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10)
신마의선-110화(110/500)
신마의선 (110)
범계위가 피식 웃었다.
“이제 와 혼자 멋진 척해도 늦었수.”
목을 꺾어 뚝뚝 소리를 낸 범계위가 전의를 다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한번 싸워 봅시다. 무림맹 놈들을 참아 주는 것도 슬슬 한계였소.”
범계위의 두 눈에서 가공할 살기가 줄기줄기 쏟아졌다.
“잠자던 호랑이의 코털을 뽑은 대가는 치러야지.”
“그 호랑이가 혹시 너냐?”
“아니? 두 마리지.”
범계위가 씩 웃더니 초악량을 가리켰다.
“골골거리는 호랑이.”
그리고 자신을 가리켰다.
“쌩쌩한 호랑이.”
너스레를 떨던 범계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녀도 포함해야 하나?”
“우리 셋이라면 그리 쉽게 당하지 않겠지. 다만 단 의원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 걱정일 뿐이다.”
“우리가 떠나거나 죽으면 더 슬퍼할 거요. 또 다른 길이 있겠지.”
초악량이 묘한 눈빛을 흘렸다.
평소엔 생각 없이 사는 것 같다가도 가끔은 이렇게 정문일침(頂門一針)에 가까운 현답을 내놓는 범계위가 새삼 신기했기 때문이다.
초악량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는 떠나겠다는 말도 민망해서 못하겠다.”
이때 단악선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응? 왜 혼자야?”
범계위의 물음에 단악선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혼자 나갔었는데요?”
“아, 맞아. 그랬지?”
범계위가 멋쩍게 웃었다.
한설화가 몰래 따라간 사실을 단악선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개방 방주님을 만났어요.”
초악량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개방 방주를?”
“네.”
단악선이 방금 전 이립과 나눈 대화를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초악량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무림맹에 손을 보태러 온 게 아닌가 싶었는데, 듣다 보니 단악선에게 꽤나 우호적이었던 것이다.
개방의 정보력이라면 단악선 곁에 자신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을 터. 구파일방에 포함된 곳이니만큼 자신들을 적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저는 약을 준비해 올게요.”
단악선이 객실 안으로 사라지자 초악량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이지?’
개방의 의도가 짚이지 않았다.
반면 범계위는 여전히 산만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뭐 하냐?”
“마녀의 무공이 더 발전한 모양이유.”
“……?”
“어디에서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 말이오.”
초악량이 피식 웃었다.
“너랑 한 누이의 공통점이 뭔지 아느냐?”
의아해하는 범계위를 향해 초악량이 말했다.
“바로 존재감을 감추는 데 능숙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강호에 나선 이후 두 사람은 위험한 적을 만난 경험이 별로 없었다. 늘 당당히 활보해 왔기에 기척을 감추거나 지우는 요령도 부족할뿐더러, 사실 그럴 이유도 없긴 했다.
“아닌데? 무림맹 갔을 때 기억 안 나슈? 그때는 아무도 나를 몰라봤수.”
“그거야 한 누이의 존재감에 묻혀서 그런 거고.”
“소림사에 갔을 때는?”
“그땐 향화객이 엄청 많았지. 소란스럽기도 했고.”
그제야 범계위가 안도한 듯 웃었다.
“난 또. 괜히 긴장했네.”
초악량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마 따로 볼 일이 있겠지.”
초악량의 말대로였다.
그 시각 한설화는 마을 입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악선이 객잔에 돌아간 것을 확인한 한설화는 다시 돌아와 이립을 다그쳐 한 가지 정보를 얻었다.
그래서 그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기다린 보람이 있어 저 멀리에서 마을을 향해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한설화의 시야에 들어왔다.
한설화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거리가 좁혀지자 선두에 선 남궁백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벼운 무복 차림의 남궁백은 최소한의 수행원만 대동한 상태였다.
한설화를 발견한 남궁백이 멈칫했다.
그녀와 조우할 것은 예상했지만 이처럼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속도를 줄여 한설화와 마주한 남궁백이 복잡한 눈빛을 흘렸다.
그러기를 잠시.
남궁백이 고개를 숙였다.
“무림 말학 남궁백이 태태선자(太太仙子)를 뵙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 한설화가 입을 열었다.
“사흘.”
“……?”
의아해하는 남궁백을 향해 한설화가 단호한 눈빛을 던졌다.
“사흘 후에 와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말 그대로다.”
남궁백의 시선을 마주하며 한설화가 말을 이어 갔다.
“저들은 달아나지도, 숨지도 않는다.”
남궁백의 눈썹이 꿈틀했다.
‘우리가 오는 이유를 알고 있었나?’
어디서 정보가 샜는지 생각을 정리하던 남궁백이 이내 쓴 입맛을 다셨다.
‘개방인가.’
남궁백이 가볍게 한숨을 흘렸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 역시 알고 계시겠군요?”
한설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백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저 확인이 필요할 뿐입니다. 굳이 사흘이나 허비할 필요가 있을까요?”
“필요하다.”
“어째서입니까?”
“결과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설화가 확고한 의지를 담아 남궁백을 응시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지.”
이때 남궁백 뒤에서 말없이 서 있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창천단의 단주 양불위였다.
“맹주님, 속하 양 모가 감히 한 말씀 올립니다.”
남궁백이 자신을 돌아보자 양불위가 입을 열었다.
“맹주님께서는 본 맹의 모든 권위를 짊어지고 계신 분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공무 중. 그 어떤 명숙이라 할지라도 감히 맹주님의 행보를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곤 못마땅한 듯 한설화를 노려보았다.
남궁백이 실소를 흘렸다.
오랜 세월 자신을 호위해 온 그의 충심은 이해하나, 눈앞의 여인은 명숙이라 불리는 늙은이들과는 아예 다른 존재다.
무엇보다 무공의 수위.
그녀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괴물인지 알지 못하기에 보이는 만용인 것이다.
“물러서게.”
“하오나…….”
남궁백이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양불위가 한숨을 흘리며 물러섰다.
남궁백이 다시 한설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건 경고입니까?”
한설화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충고 정도라 해 두지.”
“그 충고를 듣지 않으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순식간에 한설화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온화하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이 이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들을 만나기 전에 나를 먼저 상대해야 할 것이다.”
남궁백의 눈빛이 기이하게 일렁였다.
그래도 만에 하나.
만약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갈연의 주장대로 악공과 악일이라는 의원이 초악량과 범계위라면?
지금의 전력으로는 그 둘만 해도 버거운 상태다.
확실한 승산을 점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마저 적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 충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말에 한설화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범부 아래 견자 없다더니…….’
자신을 상대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남궁백의 기개는 과거 단신으로 마교의 공세에 맞섰던 제 아비 못지않았다.
전대 가주를 넘어선 무공으로 이미 세가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남궁백이다.
거기에 신중함과 인내심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가 무림맹주가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날이 밝기 무섭게 단악선이 객잔을 나섰다.
“점심에 올게요!”
날듯이 달려 순식간에 멀어지는 단악선의 뒷모습을 보며 초악량이 흐뭇하게 웃었다.
“저리도 좋을까?”
“뭐, 친구가 처음이니…….”
범계위의 말에 초악량이 피식했다.
“있긴 있었지. 토끼 친구. 누가 먹어 버렸지만.”
“……!”
범계위가 고리눈을 치켜떴다.
“나만 먹었나? 초 형도 먹었잖수! 그리고 내가 그걸 알겠냐고!”
억울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범계위를 외면한 채 초악량이 한설화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단 의원을 위해 사흘의 시간을 번 것이냐?”
한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아이니까.”
그게 비록 잠시일지라도.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두 사람이 객잔을 찾아왔다.
이립과 홍적문이었다.
연판장의 수결을 받기 위해 무당파를 방문하는 단악선을 일찌감치 마중 나온 것이다.
초악량과 범계위를 가까이서 조우한 두 사람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긴장감이 떠올랐다.
특히나 방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홍적문은 유난히 표정이 굳어 있었다.
반면 초악량과 범계위는 여유로웠다.
홍적문을 힐끔 쳐다본 범계위가 툭 한마디를 뱉었다.
“쟤가 쾌수여의야? 어째 생각보다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말에 홍적문의 눈에서 한광이 튀어 올랐다.
그런 그에게 초악량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신경 쓰지 말게. 워낙 생각 없이 말을 뱉는 녀석이니.”
“아, 아닙니다.”
홍적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강호의 악명과는 별개로 초악량은 천하오절의 한자리를 차지한 절대 고수다. 게다가 세간에서는 그와 더불어 소림의 법료와 자신을 한데 묶어 중원 삼대 권사로 부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 비해 범계위는 충분히 비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홍적문의 눈빛을 읽은 초악량이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긴 범계위의 진짜 실력을 제대로 아는 이가 강호에 몇이나 될까. 그걸 알고 있는 사람 대부분은 이미 불귀의 객이 된 지 오래다.
“그럼 다녀오거라.”
한설화가 단악선의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매만져 주었다.
“다녀올게요.”
연판장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단악선이 이립과 홍적문의 호위를 받으며 무당산으로 향했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 단악선을 딸려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 사람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남궁백이었다.
호위와 수행원은 모두 멀찍이 물린 채 오직 검 한 자루만 손에 쥔 채였다.
“왔나?”
초악량이 웃으며 남궁백을 맞았다.
식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던 것도 잠시.
“앉지.”
초악량이 권한 의자에 남궁백이 말없이 앉았다.
턱.
남궁백이 식탁 위에 자신의 검을 올렸다.
범계위의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피어오른 것도 동시였다. 하나 기세로는 남궁백 역시 밀리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지다 못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숨 막히는 긴장감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당신들을 혈수존자와 망산초자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맞습니까?”
남궁백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떻지?”
초악량의 반문에 남궁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객잔에 들어서는 순간 곧바로 두 사람의 정체를 깨달은 그였다.
무림맹에서 조우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두 사람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남궁백이 한설화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저를 속이셨군요.”
“있는 그대로 말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남궁백의 눈 위로 짙은 의구심이 떠오르자 초악량이 덧붙였다.
“처음부터 우리가 십대악인이라는 것을 밝혔다면 자네가 거부할 수 있었겠느냐는 말일세.”
“……!”
남궁백의 눈빛이 흔들렸다.
초악량의 말대로였다.
당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의 딸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오직 저들뿐이었다.
만약 이를 알았다면?
그래도 딸의 목숨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
남궁백의 침묵이 길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궁백이 천천히 손을 움직여 검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