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11)
신마의선-111화(111/500)
신마의선 (111)
한설화가 아미를 찡그렸다.
“딸을 살려 준 은인에게 검을 들겠다는 것이냐?”
남궁백이 단호한 눈빛으로 초악량과 범계위를 응시했다.
“저들은 십대악인입니다. 본 맹과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자들이지요.”
남궁백이 서서히 기세를 일으켰다.
“선자께서 저들의 편에 서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궁백은 한설화가 이 싸움에 끼어들지 않으리란 것을 믿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 알기 때문이다.
특히나 지금 같은 다대일의 상황에서 힘을 합쳐 한 명을 핍박하는 일은 그녀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은 그녀의 뜻을 존중해 사흘이나 기다려 주지 않았던가.
그보다 당장 직면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십대악인 둘이었다.
‘할 수 있을까?’
청성파에서 올라온 보고가 사실이라면 초악량은 상당한 부상을 입은 상태.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니 충분히 내상을 수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 아무리 발톱이 빠져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다섯 명.
천하오절의 이름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소림의 나한당주였던 료범과 사천당가의 가주인 천수암제, 거기에 세가 내에서 두 번째 고수였던 남궁진 장로의 협공에서도 살아남은 전력이 있었다.
그야말로 한설화와는 다른 의미의 괴물인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범계위까지 함께 상대해야 하는 상황.
‘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십대악인 척살에 얼마나 많은 무림맹 무인들이 희생되었던가. 그런데 정작 이를 천명하고 그들을 죽음에 떠밀었던 자신이 십대악인을 두고 돌아선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제갈연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 이상 맹에 돌아간들 자신의 오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상황. 제갈연을 추종하는 인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벌 떼처럼 들고일어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돌아가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진짜 싸우려나 본데?”
범계위가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도 정면에서 맞서 싸우는 이는 그만큼 흔치 않았다.
그것도 단신으로.
초악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검에 언덕을 베고 일검에 강물을 자른다는 단능단제(斷陵斷湍)의 신위를 눈으로 직접 보게 되겠군.”
스릉.
남궁백의 검이 천천히 검집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실망하지 않으실 것이오.”
남궁백의 말에 범계위의 눈에서 유형화된 살기가 줄기줄기 쏟아졌다.
오랜 세월 강호를 질타해 온 그였지만 남궁백은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고수였다.
과거 무림맹을 방문했을 당시 청화은옥으로 만들어진 침상을 일검에 잘라 냈던 남궁백의 검.
비록 찰나였지만 별 무리처럼 번뜩이던 유백색 섬광은 검의 끝자락에 도달한 자들만 다룰 수 있다는 검강(劍罡)이 분명했다.
소리 없이 잘려 나갔던 옥석.
그 매끄러운 단면만으로도 놈이 아주 위험한 검을 품고 있는 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흐흐. 재밌겠군.”
모처럼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난 범계위는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시한 조무래기들이 아닌, 목숨을 걸고 싸워 볼 만한 상대를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한설화가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그 전에…….”
그렇게 운을 뗀 한설화가 남궁백을 응시했다.
“한 가지만 말하마.”
이어진 한설화의 말에 반쯤 뽑혀 나온 남궁백의 검이 멈칫했다.
“저들은 네가 무림맹주라는 사실을 알고도 네 딸을 치료를 해 주었다.”
남궁백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한 원수의 딸임을 알고도 목숨을 걸고 치료를 해 주었다는 말이다. 너는 그 의미를 아느냐?”
“……!”
동요하는 남궁백을 향해 한설화가 추궁하듯 질문을 던졌다.
“정과 사를 나누길 좋아했으니 내 하나만 묻자. 지금 누가 정이고, 누가 사더냐?”
“…….”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게 만드는 그녀의 말에 남궁백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선택해라. 무림맹주로서 은인에게 칼을 들이밀 것이냐? 아니면 아비로서 은인에게 고개를 숙일 것이냐?”
“…….”
“네 몸속에 흐르는 남궁가의 피는 어찌하라 시키느냐?”
검파를 움켜쥔 남궁백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결코 양립할 수 없는 한 가지 선택을 놓고 갈등하길 잠시, 한 차례 무거운 탄식을 터트린 남궁백이 결국 검을 갈무리했다.
‘이걸로 무림맹주로서의 삶은 끝이구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범부로 돌아갈 결심이 서자 허탈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딘가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남궁백이 말없이 초악량과 범계위를 응시했다.
그런 그의 눈빛.
그 안에서 더없이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스러졌다.
남궁백이 입을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제 여식을 살려 주신 은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남궁백이 초악량과 범계위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처음 객잔에 들어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검을 든 채 돌아섰다.
멀어지는 남궁백의 뒷모습을 보며 초악량은 내심 감탄했다.
방금 전, 그의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 까닭이다.
나름 비범한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무림맹주의 자리를 초연하게 내려놓을 줄은 몰랐다.
일단 맛보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괴물이 바로 권력이란 놈이다.
그걸 손에서 놓을 수 있다니.
“그가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 다행이군.”
초악량의 말에 범계위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 * *
객잔을 걸어 나오는 남궁백의 모습에 양불위가 황급히 다가섰다.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양불위의 안색은 긴장감이 역력했다.
객잔에서 뿜어져 나오던 강렬한 살기를 그 역시 느꼈던 것이다.
이어진 무시무시한 기파의 충돌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전율스러웠다.
그래서 창천단을 이끌고 뛰어들려는 찰나.
거짓말처럼 살기가 사라졌다.
“좀 걷지.”
그 말과 함께 남궁백은 조용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양불위는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어두운 남궁백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래. 그때도 이런 날씨였어.”
걸음을 멈춘 남궁백이 눈을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자네, 기억나나?”
“……?”
“아버님의 시신을 수습해 돌아오던 그날 말일세.”
“아!”
“그때 결심했지. 흩어져 있는 세가들의 힘을 하나로 규합해야 한다고. 이런 불행이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네, 기억합니다.”
“덕분에 자네는 신창양가(神槍楊家)의 후계자 자리를 포기해야 했고.”
악가와 이가, 그리고 양가는 천하삼창(天下三槍)이라 불리며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창술의 명가다.
그중에서도 신창양가는 오대세가에도 밀리지 않는 영향력을 지닌 가문이었다.
그러나 신창양가를 필두로 한 진주언가와 광동진가, 그리고 모용세가는 오대세가와 오랜 세월 노선을 달리해 오고 있었다.
특히나 오대세가 중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해 온 남궁세가와 껄끄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신창양가의 적통을 이은 소가주였던 그가 가문을 등진 이유이기도 했다.
양불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잊은 지 오래입니다.”
“그때는 젊었지. 자네도 나도.”
남궁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봄이었다는 걸 알겠네.”
“맹주님?”
양불위가 의아한 눈으로 남궁백을 바라봤다.
갑자기 오래전 일을 언급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무엇보다 남궁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래도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네.”
“맹주님!”
해연히 놀라 외치는 양불위를 향해 남궁백이 조용히 웃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네. 무림맹이란 열매를 얻었으니 나라는 꽃은 이제 져야겠지. 그게 순리인 게야.”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는 양불위를 뒤로한 채 남궁백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양불위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아연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 *
땅거미가 저물어 가는 느지막한 오후.
무당산을 내려오던 단악선이 끌어안고 있던 연판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헤헤.”
무당파 장문인 단금진인의 수결이 선명하게 적혀 있는 연판장. 새삼스럽게 이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한 단악선이 환한 미소와 함께 연판장을 품에 넣었다.
산 아래까지 배웅을 나온 운중산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가는 건가?”
“응.”
단악선 역시 서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같아선 언제까지고 함께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연판장에 채워 넣어야 할 수결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꼭 다시 만나자.”
단악선의 말에 운중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나는 더 강해져 있을 거다.”
“나도 마찬가지야.”
서로의 손을 단단히 맞잡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한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앞날을 축복하며 헤어졌다.
“서둘러야겠다.”
초악량을 치료할 시간이 가까워진 것을 깨달은 단악선이 잰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객잔에 도착하자 그때까지 단악선을 호위했던 이립과 홍적문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또 보자꾸나.”
“어? 왜 안 들어가시고요?”
저녁 식사 때가 머지않아 그리 물은 것인데, 이립과 홍적문은 시선을 마주하더니 쓰게 웃었다.
“그다지 좋은 생각 같지는 않구나.”
“불편한 자리에서 먹다 얹히느니 차라리 안 먹는 게 나아.”
그리곤 재차 권할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에게 덜미가 잡힐세라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객잔에 들어서자 이미 음식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녀왔어요!”
범계위가 반색했다.
“표정이 밝은 걸 보니 갔던 일이 잘됐나 보네?”
“헤헤.”
단악선이 품속에서 꺼낸 연판장을 자랑스레 펼쳐 보였다.
초악량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한설화 역시 마찬가지.
단악선이 앉을 의자를 빼 주며 미소를 건넸다.
불과 반나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을 맞이하듯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문득 단악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신투 아저씨는요?”
“그놈은 떠났다.”
초악량의 대답에 단악선이 깜짝 놀랐다.
“네? 언제요?”
“오늘 아침에.”
“왜요?”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우리 단 의원 줄 선물 사러?”
초악량과 범계위가 황당한 눈빛으로 객잔 입구를 보았다.
그 말을 하며 들어서는 사람은 진즉에 내뺀 줄 알았던 가두달이었기 때문이다. 두 손 가득 빙당호로를 든 채 태연히 걸어온 가두달이 단악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빙당호로를 받아 든 단악선이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신투 아저씨. 잘 먹을게요.”
그런데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들었는지 범계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 마음대로 우리 단 의원이래?”
나직이 으르렁대는 범계위와 시선을 마주한 가두달이 움찔했다.
범계위의 눈에 담긴 살기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거 훔친 건 아니지?”
초악량이 미심쩍은 눈빛을 던지자 가두달이 펄쩍 뛰었다.
“아닙니다! 돈 주고 산 겁니다!”
문득 따가운 시선을 느낀 가두달이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자신을 쏘아보는 한설화를 발견한 가두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설화가 손을 들어 단악선이 들고 있는 빙당호로를 가리켰다.
“단 의원은 밥을 먹어야 한다. 바른 성장을 위해서.”
빙당호로를 한입 크게 베어 물던 단악선이 멈칫했다.
가두달 역시 마찬가지.
“다, 다시 뺏을……까요?”
한설화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럴 거면 왜 줬냐는 질책의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가두달이 울상을 지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해하던 순간 초악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만하고 너도 와서 앉아라.”
기다렸다는 냉큼 식탁에 앉는 가두달의 모습에 한설화는 어이없다는 눈빛을 흘렸다.
그러나 더 이상 뭐라 하진 않았다.
다행히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고, 우려했던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주어진 이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때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