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25)
신마의선-125화(125/500)
신마의선 (125)
무한에 위치한 무림맹 본단.
활짝 열린 정문에서 일단의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도포와 승포를 휘날리는 도사와 승려, 거기에 무복을 걸친 속세의 무인까지, 무림맹과 갈라서기로 결정한 구파일방의 명숙들이었다.
그중에는 이립과 홍적문도 있었다.
이립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무림맹 정문 위에 새겨진 웅장한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이로서 무림맹과의 인연도 끝이군.”
어딘지 시원섭섭한 어투였다.
무림맹을 탈퇴하는 과정은 의외로 복잡하지도, 까다롭지도 않았다.
공과를 떠나 지금까지 무림맹을 지탱해 온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남궁백. 남궁백이 맹주직을 내려놓고 낙향한 뒤, 대부분의 유력 인사들이 무림맹을 떠났다.
그로 인한 권력의 공백은 곧 무림맹의 영향력과 직결되었다.
거기에 구파일방을 붙들 명분도 힘도 없는 상황.
예상보다 수월하게 무림맹과 결별하게 되었기 때문인지 그들의 표정은 가벼웠다.
“표정이 왜 그러시오?”
주변의 눈을 의식한 홍적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것 아닐세.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
“지낭리. 그녀에게 무림맹주를 넘겨준 게 과연 잘한 짓인지 모르겠군.”
“괜한 걱정 아니오?”
그 말대로다.
남궁세가와 그들의 추종자, 거기에 구파일방이 빠져나간 무림맹의 전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이름뿐인 조직으로 전락한 셈.
“실리도 없는 자리를 그저 차지하고만 있을 여자가 아니니 그러지. 분명 무언가 꾸미는 바가 있을 거야.”
“지나친 노파심이 아닐까 싶소만.”
“그렇다면 좋겠지만…….”
“일단 운남으로 갑시다. 단 의원 일행과 합류하려면 꽤나 길을 서둘러야 할 것 같소.”
두 사람은 구파일방의 명숙들과 인사를 나눈 뒤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한 자루 날카로운 보검을 연상시키는 초로인.
점창파의 원로 중 한 명인 창염도객(昌髥刀客) 사공명이다.
가시처럼 비죽이 돋은 수염은 희끗했지만 눈빛만큼은 시리고 차가웠다.
“운남까지는 먼 여정이 될 듯한데, 말동무라도 하며 같이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립이 특유의 넉살을 발휘하자 꼬장꼬장하던 사공명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허허. 그래 주신다면 노부야 감사하지요. 중원제일인 용두방주님의 입담을 견식할 기회를 이 촌부가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스스로를 촌부라 낮추었지만 이립은 그를 굉장히 높게 생각하고 있었다.
점창을 상징하는 사일검(射日劍) 낙일도(落日刀).
그중 낙일도를 대성해 도법으로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칼의 고수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장문인께 언질을 받은 것도 있고요.”
이미 개방과 점창은 사전에 협의가 된 상태였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장문인께서도 연판장 작성을 거부하진 않으실 겝니다.”
사공명의 말에 이립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문제가 있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공 장로께서도 그 아이가 마음에 드실 겁니다. 혹시 압니까? 뜻밖의 기연이 있을지?”
“기연? 무슨 기연 말입니까?”
“십 년 넘게 앓아 왔던 지긋지긋한 제 신경통이 그 아이를 만나고 나서 사라졌습니다.”
그 말에 사공명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허허. 그거 참 기대가 되는군요. 저 또한 노구를 이끌고 일선에서 뛰어다니다 보니 성한 곳이 없던 참이었소이다.”
인사할 때를 기다리던 홍적문이 때를 놓치지 않고 포권을 취했다.
“개방의 후배 홍 모가 점창의 대선배님을 뵙습니다.”
“오오! 쾌수여의를 이곳에서 뵙는군!”
“부끄러운 허명일 뿐입니다.”
홍적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을 사공명은 겸양이라 생각했지만 이 순간 홍적문은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이미 초악량을 가까이에서 봤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선 그와 자신을 삼대권사로 묶은 놈을 찾아내 그 멍청한 주둥이를 흠씬 때려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 그럼 가시지요.”
이립이 길 한쪽으로 비켜서 선두의 자리를 양보했다.
“그럽시다.”
사공명 역시 흔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운남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 * *
한편 같은 시각, 광동성 오천.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초악량과 범계위가 항구에 도착했다.
광활한 바다 위로 온갖 형태의 바위와 크고 작은 섬이 만들어 낸 기암군도(奇巖群島)가 눈에 들어왔다.
초악량이 한껏 숨을 들이켰다.
‘오랜만이군.’
한때는 지겹게만 느껴졌던 소금기 머금은 해풍도 반가웠다. 범계위 역시 바다를 보는 표정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바다가 반가운 게냐? 곧 만나게 될 사람이 반가운 게냐?”
“단 의원 좋아할 거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서 그러우.”
“걱정되는 건 없고?”
“걱정은 무슨. 조금 불편할 뿐이지.”
“정말 조금이냐?”
“조금보다 조금 더 조금.”
그 반응에 초악량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혹시나 긴장이라도 한다면 놀려 줄 심산이었는데, 조금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자신도 지금 범계위를 놀릴 처지는 아니었다.
곤란한 상황을 맞게 된 건 그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삐이익!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소리를 좇아 고개를 돌리자 멀리 허공을 가르는 한 대의 커다란 화살이 눈에 들어왔다.
대초명적(大哨鳴鏑).
효시(嚆矢)라고도 하는, 촉 대신 큰 호각(號角)을 달아서 소리가 나게 하는 신호용 화살이었다.
“우리가 온 걸 어떻게 알았지?”
범계위의 말에 주위를 살피던 초악량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몇몇 사람들이 자신들을 힐끔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이 연락을 했을 것이다.
“저놈의 새는 늙어 죽지도 않는군.”
초악량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범계위는 자신들 머리 위의 높은 창공에서 큰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는 한 마리 매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해동청(海東靑)이라고도 불리는 송골(松鶻)이었다.
언제나 주인에 앞서 목표물을 확인하는 놈.
아니나 다를까.
대초명적이 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커다란 섬 뒤쪽에서 한 척의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껏 돛을 펼쳐 바람을 제대로 탄 배는 빠른 속도로 항구를 향해 질주해 왔다. 정찰용 쾌속선의 규모를 아득히 벗어난, 어마어마한 크기의 전투용 대형 선박이었다.
그 배의 가장 높은 깃대에는 해남파를 상징하는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벌써 나타나는군.”
범계위가 선박의 선수에 당당한 자세로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허공을 맴돌던 매가 선수를 향해 빠르게 날아간 것도 그때였다.
빛살처럼 쇄도한 매는 선수에 발을 올리고 있던 여인이 팔을 뻗자 그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삼십 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흑단 같은 머리칼을 나부끼는 그녀의 얼굴 위로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가득했다.
“쟤도 참 안 늙네.”
범계위의 말에 초악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는 마흔을 넘겼지만, 선수의 여인은 젊은 시절의 모습을 상당히 유지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흠이라면 흠일까.
까만 진주처럼 반짝이는 눈. 오뚝한 코와 선명한 붉은 입술은 해풍에 그을린 갈색 피부와 묘한 대조를 이루는, 미태가 뛰어난 여인이었다.
해남검파의 부문주인 벽화령.
그녀가 손을 들어 매의 등을 쓰다듬자 매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부리로 그녀의 손등을 문질러 친근감을 표시했다.
탁.
배가 항구에 닿기 무섭게 벽화령이 신형을 날렸다.
그리곤 범계위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드디어 왔네?”
벽화령이 범계위를 향해 화사한 미소를 건넸다.
뭇 사내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진탕될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왔으니까 용서해 줄게.”
범계위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용서해 준다니 고맙네.”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벽화령이 초악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초 오라버니도 잘 지냈죠?”
“덕분에. 벽 누이는 여전하군.”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초 오라버니는 무슨 일 있었나요? 왜 이리 늙은 거 같지?”
“뭐……, 고생 좀 했지.”
초악량이 대충 받아넘겼다.
직설적인 그녀의 말투는 몇 년이 지나도 좀처럼 적응이 안 됐다.
그러나 이어진 말까지 초연히 넘기긴 어려웠다.
“우리 범 공자님은 이렇게나 멋있는데.”
“쿨럭! 저놈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공자냐…….”
“제 눈에는 여전히 변함없이 매력적인걸요.”
꿀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범계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그럼 타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나눠요.”
고개를 끄덕인 초악량과 범계위가 배 위로 올랐다.
배 위에 도열해 있던 오십여 명의 해남파 문하들이 범계위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인 것도 동시였다.
“부문주님의 정랑(情郎)을 뵙습니다!”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하나 된 목소리가 쩌렁하게 항구를 울릴 정도였다.
“저, 정랑?”
깍듯하게 자신을 대하는 해남파 무인들의 모습에 범계위가 당황했다. 범계위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초악량이 쿡 옆구리를 찔렀다.
―일단 목적 달성까지는 가만히 있어.
초악량의 전음에 범계위가 울상을 지었다.
―저 여자 성질 모르오? 우리 둘 다 끔찍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소.
―왜 우리냐? 너지.
범계위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치사하게 이럴 거요?
초악량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딴청을 피웠다.
그 모습을 지그시 노려보던 범계위가 이내 한숨을 터트렸다. 그리곤 곧장 벽화령을 향해 말했다.
“나 장가가러 온 거 아니야. 용건이 있어서 왔어.”
그렇게 만류했건만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 버린 범계위의 모습에 초악량이 경악하고 있을 때였다.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벽화령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용건?”
“해남파에 염화단철이란 게 있다며?”
“있다면?”
“그거 나 주라.”
벽화령이 조용히 웃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까 날 가지러 온 게 아니란 말이지?”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키는 범계위를 향해 벽화령이 다시 한 번 화사하게 웃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줄게. 그러니 이번엔 제대로 말해. 날 데리러 왔다고.”
“……아닌데?”
“그럼 우리의 약속은?”
범계위가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초악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나 초악량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
벽화령이 범계위를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다가선 만큼 범계위가 물러섰다.
“그렇단 말이지.”
그 말과 함께 벽화령은 계속해서 범계위를 밀어붙였다.
그 미묘한 대치는 결국 범계위가 배 난간에 아슬하게 발을 걸칠 때까지 이어졌다.
벽화령이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피하지 마.”
“응?”
범계위의 반문에 벽화령이 단호한 눈빛으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분명히 말했어. 피하지 말라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벽화령이 두 손을 뻗어 범계위의 멱살을 와락 움켜쥐었다. 그리고 범계위를 끌어당기며 더없이 고혹적인 붉은 입술을 내밀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기 직전.
범계위가 손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이거 때문에 온 거 아니라니까?”
“……!”
그 순간 벽화령의 눈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폭발했다.
퍼엉!
배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범계위의 신형이 허공에 떠올랐다. 벽화령이 범계위의 가슴에 다짜고짜 일장을 갈겨 버린 것이다.
호신강기 덕에 그리 큰 피해는 없었지만 발 디딜 곳이 사라진 범계위는 그대로 바다로 추락했다. 수면을 찍고 그 반탄력을 이용해 다시 허공에 솟구친 범계위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무슨 짓이야!”
“이런 짓.”
범계위는 더 이상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눈앞을 향해 날아드는 거대하고 육중한 쇳덩이 때문이었다.
쩌엉!
힘껏 손을 휘둘러 가공할 기세로 날아든 닻을 쳐 내긴 했지만 범계위의 신형은 다시 바다로 추락했다.
첨벙.
바다에 빠진 범계위가 황당한 얼굴로 배의 난간을 올려다봤다.
그런 그를 향해 차디찬 목소리가 쏟아졌다.
“십 년 만에 돌아와서 뭐가 어쩌고 어째?”
“어?”
범계위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그극.
벽화령이 무언가를 끌고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대한 화포였다.