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13)
신마의선-113화(113/500)
신마의선 (113)
그 가공할 격공섭물의 신위에 노단양은 끓어올랐던 온몸의 피가 한 번에 식는 기분이었다.
양불위도 예상을 넘어섰지만 남궁백은 그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상상 이상의 괴물이었던 것이다.
제갈연이 보낸 전서가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하나만 묻지. 혈라진경의 나머지 절반을 가지고 있긴 하나?”
남궁백이 슬쩍 입매를 말아 올렸다.
“상황이 이리되었는데도 이미 파기된 약속에 연연하나?”
노단양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처음부터 줄 생각이 없었구나!”
“글쎄…….”
모호하게 말끝을 흐리던 남궁백이 차갑게 웃었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지. 너 역시 십대악인이라는 것.”
그 순간 노단양이 신형을 날렸다.
남궁백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른 것도 동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노단양이 신형을 날린 방향은 뒤쪽에 도열해 있는 파사단 쪽이었기 때문이다.
노단양이 한순간 파사단 틈을 헤집고 사라졌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멀리서 들려온 노단양의 음성에 남궁백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갑자기 노단양이 달아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남겨진 파사단의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가득했다.
어정쩡하게 자리를 지키고 선 채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노단양이 사라진 곳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설마 수장인 그가 자신들을 버리고 혼자 달아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다.
“추적할까요?”
어느 정도 내상을 수습한 양불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남궁백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놈은 갈 곳도, 숨을 곳도 없네. 정파와 사파 모두와 척을 졌으니.”
혹시 모를 후환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눈치를 살피며 우왕좌왕하는 파사단부터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해체의 수순을 밟아야겠지.”
그렇게 대답한 남궁백이 조용히 웃었다.
“아마도 그게 무림맹주로서 하는 마지막 일이 되겠군.”
* * *
야심한 시각.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달리는 인영이 있었다.
‘살아서 찾아오라고?’
제갈연이 보낸 전서의 내용을 떠올린 노단양의 눈 위로에 광기로 얼룩진 살기가 쏟아졌다.
그 계집의 생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당장은 그가 기댈 유일한 언덕이 그 여자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래. 마지막으로 봐주지.’
하지만 또다시 헛소리만 지껄인다면 한 줌도 안 되는 그 가느다란 목을 꺾어 버릴 것이다.
그만큼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 내력도 거의 고갈될 즈음.
노단양은 간신히 무림맹 본단이 있는 무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감시망이 허술한 곳을 노려 무림맹에 잠입한 노단양은 곧장 천이단주의 처소를 향해 움직였다.
늦은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제갈연의 처소는 아직까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덜컹.
방문을 열고 노단양이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기다렸다는 듯 맞은편의 의자를 권하는 제갈연의 모습에 노단양이 자욱한 살기를 흘렸다.
“오는 길이 무척 험했나 보군요.”
제갈연이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노단양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리고 탁자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건!”
노단양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반쪽짜리 책자.
노단양은 그것이 혈라진경의 나머지 절반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탁.
거칠게 낚아챈 책자를 노단양이 정신없이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노단양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희열이 떠올랐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비록 필사본이었지만 혈라진경의 나머지 부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제갈연이 빙그레 웃었다.
“비급은 애초에 절반만 필사가 되었죠.”
“그럼 이건……?”
“맹주가 모르는 나머지 필사본이죠. 이게 필요했던 것 아닌가요?”
“어째서 내게…… 이걸?”
“글쎄요, 왜일까요?”
묘하게 말끝을 흐린 제갈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원하시던 건 맞잖아요.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생존일 거고.”
“뭐라?”
“보아하니 더 이상 무림맹에 발붙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요?”
노단양이 흠칫했다.
확실히 여간내기가 아니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만큼은 도저히 자신이 따라갈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파인으로 돌아갈 수도 없죠.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처지인 당신을 도울 사람은 제가 유일할 것 같은데요?”
“…….”
“뭘 고민하시나요? 지금 상황에서. 어차피 선택의 여지도 없는데.”
잠시 제갈연을 쏘아보던 노단양이 불쑥 입을 열었다.
“뭘 원하는 거지?”
“일단은 그 무공을 완성하세요. 그리고…….”
“그리고?”
“저를 조금 도와주시면 돼요.”
“그걸 통해 내가 얻는 건?”
제갈연이 손을 들어 노단양이 움켜쥐고 있는 혈라진경을 가리켰다.
“이미 하나 얻으셨네요?”
당황한 노단양을 향해 제갈연이 미소를 건넸다.
“물론 그것 이외에도 많은 것을 도와드릴 수 있겠죠. 예를 들어…….”
잠시 말끝을 흐리던 제갈연이 빙그레 웃었다.
“일단은 일신의 안전을 위한 방편을 마련해 드릴게요. 다시 강호에서 활동하도록 새로운 신분도 제공할 거고요.”
“그게 가능하다고?”
노단양의 반문에 제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요. 제가 새로운 무림맹주만 된다면요.”
비로소 노단양은 제갈연의 진짜 목적을 깨달았다.
“어때요? 저와 손을 잡는 건?”
노단양이 침음했다.
그녀 말대로 현 상황에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맹주라는 자도 나를 속였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믿지?”
“믿지 마세요. 저도 당신을 믿지 않으니까.”
“뭐라?”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노단양을 향해 제갈연이 슬쩍 웃었다.
“그래도 아예 믿지 못할 게 없는 건 아니에요.”
“……?”
“서로 바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믿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은 무공, 저는 권력. 이보다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빤히 제갈연을 응시하던 노단양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연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요녕성 전명산에 지명암이라는 암자가 있어요. 당분간 그곳에 몸을 숨기시면 될 거예요.”
노단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는 미리부터 자신이 제안을 수락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일종의 선금 같은 거니까.”
“그렇다니 감사히 받지.”
비급을 가지고 돌아서는 노단양을 제갈연이 불러 세웠다.
“아, 그리고 이건 그냥 순수한 궁금증인데,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요.”
“……?”
“무공을 완성하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
“…….”
노단양이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증명하려고 한다.”
“무엇을 말인가요?”
“내가 천하제일이라는 것을.”
“적지 않은 피가 흐르겠군요.”
노단양이 섬뜩한 웃음을 말아 올렸다.
“당신이 원하는 자도 포함되겠지.”
제갈연이 더없이 화사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바로 그거예요. 그게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이유죠.”
* * *
십대악인의 손에 청성의 장문인이 살해당한 전대미문의 사태에 정파 무림은 몹시 시끄러웠다.
마른 짚에 불이 옮겨붙듯 순식간에 중원 전 지역으로 퍼져 나간 소문은, 이내 무림맹을 질타하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정확히는 무림맹주인 남궁백을 겨냥한 불만들이었다.
평소 남궁백의 지나친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자들이 이때다 싶어 무림맹과 그의 실책을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의 풍문이 더해졌다.
바로 남궁백이 맹주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소문이었다.
출처가 불분명했으나 그와 같은 소문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무림맹의 대응은 확실히 의구심을 자아냈다.
그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중원 곳곳에서 전서구가 날아올랐고, 헤아리기도 힘든 숫자의 인마가 무림맹이 위치한 무한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그렇게 시끄러운 무림과는 달리 일반 백성은 더없이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 가고 있었다.
강가에 길게 늘어선 아낙들만 해도 그랬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여인들 옆에는 하나같이 산더미 같은 빨래가 쌓여 있었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
아직 물놀이를 즐기기엔 이른 계절이었는데도, 사방에 물을 튀기며 요란하게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아낙들 중 누군가가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이놈들아. 위쪽으로 가서 놀아.”
그 말에 아이들이 우르르 상류로 몰려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수영을 즐기던 아이들이 강가로 뛰쳐나왔다.
“우웩!”
한 녀석이 구역질을 시작하자 덩달아 다른 아이들도 바닥에 손을 짚고 아침에 먹었던 것을 게워 냈다. 빨래를 하던 여인들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온 것도 그때였다.
“에구머니! 이게 대체 뭔 일이래?”
여인들이 강물에 담갔던 빨래들을 황급히 건져 올렸다.
맑았던 강물이 어느 순간 탁해지나 싶더니 참기 힘든 악취까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코를 싸맨 아낙과 아이들이 황급히 강가를 떠났다.
한편 그 시각.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 강물의 상류에서 두 사람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중 한 명이 탄성을 터트렸다.
“여어, 시원하다.”
개방 방주인 이립이었다.
“목욕은 삼 년 만인가?”
홍적문의 물음에 이립이 고개를 저었다.
“사 년이지. 마지막 개방 대회 전날 씻었으니까.”
자신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시커먼 구정물이 물길을 따라 하류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목욕을 만끽하는 두 사람이었다.
“어쨌든 이 정도면 되겠지?”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이 강가로 걸어 나왔다. 그리곤 땟국물이 빠진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이야, 이게 누구신가? 완전 사람이 달라지셨소?”
“그러는 자네야말로 새신랑 같군. 아주 멀끔해졌어.”
그렇게 칭찬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한설화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왜 그러세요?”
단악선의 물음에 한설화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이립과 홍적문을 응시했다.
“목욕을 했는데도 악취가 그대로라니.”
금방이라도 두 사람을 다시 강물에 던져 버릴 것 같은 한설화를 단악선이 만류했다.
“이 정도로 넘어가 주세요. 저분들이 씻는 건 비 올 때뿐이라고 하셨잖아요. 듣자니 개방 방도에게 목욕은 굉장히 치욕스러운 일이래요.”
“아무렴!”
단악선의 말을 들었던지 이립이 맞장구를 치며 다가왔다. 그리고 그만큼 한설화가 물러났다.
아미를 한껏 찡그린 채 한설화가 이립을 노려봤다.
코를 파고드는 지독한 악취에 의식마저 혼미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얼굴 감각이 마비되어 냄새를 맡지 못하던 그때가 그리울 정도였다.
이립이 어색하게 웃고는 단악선을 향해 말했다.
“이제 당분간 함께 움직여야겠군.”
초악량과 범계위의 정체가 밝혀진 상황에서 껄끄러운 만남을 대신하기 위해 개방이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립과 홍적문이 일행에 합류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연판장을 받는 이유도 넓게 생각하면 무림 동도를 위한 일 아닌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렇게 말한 이립이 초악량과 범계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은원도 잠시 뒤로 미뤄야겠군요.”
그 말에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은원이랄 게 있나? 내 기억에 개방 거지는 죽인 적이 없는데?”
“다친 녀석들은 제법 되죠.”
초악량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이립이 넉살 좋게 웃었다.
“어쨌거나 계산할 게 있다면 추후에 하는 것이 낫겠지요? 지금은 단 의원의 목적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때니까요.”
초악량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범계위 역시 마찬가지.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굳이 드러내진 않았다.
그런 두 사람과 한설화를 향해 이립이 포권을 취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그런데 말이야.”
개방 방주가 자신을 바라보자 어정쩡한 모습으로 한편에 서 있던 가두달이 움찔했다.
“자넨 누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