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18)
신마의선-118화(118/500)
신마의선 (118)
듣고만 있던 진조운이 나직이 입을 뗐다.
“의원이 사람을 살린 걸 원한으로 따질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양일소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금 강경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장문인께서는 부디 그 연판장의 목적을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파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을 만들겠다니, 그게 가당키나 하다 생각하시오?”
“무위는 새외나 다름없는 변방입니다. 애초에 우리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이라 관심도 가지지 않는 지역이지요. 더구나 본 파는 과거에 신의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도 있지 않습니까?”
양일소는 끝까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의와 마의, 두 사람의 은원을 서로 상쇄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저들에게 빚진 것이 없는 셈이지요. 따라서 저들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진조운이 곤란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이에 양일소가 다시 말했다.
“신의에게 받은 은혜는 연판장으로 갚는다 칩시다. 그래도 마의와의 원한이 남습니다.”
“……?”
“마의가 본 파에 끼친 피해에 대해 확실한 계산을 해야 하지 않겠소?”
“달리 생각해 두신 방법이 있습니까?”
“성수신단 정도면 괜찮지 않겠소? 제조법을 받는다면 더욱 좋을 테고.”
진조운의 낯빛이 굳어졌다.
성수신단에 대한 강호의 소문을 그라 해서 모를 리 없었다.
그것을 얻는다면 형산파의 부흥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과욕이었다.
작은 것을 탐하다 오히려 큰 것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뜻을 가지고 형산을 방문하는 귀한 손님이건만, 그에게 본인과 상관없는 원한을 이유로 무언가를 요구할 만큼 진조운은 염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조운이 주위를 둘러봤다.
대부분이 양일소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은 성수신단이라는 말에 솔깃한 표정이었다.
“그 문제는 제가 좀 더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결국 진조운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양일소를 진조운이 따라나섰다.
“사형,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주위를 둘러보던 양일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장문인. 공석에서는 그리 부르시면 안 된다, 몇 번을 말했소? 비록 우리가 사형제 지간이라 하나 공석에서는 장문인과 장로요. 그러니 호칭을…….”
“뭐 어떻습니까? 저희끼리인데.”
진조운이 양일소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건넸다.
“사형께서 누구보다 본 파를 위한다는 것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
“하나 이번만큼은 제게 힘을 실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칫 우리 사형제가 반목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우려됩니다.”
양일소가 진조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젊었을 때는 용광로의 쇳물처럼 뜨겁기만 했던 눈빛이 지금은 맑은 찻물처럼 고요하게 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 부담스러웠다.
“내 발언과 행동이 장문인의 권위를 깎아내린다 생각하시오?”
양일소의 말에 진조운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완곡하게 돌려 말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침묵을 이어 가던 양일소가 입을 연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장문인은 그 권위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해 내야 하는 자리요.”
진조운의 눈 위로 실망감이 떠올랐다.
그 말에 담긴 진의를 깨닫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 권위를 세우라는 의미.
즉, 내 알 바 아니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돌아서기 직전 양일소가 말했다.
“장문인이라면 누구보다 문파의 실익을 우선으로 해야 하지 않겠소? 구대문파니 뭐니……, 그깟 허울뿐인 명예에 현혹되기 전에 말이오.”
“…….”
멀어지는 양일소의 뒷모습을 보며 진조운이 한숨을 흘렸다.
그가 매번 자신의 결정에 의견을 달리하는 게 한두 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갈수록 그 정도가 빈번해지고 있었다. 요즘은 아예 이러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지금의 상황이 답답했다.
* * *
형산파의 산문 초입.
“아주머니께서 곁에 없으니 허전해요.”
단악선의 말에 이립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전 전대와 얽힌 악연이라곤 하나 형산파가 어찌 나올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낫겠지.”
“악연이요?”
단악선의 반문에 이립과 홍적문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사자도 없는 자리에서 우리 입으로 말하기 그렇구나. 나중에 직접 들으려무나.”
단악선은 몹시 궁금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호기심을 묻었다.
두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단악선을 호위하는 사람은 이립과 홍적문이 전부였다.
그렇게 단악선 일행은 영성문(棂星門), 반룡정(盘龙亭), 정천문(正川門)을 차례대로 둘러보며 형산을 올랐다.
경사가 꽤나 가팔랐지만 오르는 길이 심심하진 않았다.
남방 최대의 궁전식 고건축군(古建筑群)이자, 오악(五岳)의 악묘(岳庙)들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곳답게 볼거리가 풍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도가 사원뿐만 아니라 곳곳에 불교 사원도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눈치 빠른 이립이 주변을 가리켰다.
“엄밀히 따지자면 형산파는 도가적 색채를 지녔지만 도가문파는 아니란다. 형산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문화를 아우르는 관대한 기풍을 지닌 곳이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형산파를 존재하게 만든 것이다.”
개방의 방주답게 이립은 아는 것이 많았다.
명소 곳곳에 얽힌 전설과 배경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성제전(圣帝殿) 앞에 이르렀다.
가장 중요한 제사를 지내는 정전인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열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선두에 서 있던 초로의 사내가 웃으며 단악선 일행을 맞이했다.
“본 파를 방문해 주신 귀한 손님들을 이 진 모가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립이 웃으며 마주 공수했다.
“장문인의 환대에 이 늙은 거지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구려.”
그 말에 단악선은 다소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형산파의 장문인인 진조운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와 인자한 미소.
얼핏 낙방수재처럼 유약해 보이는 인상은 듣던 바와 너무 달랐다.
그만큼 일파의 종주라 믿어지지 않는 온화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녹림의 총표파자 악호군과 양패구상에 이를 때까지 치열하게 싸웠다는 그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검으로는 전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뛰어난 검객이 바로 그였다.
단악선도 곧장 진조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명의 의원인 단악선이 형산파 장문인을 뵙습니다.”
단악선을 본 진조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허허. 무명이라니……. 겸손이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군. 천하의 모든 의원들이 손을 놓고 포기했다는 무림맹주의 딸을 치료했다는 소문이 이곳까지 파다하거늘.”
그뿐만이 아니다.
깊게 갈무리된 눈빛이나 자세와 걸음걸이에서도 잘 닦인 무공의 흔적이 느껴졌다.
‘하긴…….’
무언가를 떠올린 진조운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지금은 동행하지 않았으나 강호를 떨어 울리는 세 고수가 눈앞의 소년과 동행하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했기 때문이다.
진조운과 눈이 마주치자 이립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거지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오. 그저 이 아이의 호위로 온 것뿐이니.”
고개를 끄덕인 진조운이 뒤를 돌아보며 형산파의 장로들을 소개했다.
그들은 모두 진조운의 사형제들로, 양일소만이 유일하게 손위 사형이었다.
“양일소요.”
이립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의를 갖춰 덕담을 주고받는 다른 장로들과 달리 유독 그만이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냉담했다.
이립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지만 홍적문은 달랐다.
“똥개도 제집에서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는군.”
대뜸 입을 연 홍적문이 양일소를 노려봤다.
“아침부터 소태라도 씹으셨소? 아니면 원래 면상이 그따위로 생겨 먹은 거요? 후자라면 내 사과하리다.”
홍적문의 말에 양일소는 순간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노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상대가 개방의 이름 높은 고수인 쾌수여의라 할지라도 이곳은 형산파의 영역.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다.
“허허. 이거 서로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진조운이 황급히 나서 두 사람을 중재하려 했지만 양일소가 불쑥 입을 열었다.
“예의를 갖춰야 하나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소이다.”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드러낸 양일소가 단악선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신의의 아들은 의당 환영할 일이나, 마의의 아들을 환영할 수 없기 때문이오.”
“양 장로!”
진조운이 직책까지 언급하며 만류했지만 양일소는 뜻을 굽힐 마음이 없어 보였다.
“어미의 잘못을 자식이 책임지는 게 당연한 것 아니오? 그게 아니라면 제 아비의 후광에 기댈 생각도 말아야지.”
단악선이 당황한 눈으로 양일소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양일소가 차갑게 코웃음 쳤다.
“설마 귀왕마륜 조고의 일을 모른다는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일이니 자신은 모른다 잡아뗄 셈인가?”
진조운은 당황했다.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다.
이미 몇 차례나 그 일을 언급하지 말아 달라 정중히 부탁해 두지 않았던가. 만약 언급하더라도 충분히 때가 무르익어 대화의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때 꺼내는 게 옳다.
“하아…….”
진조운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 순간에도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원공보검.
이 모든 사태가 장문인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의 부재로 인해 벌어진 일인 것 같아 가슴이 무거워진 것이다.
장문인이라곤 하나 신물을 잃어버린 그는 사문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일 뿐.
반면 이립은 현 상황이 꽤 흥미로웠다.
장문인을 앞에 두고 저리 무시하는 상황이라니! 배분이 사형이라고는 하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파의 장문인을 스스로 무시한 꼴 아닌가.
그러다 문득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새삼 한설화가 동행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녀가 단악선을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 아는 까닭이다.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단악선을 무시하는 처사에 이미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을 터.
만약 그녀가 형산파를 쓸어버리려 마음먹는다면 이 자리의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형산파의 개파조사인 하원일이 와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립의 마음도 모른 채 양일소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어 갔다.
“스스로 이번 방문이 마의가 아닌 오직 신의의 아들로서 왔음을 인정한다면 또 모르지.”
어머니를 부정하라는 뜻인가?
“사형!”
참다못한 진조운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때 말없이 서 있던 단악선이 입을 열었다.
“귀 파의 불행은 저도 안타깝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게 사람을 살린 의원을 탓할 일인가요?”
“당연한 것 아닌가? 죽어 가던 놈을 생사마의가 살려 주지 않았다면 애초에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니까.”
“그런 맥락이라면 무공을 가르친 그자의 사부나, 아니면 그자를 낳은 부모까지 탓을 하게 되는데, 그건 이치에 맞지 않는 것 아닐까요?”
“뭐라?”
“또한 그렇다면 그자와 원한을 맺은 형산파의 사람도 탓을 해야 할 테고요.”
“……!”
“장로님 말씀대로라면 결국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형산파에는 죄인이 되겠네요.”
너무나 당당한 단악선의 눈빛에 양일소가 멈칫했다.
아직 어린애이니만큼 적당히 겁주고 어르면 쉽게 일이 풀리리라 예상했건만 입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단악선이 말했다.
“엄마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 비난은 사람을 살리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이어야 마땅해요. 이건 아빠도 마찬가지고요.”
당황한 양일소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단악선이 쐐기를 박았다.
“그 누구도 의원이 사람을 살린 것을 비난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