한여름 밤의 꿈처럼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 * *
단악선은 모처럼의 평화를 만끽했다.
그런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쓸쓸함이 밀려왔다.
혼자 지내는 건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그만큼 두 사람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마을이나 다녀올까?’
마침 약재상 주인이 부탁했던 약초들이 준비된 참이었다. 단악선은 말려 놓은 약초를 수레에 싣고 신마곡을 나섰다.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자니 범계위가 생각났다.
‘아저씨가 계셨다면 지금쯤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경공을 펼치며 으스대던 범계위.
그를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한편, 아직 무공을 회복하지 못한 초악량도 걱정됐다.
‘별일 없으셔야 할 텐데.’
얼마 전, 약재상에서 마주쳤던 무림맹의 무인들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반나절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안녕하세요, 어?”
약재상에 들어선 단악선의 눈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인물과 조우했기 때문이었다.
사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단정한 차림만큼이나 차분한 눈빛이 인상적인 장년인이었다.
단악선을 발견한 장년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면 단악선은 고개를 돌려 약재상 주인을 바라봤다.
책망이 담긴 그 시선에 약재상 주인이 펄쩍 뛰었다.
“아닐세! 나 진짜 아니야! 이 사람이 어떻게 여길 알고 찾아왔는지는…….”
장년인.
진성의가의 가주인 풍진성이 빙그레 웃으며 단악선을 향해 다가왔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소곡주님.”
그가 건넨 정중한 인사에 단악선이 나직하게 한숨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